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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이단의 원조(元祖), 성주교의 김성도 권사

기사승인 2010.05.31  07: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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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이협 개최 ‘이단사이비 예방 심포지엄’

이영호 목사 / 평택시기독교연합회장, 팽성장로교회

1. 金聖道의 生涯

김성도(金聖道) 여인은 1882년 음력 7월 1일에 태어나 만17세 때에 평안북도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 457번지의 정항준(鄭恒俊 당40세)과 결혼하였다. 정항준은 다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 철산에서 벼슬도 했고, 재산도 있었는데 결혼을 두 번이나 했던 그는 김성도와는 27세 연상의 사람이었다.

첫 부인에게서 딸 하나가 태어났고, 둘째 부인에서는 아들 둘이 태어났으나, 친척의 강요에 따라 대를 잇기 위해서 김성도에게 정식 새장가를 들게 되었다. 그런데 김성도는 결혼 후 둘째 부인으로부터 모진 구박을 받으며 시집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대를 이을 아들을 고대하다 김 여인이 낳은 첫 아이는 아들 이였으나 그 아이는 1년 만에 쇠고기 먹고 체해서 죽고 말았다. 그 남자 아이는 밤에 죽고 딸아이는 그 이튿날 새벽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딸 쌍둥이를 낳고 1906년 6월 25일 에야 둘째 아들 정석천(鄭錫天, 통일교 장로로 구리시에서 살다 사망한 자)을 낳게 되었다. 1)

그런데 이 아들을 낳고 나서 김성도는 일종의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집안에서는 김성도의 정신이상증세를 고치기 위해서 무당을 부르고, 병원을 찾는 등 여러 가지로 애를 썼으나 별 차도가 없었는데, 노 권사라는 전도부인(傳道婦人)이 와서 “이 병은 예수를 믿어야 낫는다”고 일러주어 그때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해서 약 3개월 뒤에 정신 이상증세가 완치되었다.

정석천은 그때 모친 김성도의 나이가 33세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1년 뒤 아들 정석천이 병이 들어 기도로 낫게 되자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 여인은 더 돈독한 신앙인을 갖게 되어 정식(正式)으로 입신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남편 정항준의 가문은 대대로 유교 가문이었으므로 아내의 기독교 신앙을 못 마땅히 여겨 모진 박해를 가하다 만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강문일, 김문석 공동저서인 「기독교이단제설」에는 정항준의 말년에 대해서 “김성도 여인의 남편(정씨)는 자기 부인이 예수 믿어 재산을 축내고 미친 짓한다고 몹시나 미워하고 구타도 많이 했으나 김여인이 사랑과 순종을 함으로 감동되어 예수를 믿다가 임종시에 자식들을 모아놓고 ‘네 어머니가 바른 주님이다’고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2) 이렇게 남편 정씨는 김성도의 결혼 17년 만에 죽은 것이다. 3)

김여인의 손자 정수원은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핍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교회에서 돌아 왔을 때 할머니가 집안에 안보이면 교회로 찾아갔다.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할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나와 때리고 차고 하면서 집에까지 끌고 왔다.(중략) 할머니가 일요일에 교회 갔다 오면 (중풍으로 누워있던) 할아버지께서는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고는 ‘교회 갔다 왔다’고 하면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여 곁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아 발가락에 감아 끼우고 목침으로 할머니를 때렸다”고 전한다. 4)

2. 入神體驗과 神秘主義 運動

당시 한반도 전역에 걸쳐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1919년, 김성도 여인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아 더욱 열심히 정성을 쌓았고, 1922년에는 세계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중(中)에 입신하여 여러 가지의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 김여인의 집은 여섯 칸 집으로 아주 큰 집이었는데 ㅁ 字 형(形)으로 되어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 곳간 그리고 큰 홀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게 되면 역사가 벌어지고 병도 낫게 되었다고 한다. 5)

통일교 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꿈에 그리던 주님을 뵈옵고」(1986. p. 155-184)에 나타난 한학자의 모친(母親) 홍순애의 증언(證言)에 따르면, “김성도 여인은 보통 말할 때에는 새색시 같이 가만 가만 말 하지만 기도할 때 보면 어떤 남자 못지않게 아주 우렁찬 음성으로 기도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故 탁명환은 이 부분에 대해 「기독교이단연구」(p.101)에서 “김성도 여인은 3백석 부자였고 창고에 멍석을 깔고 항상 병자들과 함께 하며 그냥 먹이고 입혔고 얼마나 많이 기도를 했는지 무릎과 팔꿈치에 굳은살이 붙을 정도였다. 그녀는 등창이 난 환자나 거지를 손수 씻기고,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병을 고쳐 주곤 했다”고 전하고 있다.

김성도 여인의 손자가 부친 정석천으로부터 들어서 기억하고 증언한 바에 따르면, “김성도는 1923년 음력 4월 2일 입신하여 천군 천사들을 만났고 그때 예수와 나눈 대화 속에는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지상인 들의 불신 때문에 예수 자신이 억울하게 죽었으니 교회당에서 십자가를 떼어내는 운동을 전개하라’는 당부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열흘 뒤인 음력 4월 12일에는 예수와의 두 번째 면담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 예수로부터 “재림 주님이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6)

이때의 대담 내용들은 길이 2m 폭 30㎝의 종이 12장에 기록하여 놓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죄의 뿌리에 대한 시각, 십자가에 대한 시각, 육신 입은 재림론 등은 오늘의 사이비종교가 사용하는 상투적인 단골 메뉴다. 그 뒤에 김 여인은 또 입신하여 “때가 급하니 속히 세상에 널리 알리라”는 계시를 받고 담임 목사에 보고했더니 사탄의 역사로 돌리면서 자제 하라는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신비체험에 대한 소문이 교회에 나돌아 교우들이 그녀에게 자주 찾아오게 되자 1925년 교단으로부터 책벌(策罰)을 받아 출교(黜敎)되었다. 7)

1931년 2월에는 딸 정석현에게 “새주님이 나타났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탁(神託)을 받은 온 가족이 사흘 동안 금식하며 참회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김 여인으로부터 기도를 받음으로써 생명의 자유를 찾는다고 믿게 되었고, 계시를 통해서 받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새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그 노랫말에 보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생명의 자유를 찾았으니 감사합니다. 애정의 자유를 찾았으니 감사합니다. 자유 원사탄이 장사함을 감사합니다. 기쁘고 감사하다 새주님 왔다. 사탄에서 승리함을 감사합니다. 영광 영광 내가 누릴 영광을 감사합니다. 세상사탄권세 다 없어지고 하늘의 주의 음성 들려오는데 새로운 천지에 머리 들고 나서니 광명한 에덴동산 열리는구나 에덴동산 나의 좋은 품속에 무궁한 생명강수 흘러가는데 새로운 천지에 새주님 역사로 죽었던 나의 영혼 부활하였네”라는 식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13번이나 나오고 “기쁘고 감사하다 새주님 오셨다”는 식으로 “새주님 왔다”라는 말이 3번이나 나온다. 8)

이래서 항간에서는 김성도 여인을 따르는 무리들을 <감사교>, <감사패>, <새주파>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손자 정수원의 회고에 의하면 “어린 시절에 친척과 동리사람들로 부터 ‘새주(主) 새끼’로 불렸다”고 한다. 9) 그렇게 된 이유는 김성도의 남편 정항준이 임종시 자식들을 불러 모아놓고 “네 어머니가 바른 주님이다”라고 한데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10) 당시 장좌동 현지를 목격한 사람 김선환의 회고에 따르면,

“평북 철산에 김성도라는 권사가 있어 병 고치는 은혜를 받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다. 사방에서 많은 병자가 모이므로 기도를 받으면 즉석에서 마음이 감동되자 권사란 명칭을 부르지 않고 <새주님>이라고 불렀다. 이 새주는 자기 앞에 十二 제자를 두고 기도 끝에도 <새주님>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했다…. 그들은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역사! 역사! 새주님 역사! 진주문에 들어가서 새주님 만나자’고 야단법석을 한참 한다. 이것이 끝나면 새주는 성신(聖神)을 부어줄 터인즉 입들을 벌리고 기도하라고 한다. 새 주(主)가 냉수를 입에다 뿌려 주면 그 냉수를 받아먹느라고 큰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새주의 입에서 나오는 냉수를 받아먹는 것이 성신을 받는 줄로 믿었다. 김성도 집단은 ‘감사노래’를 열심히 부르다 보면 춤을 추게 되고, 그러다 보니 혁대가 있는 옷도 벗겨지기도 하였고 심취된 이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는데 이런 일로 한 사람당 벌금 10원씩인가 문 적이 있다고 한다. 11)

이런 집회의 열기가 계속되자 경찰에서 간섭하기 시작하였는데 김성도 권사의 집을 방문하러 오는 이는 누구든지 부서면 面소재지에 있는 경찰지서에 신고를 해야만 하기도 했다. 12)

3. 聖主敎 創立

관(官)의 감시가 심해지는 가운데 1932년에는 이용도, 백남주, 이호빈 등이 김성도 여인의 집에서 접촉하게 된다. 이런 왕래를 시발로 1933년 10월에는 새주파가 원산의 한준명, 백남주, 이용도의 ‘예수교회’에 합류하게 되었다.

「예수」지 제5호(1934년 5월호) 통신(通信)란(p.33)에는 “평북 철산군 부서면 장좌동 장좌 예배당은 1933년 10월일에 개천식을 거행하였고 김성도 여사와 정석천 복음사가 무수한 핍박 속에서 희생적 수고를 거듭하고 있으며 그간 백남주 목사와 리종현 복음사가 일주일식 삼차 집회가 열렸고 지난 三월 一일부터 八일까지 리호빈 목사와 한의정 복음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여러 은혜가 풍성하였으며 근지(近地) 참석한 사십(四十)명 교인까지 충만한 기쁨을 얻고 도라 가섯다. 교인 수는 一백 三十명 가량이며 금번 집회에 신자수는 五명이라 한다”고 전(傳)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이 예수교회의 전도사격인 복음사(福音師)로 임명을 받은 것과 당시의 새주파 교인 수가 130명이라는 事實을 찾아볼 수 있다.

1935년 들어 새주파는, 예수교회의 창립 主役이였으나 ‘天國結婚’ 사건으로 원산의 신학산에서 쫓겨난 백남주 목사를 새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의 뒤를 따라서 그의 弟子 김백문도 왔고 김남조도 왔으니 그때가 1935년 봄이었다. 이때부터 새주파는 예수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1935년 10월 ‘聖主敎’라는 간판을 달고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을 대표로 한 종교단체로 조선총독부 종무과에 정식허가를 받아 등록한다. 이렇게 해서 설립한 ‘성주교’ 창립예배 사회는 김백문이 맡았다.

관청의 허가를 받고 부터는 장좌동 외(外)에도 안주, 평양과 정주, 숙천, 해주, 서울, 원산 등을 포함하여 약 20여 군데 집회소가 생겨났다. 「기독교 대연감」(1992년 기독교문사 刊) 이 일제총독부 자료(1925 - 1940년)를 인용해 발표한 ‘해방 전 북한교회 통계’에 의하면 성주교회 현황은 교당 수효가 평남8, 평북5, 함남2, 함북3,으로 기록돼 있고, 교직자 수는 평남8, 평북3, 함남3, 함북4, 신도수효는 평남94, 함남28로만 나타나 그 외 지역에는 교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종교관련 잡지중의 하나인 「信仰生活」에서 發行人 김인서 씨는(필자주: 당시 장로) 후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제군이 새주교회를 시인한 이상 새主之子 鄭복음사 평양 새교회에서 「새주역사」란 주문을 고창 선전함은 당연한 일이오 제직과 교인이 새역사에 열광한 것은 정한 일이다. 이리하여 새주창파 새주불창파로 파장이 생기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13)

4. 성주교의 主要敎理

김성도의 아들 정석천의 증언에 의하면 김성도 여인의 메시지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①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일을 따먹은 것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남녀 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 즉 음란이 타락의 동기가 되었다.
②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지 않고 뜻을 이루어야 한다.
③ 하나님[께서] 2대 슬픔을 갖고 계시는데 그 첫째가 아담이 타락하는 순간을 아시면서 간섭하시지 못하시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으셨던 슬픔, 둘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이루셔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보시는 슬픔이었다.
④ 재림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⑤ 재림 주님은 한국으로 오시며 만인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 14)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역사편찬위원회는 문선명의 설교를 인용한 「史報」에서(157호, p. 41) 그녀가 하늘로부터 받았던 12가지의 重要한 啓示라며 다음과 같이 傳해주고 있다.

“1.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해방. 2. 재림주님은 한국으로 오실 것인데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육신 쓴 한 인간으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한국인이다. 3.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과일이 아니고, 타락은 사랑의 행위였다. 즉 타락은 사랑의 잘못으로 일어났다. 4. 남자와 여자는 결혼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결혼은 참된 결혼이 아니라 거짓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결혼 한 부부에게는 성생활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5. 주님은 새로운 혈통을 세우려고 오신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 주님을 영접하려는 모든 사람은 마음과 몸은 정결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생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월간 <통일세계>는 “김성도 권사의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면서 홍순애 여인의 증언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간추려 紹介하고 있다.

“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죽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연장된 것이다. ② 인간의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해와의 잘못된 성생활, 즉 음란으로 타락했다. ③ 재림 주님은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여인의 몸을 통해 육신으로 한국에 태어날 것이며 한국은 에덴동산이 된다.” 15)

김성도 여인이 여기서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고 보게 된 것은, 그녀의 출석교회 담임 목사가 남녀 문제로 구속되자 충격을 받고 죄에 대하여 깊이 파고드는 기도를 하다가, “이제까지 너만큼 죄의 뿌리를 알려고 애쓰는 자가 없었다”고 하시면서 ‘죄의 뿌리는 음란’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 때문이며, 주님은 육신 쓰고 한국으로 오신다는 등의 음성을 들은 데 있다. 이래서 김성도는 아들 며느리에게 부부 생활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째 아들과 딸들은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16)

이런 이유로 추종자들은 고기 음식을 금하는 식생활을 했다. 왜냐하면 “음란으로 타락을 했기 때문에 고기를 먹으면 정력이 생기므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시가 있어 고기반찬이 없다는 것이고, “음란의 혈통적으로 타락했으니 피를 맑게 해야 된다”고 하면서 쌀을 불려 생식을 했는데 이렇게 생식을 해서 피를 깨끗하게 한 다음 재림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복중교로 전승되어 갔다. 복중파를 믿는 가정이 제주도(제주도 서귀포시 상효동 1283번지)에 최형렬 씨(정평화의 수제자) 남매가 사는데 그들은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고 생식을 하며 살고 있다. 17) 김여인의 아들 정평화는 경주에 시루미기 생식마을(경주시 산내면 우라 2리 산 90번지)을 조성해 추종자들과 함께 살다가 그곳에 묻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정득은의 「생의 원리」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 통일교의 「원리해설」, 이만희의 「신탄」 등의 내용이 김성도 여인의 가르침의 골격을 전승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5. 聖主敎의 受難과 終末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이어 1940년대에는 창씨개명이 강요되기 시작하였고, 전쟁용 물자 공출, 징용, 징병 등이 강행되면서 자생종교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할 무렵 강진 출신 김영수라는 청년이 성주교에 와서 은혜를 받고 전도하다가 성주교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오고가던 계시 내용을 말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머지않아 일본이 망하고 해방되어 큰 복을 받게 된다”는 등의 내용 이였다. 그런데 이 김영수에게 전도를 받던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경찰 고등계 형사의 정보요원이였다. 이 사람은 성주교회의 일주일 집회를 참석하고 돌아가 들은 내용을 도경(道警)에 보고했고, 그래서 1943년 가을 김성도와 두 아들(정석천과 정석진)과 10여 명의 중심 신도들이 경찰에 연행되게 되었다.

이래서 김성도 여인은 심한 고문을 받고 3개월 만에 풀려났으나, 1944년 4월 1일 만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아들 정석천(1976년 11월 4일 71세로 구리 자택에서 사망)은 재산의 일부를 정리하여 그해 6월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 있는 광산 하나를 인수하여 광산업에 손을 대게 되고 장좌동 집회소는 방치되었다. 18)

 

 

미주

1. 「한국 메시야 운동사 연구」, 최중현 지음(생각하는 백성 刊, 1999), 20; 「뜻따라 한평생」, 통일교역사편찬위원회편(성화사 刊, 1987), 270-71.
2. 「기독교이단제설」, 강문석, 김일천 공저 (칼빈서적, 1991), 149.
3.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편, 「신앙수기, 제1집: 증언(證言)」 (성화사刊, 1982), 347; 세계기독교통일 신령협회 역사편찬위원회편, 「史報」, № 157호, 70; 「한국 메시아 운동사 연구」, 최중현 지음, 1999. 21.
4. 「史報」, № 157호, 74.
5. 「史報」, № 154호, 76.
6. 「史報」, № 157호, 76.
7. 「신앙수기, 제1집: 證言」, 347; 「한국 메시야운동사연구」, 최중현 지음, 24.
8. 「史報」, № 154호, 77.
9. 「史報」, № 157호, 71;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최중현 지음, 25.
10. 「기독교이단제설」, 강문석, 김일천 공저(칼빈서적, 1991), 149.
11. 「史報」, № 154호, 77.
12. 「사회악과 사교운동」, 김경래 편(기문사, 1957), 166-167.
13. 「신앙세계」, 1935년 7월호, 34-35. 「한국메시아 운동사연구」, 최중현 지음, 28.
14.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편, 「소명하신 길을 따라」(1986), 197-206; 증언 3집, 198-200. 정석천 통일교 장로의 증언(김성도의 아들), 251-252, 268-269, 정숭원의 증언(김성도의 손자), 158-163, 홍순애의 증언, 299-300, 오영춘 여사의 증언.
15. 월간 「통일세계」, 1996년 6월호, 167.
16. 「史報」, № 154호, 1997년 9/10월호, 45-46.
17. 「史報」, № 154호, 1997년 9/10월호, 80.
18. 「史報」, № 154호, 72.

 

 

이영호 목사 areobago21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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