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자 세상읽기 10/ 과학계
지난 해(2011) 후반, 과학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킬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두 가지 이론 때문이다. 중성미자(뉴트리노)와 힉스입자의 발견(?)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유는 한 마디로 다음과 같다. 중성미자는 빛보다 그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고, ‘신의 입자’라는 별명을 가진 힉스입자는 우주생성 원리를 밝혀줄 수 있다는 것이다.
▲ 월간지 <뉴턴> 2011년 12월호 |
과학 잡지 <뉴턴> (2011년 12월호)은 중성미자 관련 이야기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쉽게 정리해보자.
먼저 물리학 공식 하나를 소개한다.
E=mc²
이는 모든 물리학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공식이다. 이 공식을 말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인슈타인(1879~1955)을 언급하게 된다. 반대로 천재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을 생각하면 역시 위 공식이 입가에 오르게 된다.
위 공식의 핵심은 ‘C’라는 영문자에 있다. 이는 ‘광속’을 말한다. 빛의 속도다. 오늘날 그 값은 1초에 약 30만Km다. 흔히, 1초에 지구 7바퀴 반을 돈다고 쉽게 설명한다. 이는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네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다. 광속이 정해짐에 따라 시간이 정해지고, 지구의 위도와 경도에 따른 거리 측정이 가능해졌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삶에서 모든 측정은 빛의 속도를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중요한 위 공식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가 바로 그것이다. 빛보다 빠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을 뛰어넘게 된다. 공상 만화나 영화 속에서 접했던 일이 발생된다. 과거나 미래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시간이 광속에 의해 정의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제조건은 아인슈타인이 성립한 특수상대성이론의 기초이자, 위 공식의 핵심이다. 그동안 빛보다 빠른 물질이 발견된 바도 없었다. 어찌 보면 발견되어서도 안 될 만큼 중요하다. 따라서 위 전제 조건은 과학계에서 ‘진리’와도 같은 존재였다.
중성미자의 발견은 이러한 진리를 파괴시키는 사건이다.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연구 그룹이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의 실험 장치를 이용해 중성미자(뉴트리노)라는 소립자의 속력을 잰 결과 빛보다 약간 빨랐다는 것이다. 아직은 최종 결론이 내려진 것이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핵폭탄과 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중성미자와 함께 ‘힉스입자’ 관련 소식도 매가톤급이다. 매일경제(2011년 12월 13일자)는 “신의 입자 ‘힉스’ 확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힉스입자 존재 확률이 99.9%라는 과학계의 주장을 전했다(같은 시기 다른 신문들도 동일한 내용을 보도했다). 힉스입자의 의미는 그것을 통해 우주 생성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거대강입자가속기(LHC)를 통해 양성자 두 개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킨 뒤 충돌시킨다. 빅뱅 뒤 1000만분의 1초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힉스입자의 흔적을 찾고자 한 것이다.
▲ '힉스입자' 관련 기사(매일경제 2011년 12월 13일자) |
과학과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그에 따라 인류의 생활도 급변해 왔다. 과학 없이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 과학과 우리네 삶은 불가분의 관계가 된지 오래다.
과학의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과학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이는 과학 만능주의다. 과학 우월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과학주의는 과학에서 ‘인간’과 ‘하나님’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과학 스스로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또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과학이 인간보다 신보다 최고라는 식이다.
▲ <과학과 기독교>(호이까스, IVP) |
예를 들어보자. 1900년 경, ‘핵’이 발견되었다. 그 전까지 물질의 최소 단위로 분자, 원자로 이해했다. 과학은 그 원자를 다시 쪼개었다. 그래서 핵과 전자 등으로 구성되었음을 밝혔다. 과학주의는 핵의 발견에서 ‘인간’을 제거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핵폭탄이다. 1930년 경, ‘종’의 발견도 작지 않은 사건이다. 여기에서 역시 ‘인간’을 빼니, 인종차별의 결과가 나왔다.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호이까스, 과학과 기독교, Ivp, 1985).
과학에서 하나님을 빼면 ‘저절로’라는 공식이 나온다.
‘과학-하나님 = 저절로’
과학주의자들은 그렇게 설명하려고 한다. 우주는 빅뱅이라는 이론(엄밀히 가설이다. 상상의 이야기다)을 통해 소위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무기물이 강력한 전기력에 의해서 ‘저절로’ 유기물로 변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진화론이 들어왔다. 결국 인간도 원숭이에서 저절로 변화되었다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과학계는 계속해서 꿈틀거린다. 변화와 발전을 한다. 심도 있는 과학연구를 통해 긴밀히 하나님을 만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떠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판단을 하며 행동을 해야 하는가? 특히 과학 분야와 관련해서 말이다.
‘빛보다 빠른 게 있는가?’라는 명제로 위 질문에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 답은 ‘Yes’다. 두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하나님의 손길이 빛보다 빠르다.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는다. ‘저절로’라고 엉성하게 설명하려는 일부 과학자들을 향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라고 답을 한다. 우주 생성에 관해 논의할 때, 늘 대립되는 주제가 ‘창조냐, 진화냐(또는 저절로)’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한 답을 해야 한다.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길이 빛보다 빠르다(창 1:2). 하나님은 시간이나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다.
좀 더 과학의 방법으로 설명해 보겠다. ‘광년’이라는 단위가 있다. 빛이 1년 동안 간 거리를 나타내는 용어다. 어마어마한 거리다.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이나 도는 속도로 1년간 날아간 거리라면 상상 그 이상일 것이다.
우리네 지구가 속한 은하계가 있다. 그 은하계와 가장 가까운 은하계를 안드로메다라고 이름을 지었다. 안드로메다 은하계까지의 거리가 무려 225만 광년이라고 한다. 빅뱅에 의해서 우주가 만들어졌다면 은하 하나가 형성되는 데 최소 200만년이 걸린다는 말이 된다. 무엇인가가 빛의 속도로 날아가서 만든다고 해도 그렇다. 우주에 얼마나 많은 은하가 있는가? 오늘의 우주가 형성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도대체 얼마인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6일 창조를 말하고 있다. 이때의 하루가 오늘날의 하루인지 아닌 특별한 시간인지 의견이 다르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빛보다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창조의 결과도 감탄 그 자체다. 하나님께서도 창조한 모든 것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다(창 1:31).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View Point)을 ‘세계관’이라고 한다. 세계관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네 삶의 방향을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시대와 문화, 철학에 따라 인생의 ‘정의’가 달라진다.
▲ <창조 타락 구속>(알버트 월터스 외, IVP) |
기독교인들이 갖는 세계관을 ‘기독교세계관’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큰 기준이 있다. ‘창조-타락-구속’이다(알버트 월터스 외, 창조 타락 구속, IVP, 2007). 천지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위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게 골자다. 이에 상대하는 세계관은 이런 식으로 접근해 온다. ‘저절로-인간의 위대함-죽으면 끝’ 등이다. 세상은 저절로 만들어졌으며, 인간은 신과 같이 위대하며,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논리다.
정말 죽으면 ‘끝’이라고 믿는다면(혹자는 지옥이 없다고 함), 열심히 살아간다는 게 무의해 지기도 한다.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도 인생의 정답일 수 있다. 왜, 죽으면 끝이기 때문이다. 일부 이단자들처럼 소위 ‘영혼멸절설’을 믿는 이들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죽으면 영혼이 ‘팍~’하고 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어떠한가? 죽으면 끝이 아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이 땅에서의 인생은 ‘영원’에 비하면 ‘잠깐’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이 땅에 살면서 반드시 영원을 준비해야 한다. 그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지 않은가?
기독교세계관은 감사, 겸손, 영광, 영생 등과 연관된다. 성경의 기자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그래서 수 없이 찬양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편 8편)
둘째는 ‘양심’이 빛보다 빠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에 ‘무엇’을 두셨다. 바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다(롬 1:19). 이것은 ‘양심’으로 다시 말할 수 있다(롬 2:14~15). 이는 사람들이 죄의 일을 행할 때 특히 잘 나타난다. 어떤 행위를 할 때 순간 ‘아! 이것은 아니다’는 맘이 들 때가 있다.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의미다. 양심의 소리다. 성결하게 살수록 양심의 떨림이 세밀해 진다.
양심의 속도가 빛보다 빠른 이유는 일을 행하기 전에도 양심의 소리가 울리기 때문이다. 출발하기도 전에 그 결과를 아는 것과 같다. 바로 그 양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처음부터 거룩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를 잘 섬기라고 했다. 목회다. 그 목회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비법을 알려주었다. 바로 ‘믿음과 착한 양심’이다(딤전 1:18~20). 목회 중 수많은 판단과 결단의 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할까? 바로 착한 양심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울림’이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명령은 그래서 자연스럽다(벧전 3:16 등).
과학은 갈수록 발전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밝혀낼 것이며, 그에 따른 법칙들도 새로이 만들어질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혁명 수준에 가까운 일들도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한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다스리신다는 사실 말이다.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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