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개명’하면 운명이 바뀌나?

기사승인 2012.02.14  07:41:02

공유
default_news_ad1

- 장기자 세상읽기 14/ 개명


요즘 ‘불경기’란 말이 한두 번 언급된 게 아니지만, 확실히 경제가 불안하다. 회복될 기미가 당장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심각해지고 있다. 전 세계적인 추세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란 사태로 인한 ‘유가 불안’과 점점 수렁에 빠져 들어가는 ‘유럽 재정 위기’가 그것이다. 자칫 경기는 침체(stagnation)되고 물가는 뛰어오르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올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불경기 때에 나타나는 재미있는 몇 가지 사회적 현상들이 있다.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조선일보, “외모주의와 사회적 개입” 등). 비록 속설이지만 최근 그러한 현상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 어느 때보다도 짧은 치마(또는 바지)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마치 치마나 바지를 안 입은 것과 같은 ‘하의실종 패션’ 현상도 나타날 정도다.

‘립스틱 효과’도 있다. 불경기 때 빨간색 립스틱이 또한 잘 팔린다는 현상을 가리킨다. 위 두 가지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 ‘이렇다’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불경기 때 소비심리 위축에 반항하는 현상이라 본다. 짧은 치마와 빨간 립스틱은 소비심리를 자극한다. 또한 실제적인 도움도 줄 수 있다. 짧은 치마는 제작 원가 절감 효과를, 빨간 립스틱은 기초화장 없이 화장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이다.

개명, 즉 이름을 바꾸는 현상도 특징이다. 불경기 때 개명 신청자가 폭등한다는 보도다(조선일보, 2012년 1월 26일자). 개명과 불경기라는 말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래 통계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상관관계가 보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을 통해 개명이 이루어진 숫자다.

2004년 - 4만여 명
2005년 - 7만여 명
.
.
2009년 - 17만여 명
2010년 - 16만여 명
2011년 상반기 - 8만여 명

2004-2005년까지 개명한 자는 한 해 7만여 명 선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08년 9월에 미국의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발생됐고, 그로 인해 전 세계 경제가 휘청거렸다. 그 여파는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말 그대로 경기 한파가 불어온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 다음 해인 2009년 개명한 자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17만여 명이나 된 것이다. 이전에 비해 2배 반이나 넘은 것이다. 이것이 다음 해가 되어도 크게 줄지 않았다. 지난 해(2011년)에도 마찬가지다. 상반기에도 8만여 명이나 된다. 연말까지 통계를 내면 17만 명 가까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개명 현상은 최근 정치권에서도 일었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다. 경제가 아닌 정치적인 면의 ‘불경기’ 때문일 것이다.

개명은 불경기 속에서 새롭게 심기일전(心機一轉)하려는 긍정적인 의지로 보인다. 실추된 이미지를 끌어올리려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사람들은 단지 새로운 각오만을 위해 귀중한 ‘이름’을 바꾸려고 하는 것일까? 이름이 주는 의미가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 사람들은 이름을 바꾸면 자신의 운명이 바뀐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합편성채널 중 하나인 ‘채널A’에서 최근 ‘이영돈 PD의 운명, 논리로 풀다’는 제하의 흥미로운 4부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www.ichannela.com 참조). 이영돈 PD는 그 동안 <그것이 알고 싶다>, <생노병사의 비밀>, <추적 60분>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자로 잘 알려져 왔다.

한 여인의 사연을 소개함으로 위 프로그램은 시작한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소송 중이다. 31세 신혼 1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이혼하자”는 통보를 받게 된다. 특별히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막무가내였다. 이유인즉, 시어머니가 소위 며느리의 사주를 보고 왔는데, ‘남편 잡아먹고, 집안 망치게 할 사주’였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부추김에 아들이 이혼하자며 소송을 낸 것이다.

사주는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중심으로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기준이라고 한다. 사주는 절대 바뀔 수 없다는 게 역술가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동일한 사주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의 인생이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고 이영돈 PD는 제시했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 형제의 기구한 삶을 소개했다. 그들은 10여 세 때 뜻하지 않게 헤어져 40여년 후에 다시 만났다. 그들의 인생 역시 물과 기름처럼 달랐다.

사주가 절대 불변이라고 하면서도, 개명 등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역술인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취재 후 방송은 “그들을 위해 돈벌이 수단이 되지 말자”는 멘트로 결론을 맺기도 했다.

   
▲ '이영돈 PD의 운명 논리로 풀다' 채널A화면


개명! 그것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 전 필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가 막 직장에 입사했을 때의 일이다. 자신을 소개할 때 한 여직원이 자신을 ‘금자 씨’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이름만 밝힌 것이다. 친절하고 상냥해 보였다. 훗날 그녀의 성이 ‘지’씨임을 알았다. 왜 그녀가 이름만 언급했는지 알게 되었다.

개명은 자신감을 줄 수 있다. 새로운 인생을 향한 도전과 희망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개명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으로 인해 사기 피해도 많다. 무속신앙 속에서 헤맬 수도 있다.

과연 개명이 무슨 의미이며, 또 개명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성경 속에도 개명 사건이 나온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아브람 → 아브라함(창 17:1-8)
* 사래 → 사라(창 17:15)
* 야곱 → 이스라엘(창 32: 28)
* 시몬 → 게바(베드로)(요 1:42)
* 사울 → 바울(행 13:9 등)

위 예 중 두 가지를 살펴보자.

아브라함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복’을 주신다. 그것으로 아브람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지, 개명 때문이 아니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했다. 자손이 번창하는 것과 복은 관계가 깊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복은커녕 자식이 한 명도 없었다. 불안했다. 나이는 점점 많아져 생식 능력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결국 본 부인인 사래가 아닌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했고 그가 자신의 대를 이를 상속자라고 생각했다.

아브람의 나이 99세 때 하나님이 다시 그를 불렀다(창 17:1-8).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했다. 아브람의 믿음에 대한 훈계가 포함된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체결한다. ‘크게 번성시키겠다’는 말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는 말을 두 번씩 반복하며 강조한다. 그 언약 체결의 증표로 이름을 바꿔주셨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말이다. 즉, 개명된 아브라함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 이야기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사울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즉, 사울에서 바울로 개명된 것은 아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이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바뀌었다(행 9장). 인생 역전은 예수님을 통해서다. 개명이 아니다. 이후 그는 스스로 자신을 사울이 아닌 바울이라고 소개했다(롬 1:1 등).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규정했다(롬 15:16, 엡 3:1 등). 소명이다. 그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듬뿍 담겨 있는 셈이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별명이 하나 주어졌다. ‘성도’(saints, holy - KJV, NIV)라는 이름이다(고전 1:2). 말 그대로 ‘거룩한 백성’이다.

그 이름에 위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그 안에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언약의 대상을 “너와 네 대대 후손”이라고 하셨다(창 17:7). 그 대대 후손에 우리의 이름도 들어 있지 않을까?

그 다음 이웃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지상명령이다. 사도 바울의 소명이 곧 우리의 소명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웃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도록 섬겨야 한다.

훗날 우리들의 묘비에 기록될 표현으로 ‘성도 000의 묘’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