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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여행갈까요?

기사승인 2012.03.20  23: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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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자 세상읽기 19/ 여행


약 한 달 전 강원도 강릉으로 여행을 떠났다. 새로 부임한 전도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그저 멀리 떠나자고 했다. 프로그램도 없다. 있다면 바다를 보는 게 전부다. 가다가 배고프면 먹고, 지루하면 어디로든 핸들을 돌리기로 했다.

   
▲ 참소리박물관 자료집과 엽서들
두 곳에 들렀다. 참소리박물관과 테라로사 커피점이다.
경포대에 발을 내딛을 때마다 그 옆에 있는 참소리박물관을 눈여겨보았다. 그곳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입장료(7000원)가 비싸 망설였지만, 박물관에 나오면서 ‘잘했다’는 맘이 들었다. 기회가 되면 자녀들과 함께 다시 찾고 싶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각종 축음기와 여러 종류의 에디슨 발명품들에 대한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이 어느 역사가의 강의 못지않았다. ‘이런 것까지 우리나라에 있는가?’라는 맘이 들 땐 자부심까지 느끼게 됐다. 사설 박물관으로 손성목 관장의 땀과 인생이 담겨져 있었다. 더욱이 손 관장이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테라로사’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커피점이다. 강릉에는 커피거리도 있다. 바다가 보이는 커피점도 많다. 강릉시는 매년 10월 31일을 커피의 날로 선포하고 축제도 개최한다. 강릉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기쁨이다. 여행은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준다.

며칠 전 지역교회연합회 임원수련회가 있었다. 필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는 임원이 아니지만 관계자(observer)로 참석했다. 퇴촌 지역으로 점심 식사하러 가는 도중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란 곳을 스쳐지나가게 됐다. 계획된 바는 아니었지만, 동행했던 목회자들이 그곳에 들러보자고 했다. 역시 목회자들이었다. 그곳이 그들에게 예사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말 그대로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인권 박물관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함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공간이다. 생존해 있는 일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숙소인 ‘나눔의 집’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우리네 아픈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서 마음이 숙연해졌다. 여행은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깊음을 체험케 한다. 여행은 역사를 만나게 하기 때문일 게다.

   
▲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앞 동상들

지난 해 말, 우리는 우리나라의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선정됐다는 뉴스로 흥분된 적이 있었다. 제주도가 ∆브라질 아마존 ∆베트남 할롱베이 ∆아르헨티나 이구아수 폭포 ∆필리핀 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강 ∆인도네시아 코모도 국립공원 ∆남아프리카공화국 테이블마운틴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멋진 자연 유산이라는 것이다. 제주도는 이미 생물권 보전지역, 세계 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등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자연과학 분야 3관왕을 달성한 바 있다. 성산 일출봉은 이미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 420호로도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찜찜한’ 구석도 있다. 7대 자연경관 선정과 관련해서다. 주체기관인 ‘뉴세븐원더스’라는 곳의 실체가 의혹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관련 공무원들의 무리한 일처리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 부분은 더 두고 볼 일이다.

   
▲ 제주도 세계7대자연경관 선정 관련 신문 기사들

제주도가 좋은 여행지임엔 틀림없다. 우리나라에서 이국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몇 해 전 제주도를 자전거로 일주한 적이 있다. 자동차 여행과 전혀 다른 색다른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제위께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여행에 대한 정의는 많다. 그중 ‘현지에서 과거를 보고 행복하고, 미래를 보고 꿈꾸는 것’이란 말이 맘에 와 닿는다. 일상의 매너리즘에서 탈출해 기쁨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또 다른 자신의 발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바쁜 일상에 파묻혀있던 새로운 자신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유명한 연설문 중 한 마디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는 것이다. 지난 2005년 6월 12일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했던 말이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생각의 덫에 빠지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갇혀서 살지 말라는 뜻이다. 온전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시간을 사용하라는 권면이다.

시사 주간지 <시사저널>(1152호, 2011년 11월 15일- 11월 22일)은 ‘원숭이들을 상대로 한 실험’ 이야기를 통해 스티브 잡스의 연설 내용을 좀 더 재미있게 설명했다(p.89).

원숭이 다섯 마리를 한 우리에 집어넣는다. 우리의 천장에는 바나나가 매달려 있다. 그 아래에는 사다리가 놓여 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바나나를 따먹기 위해 사다리를 올라가면, 천장에서 찬물이 쏟아져서 모두가 찬물을 뒤집어쓰게 된다. 이렇게 몇 차례에 걸쳐 원숭이들의 시도를 무산시키면 원숭이들은 더는 사다리에 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사다리에 오르려고 하는 원숭이를 다른 원숭이들이 끌어내린다. 이제 원숭이 세계에 하나의 규범이 생긴 것이다. 다섯 마리 모두는 우리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합의에 이른 것이다.

흥미로운 일은 다섯 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새로운 원숭이와 교체할 때 발생한다. 새로운 원숭이는 당연히 바나나를 따기 위해서 사다리로 향하지만, 나머지 네 마리의 원숭이가 모두 이 신참 원숭이를 사다리에서 끌어내린다.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기까지 한다. 이 신입 원숭이는 사다리를 올라가면 찬물이 쏟아지는 것을 경험 해본 적이 없음에도, 사다리를 올라가면 안 된다는 규범에 순응하게 된다.

그 다음에 다시 처음 들어왔던 네 마리 중 한 마리를 새로운 원숭이와 교체한다. 물론 이 신참도 바나나를 따기 위해서 사다리에 올라간다. 그때 나머지 네 마리가 동일하게 말린다. 이런 식으로 처음에 우리에 들어왔던 원숭이들이 모두 새로운 원숭이로 교체되어도 사다리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규범은 그대로 남는다. 이때 찬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잠궈 보자. 찬물 세계는 더 이상 없다. 원숭이들은 사다리로 올라갈까?

위 이야기는 우리네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언제부터 왜 생겼는지 모르는 많은 규범들 속에 갇혀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문제는 그중에 매너리즘이라는 게 있다는 것이다. 여행은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그 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하며,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케 한다. 결국 여행은 나 자신을 새롭게 보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떠한 나 자신을 보고 발견해야 할까?

성경을 펼쳐보자. 창세기 22장 1-12절의 아브라함의 3일 여행 기사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3일 여행을 명하신다. 모리아산에 가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길을 떠나라는 말이다. 3일 동안 아브라함 뇌리 속엔 그 말도 안 되는 명령이 후벼 파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어떤 결과든 이유를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브라함은 3일 동안 고민해야 했다. 어쩌면 너무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아버지, 번제할 제물은 어디 있나요?”라고 묻는 아들이 질문은 갈등의 극치를 이룬다(7절). “바로 너가 제물이야”라고 말을 해야 하지만, 차마 입이 열리지 못한다. 다만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8절).

하나님은 이번 여행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다(1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만큼 사랑하는가’를 테스트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또한 아브라함 스스로도 자신의 ‘하나님 사랑’을 발견토록 하기 위해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13:1-3)는 의미를 여행을 통해서 발견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다(요10:10). 그리고 다시 이 땅을 떠나셨다. 우리들의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요14:1-3). 우리에게 참 사랑을 주기 위해 아주 먼 여행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이라면, 우리들의 여행도 예수님의 여행과 분명 관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은 우리네 인생을 ‘나그네와 행인’라고 표현하기도 한다(벧전 2:11). 우리들의 고향은 하늘에 있으며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 여행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히 11:16 참조). 여행이 기쁘고 즐겁다면 그것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갈 집이 없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방황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가까운 야산을 향해서라도 여행을 떠나보자. 걸어가면서 아브라함을 생각해보자.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매너리즘의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발견해보자.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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