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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만들어진 신’이라는 사람들 앞에서

기사승인 2012.03.30  00: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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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자 세상읽기 20/ 진화론 VS 창조론


케케묵은 논쟁이 최근 또다시 열렸다. 바로 ‘진화론 대 창조론’이다. 지난 2월 23일 진화론의 대표 선수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창조론의 대표 선수로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가 영국 옥스퍼드대 셀도이언 극장에서 공개토론회에 나선 것이다. 토론 주제는 ‘인간의 본성과 그 궁극적 기원에 관한 질문’이다. 역시 변하지 않는 ‘뻔~’한 주제다.

도킨스는 영국 옥스퍼드대 생물학자이며 <만들어진 신>(God Delusion) 등의 서적으로 잘 알려진 현존하는 최고의 진화론자 중 한 사람이다. 윌리암스 역시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최고성직자이자 신학자로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창조론을 대변하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맞붙은 것이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이번 토론회를 ‘헤비급 타이틀전’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비록 신선한 논쟁은 아니지만, 양진영의 거장이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토론회의 영상을 옥스퍼드대 사이트에서 직접 볼 수도 있다(podcasts.ox.ac.uk/nature-human-beings-and-question-their-ultimate-origin-video).

이번과 같은 ‘진화론 대 창조론’ 논쟁은 약 150년 전에 이미 한 차례 있었다. ‘헉슬리 대 월버포스’의 대결로 당시에도 초미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논쟁은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1859년) 이후 1년 만에 벌어진 것으로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가진 진화론자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ely)와 옥스퍼드 교구의 부주교이며 영국과학진흥헙회의 지도자 새뮤얼 월버포스(Samuel Wilberforce)에 의해 이루어졌다(시사 주간지 <주간조선> 최근 호 2196호, 2012/3/5-3/11 참조).

   
▲ <주간조선> 2196호 '진화론 vs 창조론' 기사


위 논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누가 이겼을까? 결과는 언제나 ‘무승부’다. 처음부터 답이 없는 문제였다. 제 3자의 입장에선 늘 그랬다. 이 논쟁을 보도했던 각 언론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각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자축했다.

그럼 여기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진화론 VS 창조론’ 어떤 게 맞는가? 그리스도인 입장에선 교과서적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자신의 답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에 있다.

   
▲ 도킨스의 책 <만들어진 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국에서 일어난 고리타분한 이번 논쟁이 오늘 우리들에게 적지 않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자 도킨스의 히트작 <만들어진 신>(김영사)이라는 서적이 그 핵심에 있다. 이 책은 유명 서점 스테디셀러 목록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한 마디로 잘 팔리고 있는 책이다. 우리나라 상황만 살펴보자. 지난 2007년 초판으로 처음 소개된 위 책은 지금까지 58쇄를 발행하면서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KBS ‘TV 책을 말하다’ 프로그램에 메인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마치 이 책을 뛰어넘지 않고는 ‘진화론 VS 창조론’을 언급하는 게 부족하다고 할 만큼 유명해 졌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도킨스는 자신의 책에 대해서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 책은 무신론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현실적인 열망이고, 용감한 행위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썼다. 당신은 균형이 잡힌, 행복하고 도덕적이고 지적인 무신론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일깨우고자 하는 첫 번째 사실이다”(p.6)며 자신의 책을 읽기만 하면 누구나 무신론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몇몇 유명한 이들이 자신의 책을 통해 무신론자로 돌아섰다고 예를 들기도 했다. 듣기에 따라서 섬뜩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책을 일기만 하면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될까? 이 책이 그 정도로 우리네 영혼의 방향을 ‘끼기긱~’ 소리를 내며 180도 틀어버릴까?

오늘 이 책 앞에 서 보자. 도킨스의 도전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답을 진진하게 고민하고 내려 보자. ‘진화론 대 창조론’ 무엇이 옳을까?

도킨스의 핵심 주장은 제목에서 밝힌 대로 ‘신은 만들어진 것’으로 집약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종류의 ‘신’도 모두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고 한다. ‘신’은 없다는 말이다. 특히 로버트 퍼시그의 말을 인용한 책 서두의 안내 글은 매우 도전적이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는 말이다. ‘신’을 향해 ‘망상(delusion)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망언이다.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적용시켰다. 기독교를 향해 정면으로 소위 ‘맞붙자'고 한 것이다. 어떻게 할까?

도킨스는 자신이 ‘신이 없다’고 한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10년 전 발생한 9.11테러,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의 싸움 등 인간들의 전쟁은 종교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형에 처하고, 여성을 학대하는 등의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일들을 예로 들었다. 모두 종교로 인해서 악한 일들이 인간을 괴롭히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도킨스는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오히려 권면했다. 얼마나 평화스러운가를 맛보라고 했다. 즉, 종교가 없으면 세상이 평화스러워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종교만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말이다.

정말 그럴까? 종교만 없어진다면 인간은 저절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까? 과연 종교가 평화를 주는 게 아니고 오히려 평화를 깨뜨려버리는 도구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도킨스에게, 또는 그와 같은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광야의 모세’를 떠올려보자. 80세의 노인이다. 하릴없이 세월만 축내고 있다. 젊은 시절, 한 때 그는 정말 잘 나가는 인생이었다. 부와 권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애굽의 왕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육신의 힘, 지식, 물질 등 모두 사라졌다. 심지어 자신의 정체성조차도 오락가락한 상태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출 3:9-10). 그리고 엄청난 명령을 내리셨다. “애굽의 내 백성을 인도하여 내라”는 것이다. 모세는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그에겐 당연한 반응이었다. 40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자신의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 상태인데 누구를 인도하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부름에 모세는 계속 ‘NO’라고 사인을 보낸다. 그 이유로 모세는 “나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성경을 자세히 읽다보면 그것은 표면적인 핑계일 뿐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도대체 당신이 누구십니까?’였다. 무엇보다도 모세 자신이 궁금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애굽에 있는 양 몇 마리라도 데려올 수 있지 않겠는가? 더욱이 큰 명령을 따르려면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심지어 애굽백성과 바로왕에게도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날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도킨스와 또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증명해주어야 하는 논리와도 같다. “하나님, 도대체 당신이 누구신데요?”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who I am, 창3:14). 처음부터 계신 분이다. 존재의 원인도 없으시고 스스로 만족하시며, 기쁘신 뜻대로 행하시는 ‘신’이시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렇게 소개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도 설명하셨다. 모세가 알고 있는 조상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을 부르고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과 함께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임을 알려주신 것이다. 역사를 만드시고 지금도 운행하고 계시다는 말이다.

모세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왕 바로가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을 해야 하는가’였다(창5:2). 그 질문에도 답을 주셨다. ‘나는 전능의 하나님, 여호와다’고 했다(창 6:2-3). 한 마디로 못하는 게 없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즉, 애굽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며, 그들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한 분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 일을 말씀하신 대로 모세를 통해 직접 실행시키셨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우리들이 상상도 해본바 없었던, 불가능한 그 일을 한 것이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도킨스의 ‘이유’에 반론을 해보자. 그는 전쟁, 인종말살, 인간성 파괴 등이 종교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의 예만 들어보자. 6.25전쟁은 종교 때문에 발생된 것인가? 일제침략은 어떤가?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마치 인종을 청소라도 하듯 벌어진 수많은 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루타’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았는가? 인간을 개, 돼지처럼 실험용 도구로 사용한 일들 말이다. 이때 종교, 우리의 기독교는 오히려 치료의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3.1운동의 정신은 어디서 나왔으며, 부모 잃고 갈 길을 잃은 우리네 아이들을 어느 곳에서 돌보아 키웠는가? 교회가 아닌가. 우리나라 교육과 복지의 정신적 뿌리는 또 어디서 왔는가. 역시 기독교정신이지 않은가. 이런 타인을 위한 희생정신의 근본은 유전자에서 찾는 게 맞는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발견하는 게 맞는가?

도킨스는 과학을 칭송했다. 과학이 모든 기원을 말해주고 있고 또 계속 연구되고 있다며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오늘날 그런 과학의 결과는 어떠한가? 1859년 <종의기원> 발표가 ‘인종 차별’의 단초를 제공해 주지 않았는가? 백인이 인종 면에서 우월하다는 백호주의가 싹을 틔웠다. 흑인이 열등하다며 노예로 부리려는 위험한 사상도 일어났다. ‘핵의 발견’은 결국 엄청난 위력의 폭탄을 만들어 놓고 말았다. 아직도 지구상에 수 천 개의 핵폭탄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과학의 결과물 아닌가?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전쟁, 인종말살, 파괴 등의 악들은 무엇 때문에 발생된 것인가. 하나님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 때문인가? 하나님이 악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이 악하기 때문인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롬 3:23). 또한 ‘인간의 악함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레 18:24-30). 결국 인간의 ‘악함’이 인간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악함으로 인해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간다는 것이다.

또 다른 도킨스의 자신감 앞에 서 보자. 그는 자신의 책 <만들어진 신>을 읽으면 무신론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필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는 오랫동안 이단 문제를 다루어 왔다. 이단 단체를 직접 취재해 왔고, 그들의 교리를 분석 보도해왔다. 특히 지난 약 3년간 한 단체의 교리서를 분석 비판해 오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이단 교주가 나를 찾아와 논쟁을 하자고 하면 어떨까?’ 맞붙어보자는 제안이다. 필자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다. 생각해 보자. 교주가 아니더라도 어떤 이단자가 찾아와 자신과 논쟁해보자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기본적으로는 논쟁을 하지 않는 게 좋다. 시간 낭비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자리를 만들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 바 있다. ‘두 사람(필자와 교주)이 아무런 설명을 하지 말고 오직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자’고 한 것이다. 그러면 누구의 믿음이 옳고 그른지 성경이 판단해 줄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모세를 인도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줄 자신할 수 있다. 정리해 보면, 성경을 제대로 읽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이 일을 정말 그 교주와 진행해 보고 싶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도킨스는 신앙행위의 대표적인 ‘기도’에 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드러냈다(그의 책, pp.99-100). 그는 기도를 ‘실험’으로 접근했다. 한 병원의 환자를 두 부류로 나눴다. 한 부류만 치유를 위한 기도의 대상으로 선정했다. 물론 두 부류에게 어떠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기도하는 이들에게도 어느 병원의 누구라고 알려주지 않고 기도를 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기도는 정말 능력이 있을까에 대한 실험이라고 했다. 도킨스는 결과를 통해 기도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했다. 식물 실험도 비슷하게 진행시켰다. 식물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게만 기도를 했다. 어느 그룹이 더 잘 성장했을까를 실험한 것이다.

도킨스의 실험은 자가당착일 뿐이다. 만약 어느 종교인이 도킨스 사상의 옳고 그름을 자신의 신에게 기도함으로 결정한다면 도킨스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겠는가?

‘실험’은 과학적 방법의 핵심이다. 실험을 통해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낼 수 있는 법칙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과학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실험이 무엇에든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학문에는 과학 이외에 철학, 인문학, 예체능학 등 다양하다. 서로 겹치는 영역도 있지만, 전혀 다른 분야도 매우 많다. 철학만의 영역, 인문학만의 영역 등 말이다. 신학은 이 모든 분야를 총괄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과학이 철학을 실험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인간은 무엇으로 사나?’에 대한 질문의 답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또한 과학은 인문학을 실험할 수 있는가? 예체능분야는 어떤가? 하물며 신학의 영역을 실험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것조차 코미디이지 않은가? 그것이야말로 ‘망상’일 뿐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모습을 향해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김”(사 1:4)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있다면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이일 것이다. 기쁠 때 감사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더욱이 슬플 때 의지할 이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 말이다.

‘하나님은 만들어진 신’이라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고, 천지를 창조하고 지금까지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운행하고 계시는 분이시라고 말이다. 또한 우리 하나님은 그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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