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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개혁을 넘어 변혁으로 가라

기사승인 2019.04.25  11: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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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대일 교수, 개혁을 위한 성서적 제안

한국교회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다. 개혁의 요구가 거센 이유는 개혁해야 할 요소가 많다는 의미다. 그만큼 교회가 부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 중심으로 달려온 한국교회는 성장이 멈춘 뒤에 이렇다 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교회가 사회의 빛을 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향해 바르게 서 있으라고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진단과 의견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성서적인 개혁이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이정익 목사)에서 지난 2018년 10월에 월례회에서 발제한 왕대일 교수(감신대 구약학)의 원고를 게재한다. 이 발제문은 개혁을 넘어 변혁으로, 교회성장시대 이후를 향한 성서신학적 제언- 사도행전 7:49-50의 이사야 66:1 해석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신학과 세계>(93호)에 투고한 논문을 강연형식으로 요약⋅수정⋅보충한 원고다(저자 설명). -편집자 주
 

개혁을 넘어 변혁으로, 교회성장시대이후를 맞이한
한국교회를 향한 성서신학적 제언

-사도행전 7:49-50의 이사야서 66:1 해석을 중심으로-

왕대일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구약학

   
▲ 왕대일 교수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게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46-50)

1. 왜 변혁인가?

한국교회는 지금 교회성장시대이후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지금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된 데에는 교회를 개척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며, 교회건물을 신⋅개축하면서, 교회를 선교공동체로 성장⋅부흥시킨 목회자들의 피땀 어린 헌신이 있었다. 한국교회 목사들만이 지녔던 열정과 영성, 지성과 헌신, 비전과 예지(銳智), 지도력과 경영능력 등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한국사회를 대변하는 종교공동체로 우뚝 서게 하였다. 그랬던 한국교회가 지금 모진 겨울을 맞이하였다. 교회성장의 동력이 꺼진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를 꼽는다면 교회생태계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교회 성장을 떠받치던 사회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한국교회가 위축되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사회가 직면한 인구고령화와 저(低)출산이 빚은 인구절벽 시대가 교인수의 절대 감소를 예측하게 한다. 국민소득의 증가와 반비례하여 찾아든 무(無)종교, 비(非)종교, 탈(脫)종교화 현상은 청장년층의 인구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나날이 전문화, 분업화, 기업화 되는 NGO 단체의 활동도 한국교회의 내일을 어둡게 한다. 각양 NGO 단체들이 교회의 역할을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대신 처리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 한국사회는 낚시, 등산, 요가, 필라테스 등 각종 스포츠 현장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들이 그 숫자에서 한국사회의 전체 종교인구수보다 많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시대를 과거형으로 기억하게 된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교회내적인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여전히 크고 작은 여러 개체교회들이 교회성장시대에 앓았었던 성장통(?)을 앓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 안에서 비롯된 문제를 봉합하기 급급하기에 한반도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정치사회경제적인 지형도가 급변하고 있는데 거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그 탓에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대중과 점점 더 멀어지는 현상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우리의 문제, 우리 안에 있는 문제, 우리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적극 치유하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의 기상도가 나아질 수 없다.

미국 드루(Drew) 대학교의 교수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s)이 10여 년 전 한국교회를 찾아와서 했던 강연은 지금도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당시 레너드 스윗은 교회의 역사를 4 M으로 정리하였었다. Mission→ Ministry→ Maintenance→ Museum.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좌표는 어디쯤인가? 아니, 한국교회의 내일은 어디 쯤 위치할 것 같은가?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이후 시대를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급변하는 교회생태계의 도전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 교회성장을 이루지 말자는 소리가 아니다. 교회성장시대이후를 준비하자는 것이다. “against church growth”가 아니라 “beyond church growth”를 말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달라져야 한다. 개혁(reformation)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혁은 리모델링(remodelling)이다. 개혁이 아닌 변혁(transformation)을 이루어야 한다. 변혁은 탈바꿈이다. 어떻게 변혁해야 하는가? 한국교회가 개혁을 넘어 변혁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가?

2.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교회변혁을 말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 글이 주목하는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7:46-50이다. 교회의 첫걸음을 기존 성전종교에 대한 변혁으로 외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6-8장에 수록된 스데반 이야기는 스데반이 예루살렘 공의회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로 말문을 연다. 스데반은 예루살렘성전을 헐어라고 외쳤던 나사렛 예수를 전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다(6:8-15). 그 진위여부를 대제사장이 추궁하자(7:1), 스데반은 아브라함에서부터 스데반 당시 예루살렘 성전종교에 이르는 이스라엘역사를 변증한다(7:2-50). 그 맥락에서 의인 예수를 죽였던 유대교 지도자들을 대담하게 고발한다(7:51-53). 나사렛 예수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의인” 예수를 처형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도리어 “천사가 전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공박하였다(7:51-53). 그 말을 끝으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다(7:54-8:1a). 스데반이 순교당한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8:1b) 된다.

여기에서 주목하는 대목이 스데반의 육성으로 들리는 예루살렘 성전 비판이다. 사도행전 7:46-50이 바로 그것이다. 그 핵심은 48-49절이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스데반이 거론한 선지자의 글은 이사야 66:1-2이다. 스데반은 자신이 외친 유대성전에 대한 반감의 근거로 이사야 66:1-2을 제시하였다.

스데반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대교성전이 있었다. 스데반은 바로 이 성전의 정당성에, 정체성에 정면 도전하였다. 예수공동체가 처음부터 예루살렘성전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형성된 예수의 제자들도 그 초창기에는 성전의 기도시간에 맞춰 경건생활을 조율하였었다(행 3:1). 유대교성전과 예수공동체의 교회가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소리다.

스데반의 순교는 이 모든 상황을 단번에 뒤집어놓는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교 성전과 결별하는 수순에 들어선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가 유대교로부터 박해받는 단체가 되면서 예수공동체가 비로소 교회 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박해는 교회를 태동시킨 모판이었다.

스데반의 성전관은 그것이 사람 손으로 지어진 건물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하나님은 “처소”(스케노마, 행 7:46)에 “다니시던”(미트할레크, 삼하 7:6) 분이지, “손으로 지은”(케이로포이에토스, 행 7:48) “집”(오이코스, 행 7:47)에는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 단서가 모세가 세운 “광야교회”(에클레시아 엔 테 헤레모스, 행 7:38)였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 7:37-38)

‘모세가 광야 교회에 있었고!’ 광야 교회! 표준새번역은 이 광야교회를 “회중”으로 옮겼다. 그러나 “회중”보다는 “교회”가 사도행전 7장의 의도를 잘 대변한다. 스데반의 설교는 바로 이 광야 교회의 정당성을 모세가 지은 성막⋅증거의 장막으로 연결시켰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행 7:44)

성전은 사람솜씨로 지었지만, 광야 교회, 곧 “증거의 증막”(스케네 투 마르튀리온, 행 7:44)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양식대로 지은 것이다. 증거의 장막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모양대로 지은 것이지만, 성전은 사람 손으로 지은 건물이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본래 그 존재형식을 유대교성전이 아닌 모세의 성막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유대교 배경을 지닌 구약학자들은 성막과 성전을 서로 긴장하는 관계가 아닌, 성전종교가 성막신앙을 수렴하거나 성막신앙이 성전종교로 구현되었다고 보려고 한다. 예컨대 레벤슨(J. D. Levenson)이 그런 경우다. 그에게 성막과 성전은 유대교 신앙으로 들어서는 두 개의 출입문이다. 그러나 사도행전기자의 관점에서 보면 성막과 성전은 그 위상에서, 그 본질에서, 그 역할에서, 서로 다르다. 증거의 장막은, 광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는, 유대교로 입문하는 성전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교회의 터전은 반(反)성전이었다.

사도행전의 초점은 예루살렘 성전종교의 지도자들에게 나사렛 예수를 바르게 깨우치게 하려는데 있었다. 예루살렘교회가 처음부터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가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렇지만 유대교가 시도했던 예수공동체에 대한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였던 교회를 유대성전종교의 울타리에서 떠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예수공동체로 하여금 성전종교의 변혁을 교회의 정체성을 세우는 기치로 삼게 했던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부터 “교회”라는 용어가 눈에 띄게 빈번히 사용된 것은 예사롭지 않다(행 8:1b-3).

스데반의 순교는 예수공동체의 신앙이 유대교적기독교에서 기독교적 이스라엘 신앙으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었다. 예수신앙공동체가 예루살렘 성전종교로부터 벗어나 교회(에클레시아)라는 이름으로 세상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근원적 계기가 되었다. 예루살렘성전종교의 그늘(?) 안에 있던 예수공동체가 온 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된 것이다(행 8:1-3).

교회는 박해받는 자리에서 성전종교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났다. 성전유형을 답습하던 공동체에서 증인공동체로 변혁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경건한 사람들”(행 8:2)이 떨어져 나왔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흩어졌으며, 회중의 규모를 셈하던 성전종교가 복음을 전하고자 흩어지는 교회로 변혁되었다. 성전이라는 건물을 추종하던 종교가 “도를 따르는 사람”(행 9:2)의 종교로 변혁되었다. 교회는 유대인에게만, 예루살렘에서만,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교회는 세워졌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행 8:1b)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진정한 변혁을 이루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전지향적인 종교유형을 답습해서는 그 미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유대교식 성전종교로부터 갈라서야 했다. 거기에서 떨어져 나와야 했다. 유대교에서 성전은 하나이었다. 모이는 곳이었다. 성전의 규모나 역할 등을 여러 개로 쪼개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밖의 것은 어디에 있던 그냥 회당으로 불렸다. 성전종교에는 계층(hierachy)이 있었다. 성전 제사장과 회당 랍비의 위상이 달랐다. 성전 안에서도 대제사장과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상이 달랐다.

교회는 유대성전종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변혁시킨 신앙공동체였다. 유대교에서는 회당 위에 성전이 있었지만, 예수신앙공동체에서는 교회 위의 교회란 있을 수 없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행전에서 모 교회 역할을 하였지만, 그 마저도 15장 이후부터는 그 위상이 미미해진다. 교회의 지도자도 더 이상 서기관이나 랍비, 제사장이 아니었다. 교회의 지도자는 처음에는 사도, 나중에는 목자, 목사, 교사이었다. 그런 바탕에서 교회는 모이는 종교에서 흩어지고, 나눠지고, 쪼개지는 공동체로 탈바꿈하였다. 교회의 첫 걸음은 성전종교의 대변혁이었던 것이다.

3. “오늘”의 성전에서 “그 날”에 세워질 성전으로

예루살렘 성전종교에 관련한 스데반의 증언은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한다”(행 7:48)는 선언으로 요약된다. 이 선언은 “하늘의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라는 이사야 66:1을 사도행전기자가 재해석한 결과다. 하늘과 땅에,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공간에,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데 예루살렘에다가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66:1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사야 66:1을 새기기 위해서는 그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이사야서 66장은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유다백성들이 제2성전건축(주전 538-515년)을 세웠던 일과 관련된 사회적 갈등을 그 배경으로 한다. 예루살렘에 두 번째 성전을 세우는 일은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런저런 정치사회적 환경 탓에 오랫동안 지체된다. 그 결과 포로후기 예루살렘 주민사회는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한 편에는 하나님이 “돌보는”(사 66:2) 자들로 불리는 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 편에는 이사야 66:3-4이 꾸짖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사 66:4)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소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자와 같다. 양을 잡아 희생제물을 바치는 자는 개의 목을 부러뜨리는 자와 같다.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치는 자는 돼지의 피를 바치는 자와 같다. 분향을 드리는 자는 우상을 찬미하는 자와 같다(사 66:3,새번역)

우리말 성경은, 개역개정이나 새번역이나, 이사야 66:3을 성전제의의 유효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투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대인의 성경(JPS)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

소를 잡아 드리고 살인도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고 개의 목도 꺾고, 소제를 드리고 돼지 피도 드리고, 분향하면서도 우상에게 찬송하고(사 66:3, JPS).

소와 양과 소제와 분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다. 살인(사람을 제물로 바치기)이나 개나 돼지를 제물로 잡는 행위는 이교도 종교제의다. 즉 이사야 66:3이 문제 삼는 것은 혼합주의다. 이스라엘신앙을 지키면서도 당대의 종교문화풍속을 거리낌 없이 추종하는 자들이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사야 66:1이 토해내는 제2성전건축에 대한 반감은 이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지 못한 자들이 제물을 드리는 곳이 성전이라면, 그런 곳은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이 모두 다 하나님이 거니시는 공간인데 “너희가 어떻게 내가 살 집을 짓겠으며, 어느 곳에다가 나를 쉬게 하겠느냐”고 되물으셨다는 것이다.

포로후기 시절 예루살렘의 유다백성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돌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사 66:2)

하나님은 겸손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종하는 사람”(사 66:2b, 새번역)을 돌보신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사 66:10)이다. 예루살렘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약속하신다.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사 66:7-8)

시온을 아이 낳는 어머니에 비유하고 있다. 시온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암시하고 있다. 시온을, 예루살렘 성전을, 그 품에 안긴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키우는 어머니로 적극 풀이하고 있다(사 66:11-13). 시온에 대한 진술이, 성전건축에 대한 태도가, 부정적인 어조에서 긍정적인 글말로 바뀌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는 성전신앙의 보고다(사 6:1-5; 36-37장). 그렇지만 구약 이사야가 거론하는 성전에 대한 진술은 다층적(多層的)이다. 이사야 1장에서 시온은 “딸 시온”(Daughter Zion)으로 소개된다(사 1:8). 시온은 바르지 못해서, 의롭지 못해서, 공평하지 못해서, 신실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쓴 소리를 들어야 되었던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다. 그랬던 시온이 이사야 40-55장에 들어서면 ‘여자 시온’(Lady Zion)으로 바뀐다. 그런데 그 처지가 가련하다. 시온은 버림받은 아내였으며(사 49:14), 자식 잃은 과부와 같았고(사 49: 21), 아기를 낳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여자였다(사 54:1). 그랬던 시온이 이사야 66장에 와서는 ‘어머니 시온’(Mother Zion)으로 달라진다. 아기를 낳지 못해서 안타까움의 대상이던 여자가 한 순간에 잉태와 출산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사 66:7-9). 풍성한 젖으로 그 자식을 먹이고 키우는 넉넉한 어머니가 된다(사 66:11-13).

이처럼 이사야서에는 성전 이미지가 “처녀 시온”→ ‘여자 시온’→ ‘어머니 시온’으로 달라진다. 그러면서 이사야서의 분위기를 현실지향에서 종말론으로 뻗어나가게 한다. 이사야 66:1에 각인된 성전 짓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나 이사야 66:7-14에 묘사된 어머니 시온에 대한 긍정적 시각은 모두 오늘의 시온이 아닌 그 날에 가서 만나게 될 내일의 시온에 대한 가르침에 해당된다. 그 내일은 야훼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날이다(사 65:17; 66:22). 그 날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사 65:18), 그 날이 되면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게 될 것이다(사 66:23). 왜 이 같은 종말론이 대두되었을까?

포로후기 시대의 제2성전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후원 아래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학개나 스가랴는 그 제2성전 공사를 적극 독려하였다. 성전이 지어져야 왕이신 야훼가 시온에서 세상을 다스리시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 영향으로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유다백성들 사이에 메시아신앙(Messianism)이 뜨겁게 타올랐다. 제2성전의 완공에 크게 기여한 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켜 “두 감람나무”로 호칭하였다(슥 4:3, 13-14; 참조, 학 2:23).

하지만 제2성전이 완공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아대망의 열기는 가라앉고 만다. 페르시아가 주도하는 현실종교의 실상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종말론 신앙이 대두되었다. 이사야 56-66장은, 특히 66장은 이스라엘 신앙의 지평선을 ‘현실에 만족하기’(status quo)에서 종말론으로 뻗어나가게 한다. 여기에서 이사야서 66장의 성전관이 제시된다. 예루살렘 성전을 사랑하면서도 오늘의 성전을 그 대안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성전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유대교가 물려받은 이스라엘신앙의 유산이 예루살렘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성전에 집착하지 않았던 것은 이사야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 제2성전의 위상이 그 신앙적 정통성에서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입에서 선포되는 성전관은 탈(脫)성전적인 위상을 띠게 된다. 탈(脫)성전적인 경건을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는 처방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현실의 성전이 아닌 그 날에 가서 세워질 성전을 조망했다는 것이다.

4. 탈(脫)성전과 반(反)성전에 담긴 간절함, 개혁에서 변혁으로

이사야서 66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현실에 기반을 둔 성전이 아닌, “그 날에” 하나님이 세우실 성전에 대한 조감도에 기초한다. 현실에 매여 있는 성전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성전을 조망한다. 하나님 신앙과 세상의 가치관을 적당히(!) 얼버무린 혼합주의의 탈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낳으실 순결한 새 시온을 바라본다. 그 내일의 시온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오늘의 시온을 과감히 내려놓는다. 그 종말의 성전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오늘의 성전에서 과감하게 벗어난다.

이사야 66장이 그리는 조감도는 기존 성전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변혁을 밑그림으로 삼는다. 폐쇄적이던 회중이 드리는 제사중심의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으로 변혁시키고자 하였다. 혈통을 따지던 공동체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사 56:3-7). 종교법칙을 따지던 공동체 유형을 하나님의 영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교 중심으로 변혁시켰다(사 61:1-2). 그러면서 부성적인 성전종교를 모성적인 성전신앙으로, 어머니 시온으로, 바꾸어놓았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사야가 품었던 그 종말론적 성전의 위상을 나사렛 예수가 구현하신다고 증언한다.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성막이 되신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 가운데 성막으로 오셔서 거하시는 하나님이다(요 1:14). 교회는 성막정신으로, 성육신 신앙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그리스도 찬가처럼 교회는 낮아져야 하고, 비워야 하고, 종의 형체를 가져야 하고, 복종해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빌 2:5-8). 그럴 때 하나님은 교회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빌 2:9) 이름을 얻게 하신다. 여기에서 사도행전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사야서 66:1의 탈(脫)성전적인 신앙을 아예 반(反)성전적인 가르침으로 적극 제시하였다.

신약에 인용된 구약구절은 여러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다. 사도행전 7장도 사도행전 본문이 자기 신학을 입증하려는 증빙문서(proof text)로 이사야 66:1-2를 제시한 경우로 보아야 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왜 그런가?

사도행전 7:49-50에 인용된 이사야 66:1은 그 말의 자리가 기독교신앙공동체가 유대 예루살렘 종교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나는 현장이다. 그 변혁의 자리에서 사도행전 7장은 다윗이 짓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을 위한 “처소”였으나 그것을 “집”으로 바꿔놓은 자는 솔로몬이었다고 과감하게 변혁적으로(!) 해석하였다(행 7:46-47). 사무엘하서 7:5-6에 따르면, 다윗이 짓고자 했던 것도 하나님이 살 “집”(바이트, 삼하 7:5)이었다. 그랬던 것을 사도행전 본문은 교회의 근거를 광야 교회(모세)와 하나님을 위한 처소(다윗)로 이어지는 전통으로 제시하고자 구약 이야기를 과감하게 개정시켰다. 한편에서는 탈(脫)성전에서 반(反)성전으로 나아가는 신앙공동체의 위상을 정립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가 걸어가야 하는 길을 모세(광야 교회)에서 다윗(하나님의 처소)으로 이어진 순종의 길로 재해석하였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 7장 본문은 출애굽기 25-31장의 성막신앙과 이사야 66장의 종말론 신앙을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 지은, 해석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기독교적 미드라쉬(midrash)라고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7장 본문이 예루살렘 성전종교의 변혁을 부르짖고자 붙든 구약의 말씀이 출애굽기 25-31장의 성막공동체와 이사야 66장의 종말론적 성전이라는 사실이다. 이사야 66장이나 사도행전 7장은 모두 기존종교에 대한 변혁을 주창한다. 기존종교를 변혁시켜야 하나님의 백성에게 살 길이 열린다고 주창하고 있다. 거기에는 모두 기존‘유대성전종교를 넘어서는’(beyond Jewish temple piety) 신앙유형을 적극 모색한 결과가 담겨 있다. 이사야의 경우는 그 유형이 예루살렘 성전을 종말론적으로 조망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스데반의 경우는 그 유형이 성전을 대체하는 광야 교회의 회복으로 나타났다.

사도행전 7장에서 들었던 스데반의 설교나 이사야 66장의 예언은 각각 자기 시대의 신앙공동체에게 쏟아낸, 그 신앙공동체의 존재양식이 변혁되어야 한다는 일갈(一喝)이었다. 일갈, 한 일(一), 꾸짖을 갈(喝)! 큰 소리로 꾸짖었다. 목이 메도록 소리 높여 외쳤다. 무엇을 외쳤는가? 현실주의에 붙들린 성전보다는 “그 날에” 완성될 성전을 외쳤다. 그 내일의 성전이 있기에 오늘의 성전에 매여 있는 자들을 향해서 그것은 혼합주의의 온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무엇을 외쳤는가? 사람이 만든 집보다도 하나님이 지으실 “처소”를 외쳤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광야 교회의 유산을, 하나님을 위한 처소라는 유산을 이어가지 않는다면, 그런 공동체가 이 땅에 있어야 될 이유가 없다고 꾸짖었다. 그랬기에 이사야는 성전의 진정한 실체를 종말론적으로 조망하는 방식으로 당시의 성전종교가 거듭나기를 소망했고, 그랬기에 스데반은 그 종말론적 비전에 기대어 아예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설파(說破)하였다.

이사야나 스데반의 말은 단순한 설명(說)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 성전종교를 깨뜨리는(破) 외침이었다. 신앙공동체는 처음부터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였다던 것이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유대성전종교를 깨뜨리는 변혁공동체이었다. 그 변혁공동체의 완성을 현실이 아닌 종말론의 지평에서 소망하였다. 그 날에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지평에서 오늘의 교회를 보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늘 ‘도상의 교회’(Church on the Way)가 되어야 한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길” 따라 “흩어진 사람들”(행 8:4)이 무더기로 쏟아지지 않았던가!

5. 그렇다면 한국교회, 어떻게 변혁되어야 할까

오늘의 한국교회가 스데반이 외친 광야 교회에서, 이사야가 외쳤던 종말론적 성전에서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교회의 변혁을 향한 “타는 목마름”은 우리 모두에게 다 절실하다. 그 절실함을 한 두 마디로 다 거론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사도행전 7장과 이사야 66장에 근거해서 한국교회의 변혁을 향한 이정표를 제시해볼 뿐이다.

스데반이 예루살렘의 교회를 유대성전종교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했듯이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 규모가 대형교회든 개척교회든, 탈(脫)성전화, 탈(脫)성전종교화해야 한다. 교회의 존재양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소리다. 교회가 성전을 짓지만, 그 성전은 성전종교의 성전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흩어져야 하고, 각 지역사회나 분산된 각 계층에 세워지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요즈음 우리 교회에서 성전은 교회의 하부구조(집회장소)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교회 안에 성전(예배당)이 있어야지 성전(성전종교) 속에 교회가 흡수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시작은 유대성전종교로부터 뛰쳐나온 프로테스탄트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다시 유대교식 성전종교로 되돌아가버려서는 안 된다.

교회의 규모를 축소하자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규모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마 25:14-30). 크게 자라는 나무도 있고 작게 자라는 나무도 있다. 다 주님이 키우시는 나무다. 단, 교회마다 자라서 교회끼리 더불어 숲을 이루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계시록으로 이어지는 신약의 말씀에서 교회는 서로 더불어 숲을 이루는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예루살렘, 안디옥,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빌립보, 골로새, 데살로니가, 고린도, 로마 교회 식으로 당시 지구촌에 교회라는 숲을 이루어나갔다.

이 점이 중요하다. 한국교회가 숲을 이루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개체 교회들이 각각 약진하고 경쟁하는 방식으로 생존(!)했지만, 이제부터는 나무와 나무가 함께 하는,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공생하는, 그러기 위해서는 조림(造林) 방식으로 교회변혁을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큰 교회는 있어야 한다. 아니, 있게 된다. 지역사회나 계층공동체의 구조⋅규모⋅형태 등에 따라서 교회는 얼마든지 큰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형태로는 아니다. 큰 교회 안에 여러 공동체들이 연합하는 형태로 그 체제를 달리해야 하고, 교회의 자원을 주변의 다른 교회들과 공유하며 하나님 나라의 디아코니아를 함께 펼쳐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단, 지금 모습으로는 아니다. 담임목사의 생계형 교회로서는 교회 역할을 할 수 없다. 큰 교회가 교회 안에 여러 공동체들을 연합체 형태로 두듯이 작은 교회도 작은 교회들끼리 연대하여 디아코니아를 공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에서 맞섰던 자들은 유대교의 바리새파 학자와 사두개파의 종교인들이었다. 레너드 스윗의 표현을 빌리면, 현상유지(maintenance) 타입의 종교인들이었다. 스데반은, 그리고 스데반 이후에 등장하게 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역시 레너드 스윗의 표현으로 설명하면, 전도(mission) 형의 종교인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신앙공동체의 지도자가 달라져야 한다. 주목할 것은 다 같이 전도와 복음전파에 힘썼지만, 바울과 실라와 바나바와 베드로 등이 서로 다 달랐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한국의 개신교회는 담임목사(당회장) 중심의 교회다. 이 체제를 존중하면서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면, 교회 안에 여러 명의 목사들이 공동으로 목회하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전도사, 강도사, 목사, 선교사만이 아닌 수도사 등도 같은 교회를 더불어 섬기는 목회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고시(강도사고시)를 패스 했다고 해서 꼭 담임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해서도 안 된다. 평생을 한 공동체에서 목사로 사역하다가 은퇴하는 트랙도 마련되어야 한다. 회사에 들어간 사원들이 모두 다 나중에 그 회사의 CEO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는 교회끼리도 통폐합해야 한다. 시장의 용어로 말한다면, 구조조정이나 MOU를 해야 한다. 교회 수가 너무 많다. 목사후보생을 배출하는 신학교가 너무 난립되어 있다. 한 교회가 한 교회건물을 세우고 짓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가 연대하여 함께 교회를 세우거나 교회건물을 짓고 공유하며 유지하는 형태로 존재방식을 변혁시켜야 한다. 그런 변혁을 위해 목회구조 마저도 공동목회 형태로 변환되어야 한다.

스데반의 설교에 인용되었던 포로후기 시대의 이사야는 종말론 신앙을 당시의 종교가 겪던 난관을 헤쳐 나가는 돌파구로 삼았다. 종말론 신앙이 무엇인가? 제도종교가 아닌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신앙이다. 그 “내일”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오늘의 나”를 내려놓을 줄 알고, 비울 줄 아는 신앙이다. 한국교회의 변혁을 위해서는 신학교육이 이런 방향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신학생의 숫자를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 교단신학교들의 구조조정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학교육의 체제와 내용을 과감하게 변혁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비롯한 개신교회의 신학교육은 지적 오리엔테이션(intellectual orientation) 중심이었다. 일정한 기간에, 일정한 과목을 이수하게 해서 목사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가르침 중심의 현행 신학교육은 넓게 보면 대학교육, 좁게 보면 직업교육이다. 직업교육이라면 졸업생들에게 하자가 발견될 경우 Recall이나 AS라도 해야 되는데, 현행 시스템으로는 그마저도 용이하지 않다. 이제는 지식을 가르치는 신학교육에서 하나님의 품에서 양육되는 신학교육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이사야가 종말론 신앙에서 현실의 갈등과 위기를 돌파했듯이 오늘의 한국교회도,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종말론 신앙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목회하는 목회자로 머물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성직자(목사)로 다시 조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늘 한국교회가, 레너드 스윗의 용어대로, 박물관(museum)으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 박물관은 기념관이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 한국교회도 기념관으로 그 위상이 추락할 수 있다. 다시 박물관시대→ 현상유지시대→ 목회시대→ 전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야성(野性)을 영성의 본질로 채워야 한다. 그 여정에서 교회의 이미지가 부성적에서 모성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시대이후에도 교회답게 자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심으시고 돌보시며 자라게 하신다.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

왕대일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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