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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가문 3대 설교집 '어떻게 살 것인가'

기사승인 2019.07.10  14: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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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은 전총장 엮음..사료 가치도 높아

<교회와신앙> 김정언 기자】  3대째 목회를 천직으로 삼아온 목회자 집안의 기념비적 설교집이 나왔다. 김중은 목사 엮음 <삼대천직(三代天職) 설교집: 어떻게 살 것인가>(태학사, 2019, 양장 427쪽)가 그것이다. 김 목사는 구약학자로, 장로회신학대학교 제18대 총장을 역임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순간 설교현장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의 지혜를 만나게 될 것이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설교자들의 생생한 삶의 역사를 만나기도 한다. 설교현장이자 삶의 현장에서 나온 주옥같은 '작품집'이라 할 만하다. 단순한 설교모음만이 아니라, 연보(年譜) 등 역사적 관련 문서와 강의/논문, 3대 초기부터 최근까지의 사진화보집 같은 부록들이 풍부해, 사료 및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엮은이의 할아버지인 목원(牧原) 김명집 목사(1893-1978)와 아버지 지원(志遠) 김경도 목사(1915-2011), 엮은이인 영지(榮至) 김중은 목사 자신의 설교 등, 19세기말에서 21세기까지 3세기를 아우르며 대를 이어온 이들의 설교 31편을 한데 모았다. 세 설교자는 실로 한국교회사를 수놓아 온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책 제목의 유래부터 범상치 않다. 장신대에 갓 입학한 엮은이가 여름방학 때 경산을 찾은 때, 함께 선영의 묘소를 돌보던 목원이 "네가 이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면 우리는 3대 천직을 하는 것"이라며, 훗날 삼대천직 묘정비(墓庭碑)를 세우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묘역 주변 환경의 현대화에 따라 여러 모로 여의치 못해, 결국 삼대천직 묘정비 대신 이 설교집을 내게 된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영지의 설교 제목에서 땄다.

   
▲ 영지 김중은 교수의 최근 모습

1대 목원의 애국과 투혼

제1대인 목원 김명집 목사의 설교는 1968년 연말 주일에 아들 김경도 목사의 진해교회에서 다니엘서 6장을 본문으로 했던 단 1편, '난관과 하나님의 교회'뿐이다. 희귀성에 있어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 일찍이 일본 강점 당시 두려움 없이 독립운동과 교육, 목회에 힘쓰다 나중 중국 샨둥(山東)성의 칭다오(청도·青島)로 피신해 현지에서 목회를 하다 다시 귀국한 그였다. 부록으로 그의 독립운동 관련 약사와 연보도 곁들여져 있다.

설교 '난관과 하나님의 섭리'는, 어려움 속에서 감사기도를 하여 결국 다리오 왕을 감격케 했던 다니엘을 본받아, 성도들이 현재에 부딪는 난관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늘 감사하자는 내용. 목원 자신이 중국에서 큰 난관을 겪을 당시 밤에 하나님께 고통 속에 간구했는데, 이튿날 깨 보니 그를 해하려던 중국인이 죽어있더란다!

목원의 삶은 실로 파란만장했다. 유년기에 신자가 되어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기미 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 학업을 중단하고 향리인 경산에서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했다. 정미업으로 대성해 대구에 큰 공장을 세웠다가 1918년 일제의 수탈로 병을 얻어 작고한 선친(김성율 장로)이 설립한, 경산 계동사립학교의 교장직을 맡아 후배양성을 하기도 했다.

   
▲  3대 천직을 이어온 김목사들. 왼쪽부터 목원, 지원, 영지

목원은 또 독립운동가들의 가족 생계를 돕는 투옥자 가족 구제회를 결성해 각 교회를 비밀 순회하면서 구호금품을 모아 전달하고 출옥자들의 귀향을 돕기도 했다. 그는 당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배은희(裵恩希, 1888-1981, 독립운동가, 훗날 목사, 대한민국 연합 장로회의 총회장,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의 하향을 계기로, 청년동지 20여명과 함께 자택을 본부 삼아 경산, 청도, 영천, 마산 등지의 교회청년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자신도 선봉에 서서 회집에 힘썼다.

그후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던 중 군자금 모금 차 귀국한 (계성중 동창) 이한수에게 헌금을 전달하다 일경의 탐지망에 걸려 심한 고문 끝에 금족령 아래 석방된 뒤, 은거생활을 하면서 양곡 수출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관원의 횡포로 가업도 중단하게 되자 상해로 망명하려다 다시 체포, 송환돼 고문을 받다가 미국 유학을 위장해 위기를 모면, 다시 자택에 은거했다.

1929년엔 관헌의 방해로 맏아들(경도)의 중학교 진학 길이 막히자, 자신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뒤 가족이 점차 평양으로 이전했다. 1937년 신학교를 졸업한 뒤(32회) 평양 근처 용천교회, 차리교회, 대동군 학교리교회 등의 목사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 강요가 심해지자, 주기철 목사와 의논 끝에 이번엔 참배 거부의 선봉이 되었다가 일시 목사직을 사면했다.

1939-1940년의 두 해 동안은 평양 주암산 아래서 어렵게 살면서, 새뮤얼 마핏(마포삼열)과 함께 1901년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한 스왤런 박사(Rev. Dr. William L. Swallen, 한국명 소안론/蘇安論)의 비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성경통신과 교재 작성에 조력한 것.

스왤런은 구약학자인 데다 찬송가 작가일 만큼 음악 재능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역시 구약학자이자 탁월한 피아니스트인 엮은이를 연상시킨다. 조선말에 능했던 스왤런의 설교는 당대의 천하 망나니, 김익두의 마음을 사로잡아 훗날 대표적인 한국 초기 목회자가 되게도 했다.

   
영지가 새긴 3대천직 전각도장

그 후 목원은 칭다오의 청도한인교회의 초청으로 10년간 목회와 예배당 건축에 진력하면서, 아내 최수영(첫 아내 전귀연은 1927년 병사)과 함께 맏아들 경도를 비롯한 8남매를 비롯한 대가족의 삶을 꾸려나갔다. 1945년 해방된 뒤에는 청도한인학교도 설립했으나, 중국이 공산화되어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한인교회당과 목사관을 빼앗기고 지난(濟南)으로 추방됐다가, 1958년 홍콩을 경유해 부산에 귀국했다. 두 해만인 1960년엔 성지교회를 건축하고, 조국 목회를 해 나아갔고, 말년엔 한의사 생활을 했다. 그는 일찍이 젊을 적에 전문적인 한의학을 배운 데다, 신유의 은사도 겸비했던 듯하다.

2대 지원의 목회와 생애

거의 평생 부모를 따라다닌 2대, 지원 김경도 목사의 삶도 얼핏 보면 아버지 못지않게 파란만장해 보인다. 그는 칭다오에서 동문서원(東文書院) 야학부 화어과(華語科)의 2년 과정을 1년만에 졸업한 뒤, 신의회 신학교를 거쳐, 산둥 등현신학교(훗날의 화북신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서주(徐州·쉬저우) 한인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 석가장(石家莊·스좌장) 한인교회 최성희 집사의 무남독녀 김옥명과 결혼하여 낳은 첫 아들이 바로 중은이었다. [화북신학교 출신으로 서주에서 목회한 이로, 그밖에도 (주계명 선교사의 숙부인) 주관준 목사 등이 있다.]

그 다음으로 상해한인교회를 시무하면서 난징 태동신학원에서 수학한 뒤 중공의 퇴거령을 따라 1949년 귀국해 진해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다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985년까지 36년간 같은 교회에서 목회생활을 하면서, 두 번 교회당 건축을 했다. 경남노회 성서학원 교사 및 원장직을 1955년부터 무려 30년간 지내기도 했다.

본서엔 지원의 설교 17편이 실렸다. 이전에도, 역시 김중은 목사가 엮은 '영귀상제 지사충성(榮歸上帝至死忠誠=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죽기까지 충성한다는 뜻) 고 지원 김경도 목사 1주기 추모문집(생명나무, 2012)'에도 20편 실렸다. 본서에 수록된 것들은 그 나머지로, 은퇴를 앞둔 시기에 한 설교들이다. 이해하기 쉽고도 철저히 칼뱅주의적인 내용들이다.

3대 영지의 삶과 글

조부와 부친을 이어 3대째 목사이자 학자, 교육가로 살아온 영지 김중은의 설교들은 평생 원고설교와 함께 강의, 논문 작성을 해온 까닭인지, 문장이 물 흐르듯 유려하다.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전도서에서 전도자가 세상만사는 잠깐이고 헛되다고 한 것은 해 아래에서 행하는 인간의 모든 지혜와 계획과 수고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역설입니다. 그러니까 해 위(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인생에게는 세상만사가 결코 헛되거나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전도서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과 하나님 제일주의 신학과 하나님 제일주의 가치관을 강조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결론짓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을 등지는 삶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염세적이고 금욕적인 종교가 아니며, 더욱이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기복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예수 믿은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저 천국에 갈 때까지 이 세상에서도 천국 생활을 맛보며 사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영지는 부록으로 실린 3 편의 글 중에서도 전도서에 기초한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원문과 학설을 곁들여 가며 논했다. 2013년 충신교회에서 한, 한국복음주의 구약신학회 세미나 기조 강연이었다.

영지 김중은 교수는 일찍이 쉬저우에서 태어나 상하이에서 자라다가, 귀국하여 진해에서 살았다. 진해중학교와 서울사대부고에 이어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피아노를 어릴 적부터 배워 반평생 교회 반주를 했다. 요즘도 조카의 원서 서점, '라비블'에서 수시로 연주하곤 한다. 군악대장이던 해군소령의 부탁을 받아 해방촌교회에서 반주자로 있던 시절, 담임목사 박치순의 설교 중 장신대에 교수가 부족한데 특히 구약학 교수를 찾는다고, 부친 지원의 설교에서와 똑 같은 말을 듣고 감화를 받아, 구약학 교수가 될 생각을 했단다.

사실 영지는 애초에 신학 할 마음은 없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친척조차도 그런 권유를 하지 않았다. 험난한 길임을 다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대를 졸업할 무렵 "할아버지도 목사고 아버지도 목사인데 나도 3대 목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장신대 신대원에 진학할 결심을 하고, 1971년 입학했다. 면접 때부터 구약학 교수가 되고 싶다고 공언했다.

1974년엔 스위스 바젤대학교 신학부 구약학 박사과정을 위해 유학을 갔다. 지도교수는 히브리어-아람어 자전(lexicon)을 펴낸 저명한 구약학자/고대언어학자, 발터 바움가르트너를 뒤이은, 에른스트 예니(Prof. Dr. Ernst Jenni, 1927- )박사. 김 박사는 귀국한 뒤로 영남신학교 강사를 거쳐, 1979년부터 2010년까지 약 30년간 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가르치면서 4년간 총장으로도 재임했다.

영지의 삶에서 여성들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속표지엔 외할머니 최성희 권사와 어머니 김옥명 사모의 믿음과 기도와 사랑의 헌신을 기리는 헌사와 관련 성구(요절)가 곁들여졌다.

김정언 기자 skm01_@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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