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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측 재판국아! 재판국아!

기사승인 2019.07.25  1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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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눈물로 호소한다.

최삼경 목사 / <교회와신앙> 상임이사

   
▲ 최삼경 목사

서론: 2019년 7월 16일 총회 재판국의 모습을 보고

본 통합측 교단과 한국교회는 물론 세상 언론까지 7월 16일 총회(통합측) 재판국에 시선을 집중하고, 그 결과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래도 2018년 통합측 총회가 세습 금지법에 대한 모든 법리 부서들(재판국, 헌법위원회, 규칙부)의 잘못된 결정에 철퇴를 가하였기에 별 어려움 없이 명성교회의 세습이 불법임을 밝히고 세습금지법을 굳게 지켜, 한국교회에 새 바람을 일으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2018년 총회 후 판결을 미루지 않고 즉시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총회의 열기가 식기를 기다리는 듯, 또는 이미 세습을 해 버린 명성교회의 세습을 기정사실화하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리고 재판국원의 가치를 높여 로비의 기회라도 주려는 듯(?) 미루고 또 미루고 미루었다. 그러다가 재판국은 2018년 총회후 10여 개월이 지나고 2019년 총회를 코앞에 둔 지난 7월 16일에 그나마 최종 결정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재판국에 긍정적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높은 여론 속에서, 재판국원 중에 바른 소명의식을 가진 분들이 상당히 있음을 알고 믿었지만, 역시 그날도 판결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분노와 고통과 슬픔을 억제하며 재판국원들의 마지막 양심에 호소하는 글을 쓰는 바이다.
 

본론: 통합 재판국원에게 교단의 운명과 한국교회 운명이 달려있다.

법정은 또 하나의 무서운 하나님이다.

이 땅에는 결코 하나님이 아니지만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언론, 경찰, 검사, 판사가 그렇다. 이들에 의해 한 번 억울한 판결을 받으면 헤어날 길이 없고 보상 받을 길조차 없게 된다. 이 지구상에 잘못된 여론 몰이로 희생되고, 잘못된 판검사들의 판결로 인하여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할 때, “그들은 이 땅의 하나님이구나”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톨스토이가 쓴 작품 중에 “하나님은 진실을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God sees the truth but waits)라는 단편에서 판사의 오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액시노프>라는 젊은 상인이 잘못된 판결을 받고, 살인 누명을 쓰고 시베리아에 유형 되어 26년이란 긴 세월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여 곡절 끝에 진짜 범인인 <세미오니치>라는 사람이 같은 감옥에 들어와 자기가 진범임을 고백하여 그의 무죄가 증명되고 석방 명령이 그 감옥에 전해졌지만, 그는 눈을 감고 말았다. 만일 처음에 바른 재판만 했다면 <액시노프>는 그토록 억울한 생애를 살다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약에 보면, 불의한 시대는 항상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제사장들이 타락하고 하나는 재판관이 굽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의 대표적 대상은 불의한 재판관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공정하게 판결하지 않았고, 뇌물로 굽은 재판을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그 시대가 의로운 시대인지 아닌지는 재판관이 의로우냐 불의하냐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불의한 시대에 의로운 재판관을 기대할 수 없고, 불의한 재판관으로 가득 찬 시대를 의로운 시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재판국 비전문성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부도덕성이다.

한국 기독교의 3백여 개의 교단들 중에 통합 교단은 도덕성이 가장 높은 교단이라고 확신한다. 기독교 윤리학자들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런 교단임에도 불구하고 통합 재판국이 이렇게 굽고 휘고, 로비에 휘말리는 경우를 보면 한국교회에 대한 위기의식은 극에 달하여 “더 이상 한국교회는 소망이 없는가”라는 탄성마저 나온다.

교회 재판에 두 가지 문제가 있음을 필자는 물론 전문가들도 수도 없이 지적하였다. 그것은 비전문성과 부도덕성이다. 그 중에 주목해야 할 문제는 후자 즉 부도덕성에 있다. 왜 그런가?

첫째 교회의 비전문성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목사들 중에 법을 전공한 분들이 그리 많지 않고, 법을 전공한 목회자라 하여도 탁월한 법적 소견을 가진 분을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목사 장로로 살면서 법적 전문성을 날카롭게 발전시키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일평생 법 하나만 가지고 살아온 정직한 법조인조차 그 견해가 정반대가 되는 경우를 쉽게 본다. 그런데 아무리 법을 전공하였다고 하여도,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법조인 장로는 다르겠지만) 그 전문적 식견을 유지하고 날카롭게 발전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둘째, 문제는 부도덕성이다. 만일 전문성이 높은 법관이 부도덕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위험하다. 원래 악한 사람일수록 무능하고, 빨리 죽을수록 좋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의 김일성이나 히틀러처럼 그 악은 더 극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굽은 사람이라면 ‘지식이 높으냐 낮으냐’ ‘능력이 많으냐 적으냐’ ‘힘이 크냐 적으냐’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높은 도덕 위에서만 긍정적으로 존재한다. 부도덕성 위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악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모래 위에 높은 빌딩을 지을 수 없음과 같고, 더러운 그릇에 깨끗한 음식을 담고 그 음식을 깨끗하다고 할 수 없음과 같다.

요즘 이구동성으로 들리는 소리는 한국교회는 총체적으로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그 부도덕성은 정치나 이단 문제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목회, 연합기관, 선교, 재판, 언론, 신학교, 심지어 이단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부도덕성을 드러내고 교회를 위기 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재판 문제이다. 그래서 총회 때마다 ‘재판국을 없애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맥, 혈맥, 돈으로 굽고 휜 재판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중에도 금품 로비를 받은 재판국원을 보면 그들이 목사요 장로인가 의심스럽다. 그런 목사를 볼 때 목사직을 반납하고 싶어진다. 필자는 목사가 됨을 후회한 일이 없고, 목사직의 영광을 모르지 않으며, 초중고 희망 사항에 한 번도 변함없이 목사가 되겠다고 하고 목사가 되었지만, 그런 목사들을 보면 목사직을 떼어내고 싶다. 필자는 가장 의롭다고 하는 통합측 재판국마저 뇌물 사건들이 있었음을 보았지만 그 때마다 그것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더 귀한 것들을 잃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작년에 재판국원 중 몇 목사가 재판과 관련된 교회 목사로부터 술대접을 받았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술을 대접하는 목사도 술을 대접 받는 목사들도 목사가 아니다.

그리고 필자는 본 교단 재판국원이었던 김0호 씨에게 1천만에서 일천 오백만원씩 7회나 준 근거와 녹화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 재판국원들은 무한 진실해야 한다. 어떤 인맥 혈맥을 동원하고, 아무리 많은 금품으로 유혹을 해도 목사 장로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 윤리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부끄럽고 추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바른 재판을 주문하는 의미에서, 한두 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세상 모리배들이나 갱단에서도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회개 운동이 유행인 것처럼 너나없이 회개하겠다고 하며 여기저기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할 때, 자기가 속한 교단에서 총회장을 지내고, 한기총 대표회장을 두 번이나 지낸 길 모 목사도 자기가 총회장에 출마하고 대표회장에 나설 때 금품 로비를 하였다고 공개적으로 회개한(?) 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한기총 대표회장직에 3번 째로 출마했을 때에, 금품 선거로 소란하였던 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는 점이다. 그분도 부끄러운 세습을 성공한(?) 대표적 목사다. 그래서 세습 지지를 위하여 명성교회까지 초청되어 설교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명성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던 한 신학자는 그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분이 있다. 통합측 교단 총회장을 지내고, 한기총 대표회장을 역임한 이 모 목사는 공중파 방송의 고발 프로그램에 나가 한기총 대표회장이 되려면 20억을 써야 한다고 고발하여 한국교회에 충격을 준 일이 있다. 비록 회개의 형식을 빌려 했던 폭로였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분은 회개한 죄를 또 회개해야 할 더 무서운 죄를 지은 것이다. 그분은 죄를 회개하려고 끔찍한 금품 선거를 자백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의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하려고 한 계산된 회개로 보인다. 놀랍게도 이 분 역시 명성교회 세습을 옹호하고 있는 점을 보면 유유상종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분은 통합측 총회를 영어로 PCK라고 하는 것은 기초적 상식이요 진실인데, 통합측은 UNITED PCK이며 자기가 만든 <한장교>라는 단체가 PCK라는 개가 웃을 소리까지 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분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아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최고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떠나시고 그 성전에 진노의 숯불을 부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떠나시고 징계하실까 두렵다.

미국 PCUSA 교단의 경우, 교회의 판결이 세상 법정에서 단 한 번도 뒤집어진 일이 없다.

현재 미국 PCUSA 교단의 교인 수는 통합 교단보다 100여만 명이나 적다. 그런데 미국 PCUSA 교단도 한국교회처럼 교회 재판에 승복하지 않고 세상 법에 제소한 일이 그동안 많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 역사 이래 단 한 번도 교회 판결이 세상에서 뒤집어진 일이 없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두 가지 때문이다. 그 전문성도 탁월하다는 증거이지만, 그보다 교단의 권위와 탁월한 도덕성을 세상 법정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는 어떤가? 번번이 세상법정에서 뒤집혔다. 교회법이 가지는 구속력은 작지만, 세상 법이 가지는 구속력은 절대적이다. 물론 구조적으로 세상법과 교회법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도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서울 교회>의 안식년 문제다. 이런 경우는 한국 유수 교단들이 힘을 합하고 나서서 정치력을 발휘하여 세상법정과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본다.

문제는 교회의 굽은 재판이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법조인들과 대화해 보면, 교회 재판이 세상법정에서 지는 결정적 이유 중에 하나는 교회가 바른 재판을 하지 않기 때문이란 것이다. 창피한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수치스런 일이다. 아니 통탄할 일이요 저주 받을 일이다.

혹 세상법정은 굽어도 교회법정은 굽지 않아야 한다. 교회법정은 세상법정보다 더 깨끗하고 더 진실해야 한다. 성전에 우상이 있다면 세상과 이방인들에게 있는 우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시대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시대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다 우상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 뇌물이 성행한다면 그 시대는 악하고 음란한 시대다. 그런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야 하고, 그런 성전은 시체로 가득차고 피로 채워지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장로와 집사의 자격으로 외인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을까?

상습적 이단옹호자요, 상습적 이단옹호 언론을 운영하는 자요, 지하철 성추행범이요, 지하철 절도범으로, 명성교회에서는 구세주처럼 의지하는 세습옹호자 황규학 씨의 경우, 그의 세습 옹호 핵심 논리는 속(俗-세상)과 성(聖-교회)의 구별이다. 왜 속(俗)으로 성(聖)을 평가하고, 속(俗)을 기준으로 성(聖)을 평가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세습옹호자들의 공통 논리다.

그러나 저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다. 저들은 성경을 보지 않든지 아니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3:7에서 감독(장로)과 집사의 자격을 요구하며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은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좁은 의미의 형상’이요, 하나는 ‘넓은 의미의 형상’이다. 그런데 좁은 의미의 형상은 영적 거룩, 영적 의, 영적 지식이다. 그런데 이 좁은 의미의 형상은 세상 사람에게 전혀 없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이 임한 후에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넓은 의미의 형상으로 그것은 이성적 도덕적 성품이며, 그나마 그것들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성도가 세상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느냐는 점이다.

세습옹호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세습을 싫어하고 악하게 보는 것은 속(俗)으로 성(聖)을 비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습을 악하다고 보는 일반방송인들은 빨갱이들이라는 것이다. 왜 빨갱이들의 빨갱이 논리로 거룩한 교회가 한 거룩한 세습을 평가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세습 옹호자들의 주장이 맞다면 바울은 성(聖)에 속한 장로와 집사들로 속(俗)에 속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결국 바울은 성과 속을 구별하지도 못하는 무지한 사도요, 성을 속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악한 사도라는 말이 된다. 김삼환 목사의 논리로 하면 바울이 사탄인 셈이다.

구체적 실례를 들어 보면 더 쉬워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추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절도자, 살인강도, 그리고 창녀일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교회에 지방색이 있고, 노회장 총회장이 되기 위하여 돈을 수십억씩 뇌물로 써야하고, 또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그 정도가 무슨 문제인가? 나처럼 인생 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볼 때 그런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다. 기독교가 그렇게 의로운 종교인지 몰랐다.”고 할까? 아니면 “뭐 그런 기독교가 있는가? 나처럼 죄란 죄는 다 짓고 산 사람이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기독교는 무익한 종교로 망해야 한다”라고 할까? 후자일 것이 분명하다.

저들의 논리로 하면 기독교의 거룩한 직책인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면서 세상의 도덕군자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해도 그들도 성(聖)에 속한 자가 아니라 속(俗)에 속한 자란 점에서 부족할 것인데, 하물며 속(俗)만 알고 성(聖) 자체를 모르는 무지한 세상 사람에게 그 도덕성을 인정받으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을 먹을 영적 자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먹지 않겠다고 하였는가?

우상을 섬기는 제사상 위에 오른 음식이라고 하여 그 음식에 귀신이 붙어 있지 않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기초적 상식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제사 음식을 먹는데 어떤 부끄러움도 없었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그런데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제사음식을 먹는 사도를 보고 실족할까봐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라고 하였다.

황규학 씨를 비롯한 세습 옹호자들의 논리에 의하면,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것은 세상과 관계가 없는 교회의 일로, 하나님 앞에 떳떳한 일인데 왜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한다고 하여 세상의 속된 기준으로 세습을 악하게 보느냐는 것이다.

저들의 논리로 하면 바울은 지금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바울은 거룩한 영적 기준을 버리고, 세상 사람의 낮고 천한 기준을 따르라고 한 것이 된 것이다. 오히려 귀신이 붙어 있지 않는 음식이니 먹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먹어야 옳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한다. 먹어서 제사 음식이라고 하여 귀신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님을 깨우쳐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왜 바울은 거룩한 기준을 타락한 세상 기준에 의하여 양보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과 김삼환 목사가 다른 점이며, 세습 반대자와 세습 옹호자의 차이인 것이다.

금번 재판국은 왜 만장일치로 결정하기로 하였는가?

금번 재판국은 만장일치로 결의하기로 하고 시작하였다고 들었다. 왜 그런 결정을 하였을까? 어느 공동체나 공산주의가 아니라면 만장일치로 결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데 무슨 이유로 그런 조건을 세우고 시작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2018년 총회 결의를 그대로 따르면 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하였을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고, 재판국원 한 분 한 분은 역사 속에 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작년에 세습을 지지하고 찬성한 목사 장로들이 시민단체나 속한 교회나 노회로부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런데 이번에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하였는지 드러나면, 총회의 결정과 결의를 따르지 않고 명성교회 세습을 지지해준 그 분들이 당할 어려움은 작년보다 더 심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을 보호하자는 뜻에서 세운 조건일 가능성이다.

만일 그렇다면 불의한 일을 하고 그 불의를 숨기고, 책임까지 지지 않으려는 꼼수라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왜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소신을 드러내지 못하는가? 통합교단이 만든 세습금지법이 그렇게 부끄러운 법이었는가? 만일 그런 소신을 가졌다면 숨길 이유도 없다. 그것이 부끄럽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양심의 소리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은 삼십이란 돈에 욕심이 나서 스승 예수를 팔아먹고, 그것이 떳떳한 일이라면 그 돈으로 구제라도 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하는데, 받은 돈마저 성전에 던져 버리고 자살을 한 가룟 유다처럼 자신이 한 일이 부끄럽고 추하고 천한 일이란 점을 알았다는 말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명성의 세습을 반대하는 살아 있는 양심을 가진 재판국원이 한 분만 있어도 이번 재판국은 어떤 판결도 할 수 없게 되었다. 15명의 재판국원 중에 14분이 세습을 지지하여도 반대하는 한 분의 힘만으로 그것을 막아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그 분 한 분 때문에 만장일치로 결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와 한국교회는 이를 지켜볼 것이다. 이제 다시 다수결로 하기로 하고 세습을 옹호를 결의하려고 할지, 아니면 결의하지 못한 대로 총회에 보고할 것인지 필자는 뱁새눈을 크게 뜨고 지켜볼 것이다. 한국교회와 함께.

지금 통합측 역사 이래 최고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재판국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고 두려워 글을 쓰기는 것조차 힘들다. 말하기조차 두렵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다. 이 번 재판국이 명성측 손을 들어주면 통합측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명성교회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도 안다. 그러나 교단을 사랑하고 한국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은 다르다. 아직까지 통합측 교단은 합동과의 분열 후에 단 한 번도 분열되지 않은 자랑스런 교단이다. 그러나 이번 재판국이 잘못하면 통합측은 분열 위기를 맞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오히려 다수의 반명성, 반세습 지지자들은 이제 공공연히 주장한다. “도저히 저들과는 같은 교단에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지고, 찢어질 대로 찢어졌다. 혹 이번 재판에서 명성측이 승자가 되고, 그 후에 아무리 이번 자립대상 교회들을 돕겠다고 만든 <빛과 소금의 집>과 같은 일을 수백 개를 하고 어떤 선심정책을 다 만들고 온갖 사탕발림을 한다고 하여도 같은 집에서 살기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제 품고 가자”라고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않아야 한다. 그러면 기독교가 망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교단이 갈라지면 세습 지지자들이 만들 교단명칭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명성 세습옹호 찬성 통합 교단’(명찬통)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재판국원들이 서 있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필자와 한국교회는 지금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 그 눈물 소리가 재판국원 한 분 한 분에게 들려지기를 바란다. 좁게 한 교회만 보지 말고, 넓고 멀리 한국교회 자체를 보기 바란다.

2018년 총회 재판국은 두 가지 모순된 결정을 내렸는데 힘 없는 사람(김수원 목사)은 지금도 피해만 보고, 힘 있는 김삼환 목사는 세습까지 단행하고 말았다.

사실 2018년 재판국이 명성교회 문제로 내린 두 가지 결정 중에 첫 번째로 내린 김수원 목사 측의 손을 들어준 판결과 후에 명성교회 세습 결의를 해 준 판결은 ‘네모난 삼각형’ 같은 모순된 판결이었다. 이래서 문제인 것이다. 이래서 재판국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수원 목사측은 지금도 그 결정이 시행되지 않아서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하고 고난의 길만 가고 있는데, 김삼환 목사측은 그 결정에 의하여 세습도 하여 판결의 덕을 천%로 보고 있다. 무슨 차이일까? 힘의 차이임이 분명하다. 그 힘은 바로 돈의 힘이라고 확신한다.
 

결론: 이 번 재판국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고등법원은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혹 대법원이 잘못한 부분이 있어도 고등법원은 순종하고 해야 한다. 규칙부, 헌법위원회, 재판국은 상하 기관이 아니다. 그러나 총회는 상위 기관이다. 그런데 어떻게 총회의 결정을 일개 규칙부나 헌법위위원회나 재판국에서 뒤집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불가능하다. 지난 2018년 총회는 총회의 결의에 따라 그대로 판결하라는 것이었다. 현 총회 임원회는 지난 103회기(2018년) 총회 결정에 반하는 결의를 하지 말라는 공문까지 보냈다. 그렇다면 재판국이 망설일 이유도, 고민할 이유도 없다. 총회의 뜻을 따라 세습법을 지키면 된다. 무엇이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게 하고, 무엇이 그렇게 뒤로 미루면서도 결정을 하지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다시 못을 박는다. 현 재판국은 103회 총회 결의를 따르면 된다.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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