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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위에 서 있는 하나님의 역사

기사승인 2020.02.11  16: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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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권 목사 / Joyful Korean Community Church(Texas, Dallas) 담임

   
▲ 김세권 목사

본문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창 19:4-8)

길라잡이

1. 상관하리라 (베네다 오탐 / וְנֵדְעָה אֹתָם):

- ‘베네다’는 야다(יָדַע)에서 왔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 성관계를 맺다; (2) 삶의 경험을 통해서 알다. 따라서 단어 뜻을 따라 해석 또한 두 가지로 나뉜다.

1) ‘야다’ 자체는 구약에 948회 나온다. 그중에 15번 정도가 성관계를 맺는 걸 표현하는 데 쓰였다. 분명히 이런 용례가 있기 때문에 본문 해석 또한 그리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리 본다면, 소돔 거주민이 보인 행동은 천사들을 겁박하고 성폭행하며 취조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거로 해석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가나안 특히 소돔의 악함은 동성애에서 드러난다. 동성애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다. 소돔은 이런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본문의 해석은, 롯이 자신의 두 딸을 내어놓으며 성폭행 해도 좋다는 투로 말한 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된다. 이 해석이 지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2) ‘야다’를 ‘알다’로 이해한다면, 이들이 롯을 찾아온 손님을 취조하고 방문 이유를 알아내겠다고 말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야다라는 말이 지식적인 앎을 뜻하는 건 아니다. 경험을 통해서 구체적인 관계를 형성한다는 의미가 안에 들었다. 그러니 여기선 아무리 좋게 봐도, 취조와 심문의 의미가 강하다. 설사 그렇다 해도, 사람이 잔뜩 몰려와서 손님을 내어놓으란 건 폭력이었다. 실제로 폭력적인 행동을 그들이 보인 것도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무리 그들이 외부 사람에게 배타적이었다고 해도, 이런 모습은 분명히 선을 넘은 악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해석은 롯이 두 딸을 내어놓으려 했던 것과 연결되지 않는 한계를 지닌다.

- 어느 해석을 따라가든지, 고대 가나안 문화에서 일반적으로 외지인을 우대하는 친절한 모습은 여기서 찾을 길이 없다. 그들은 특이하게 배타적이었다. 하나님 눈에 이것이 악했음은 불문가지다. 그것이 심판과 연결되었다.

묵상

딸을 폭도에게 내어놓다니. 무엇이 이유이든지, 이건 악했다. 우리는 롯을 아주 나쁜 놈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논리를 따지기 전에 아버지로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감정적으로 끔찍하다.

감정과 윤리적인 부분도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그 문을 지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 못지 않게 심각한 부분이 있다. 롯은 윤리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무엇이 신앙적인 문제였는가?

아브라함을 생각한다. 그도 가나안 문화 속에서 살았지만, 그걸 따라가지 않았다. 가나안 관습에 부딪히면, 오히려 신앙적으로 초월해서 극복했다. 신앙은 문화적 관습이나 당위성을 뛰어넘어 지켜야 할 절대적인 가치다. 롯의 가장 큰 실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신앙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당시 문화의 틀 안에서만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 위에 하나님 역사가 우뚝 서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분 뜻을 살피는 대신에, 소돔사람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스스로 나섰다. 그러니 고작 딸을 내놓은 궁여지책(窮餘之策 / the last resort)이 전부였다. 그게 본질적인 해결과 거리가 먼 게 당연했다.

롯은 폭도들이 만든 위기 상황에 놓였다. 그렇다면, 그는 먼저 천사들에게 해결책을 물었어야 했다. 속내를 털어놨어야 했다. 소돔에서 애써 차지한 자신의 지위가 깨지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 뜻이라면 마음으로부터 소돔을 버릴 수 있어야 했다.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걸 지키고 싶었던 거다.

그가 내린 결정의 선악 여부와 상관없이, 이것이 롯이 가졌던 본질적인 문제였다. 롯이 천사 보다 먼저 문제 해결에 앞장선 이유는 현재 삶이라는 틀을 깨부수기를 원치 않았던 데 있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서게 되면 판이 완전히 엎어진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롯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롯은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기를 바라는 지점에 정확히 서 있었다. 자신의 꿍꿍이가 살아있으면, 하나님이 나서시는 것이 겁나게 마련이다. 이것이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딸들을 내어놓으려 한 ‘차악’(次惡 / the lesser evil)을 선택한 이유였다. 그는 아버지로서, 또한 신앙인으로서 실패했다. 2020년에도 예전처럼 여러 가지 일이 생길 것이다. 나는 그것들에 관해 하나님께 먼저 묻고 의논할 터다.

김세권 목사 mungm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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