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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의 오아시스 ‘교회’

기사승인 2020.04.27  14:3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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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 (1)

김정훈 교수 / 김정훈 교수는 영국 더람(Durham) 에서 제임스 던(James Dunn)의 지도로 석사를, 영국 글라스고(Glasgow)에서 존 바클레이(John Barclay)의 지도로 박사를 취득하였고, 백석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다 올해 2월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The Significance of Clothing Imagery in the Pauline Corpus’ (T&T Clark), ‘바울 서신 연구’ ‘사도들의 설교와 신학’ ‘약속, 성취,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작은 구름 한 조각’ 등이 있다. 현재는 B and C Mission Center 대표로 있다.

   
▲ 김정훈 교수

에베소서는 A.D. 60년대 초에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다(참조. 엡 3:1; 4:1). 학자들은 이 서신서에 매우 흥미로운 별칭들을 붙여주고 있다. 도드 (C.H. Dodd)는 이 서신서를 가리켜 “바울사상의 왕관”(the crown of Paulinism”이라고 하고, 멕카이(J.A. Mackay)는 “가장 권위 있는 기독교 신앙 개요”(the most authoritative compendium of Christian faith), 브루스(F.F. Bruce)는 “바울사상의 진수”(the quintessence of Paulinism), 굿스피드(E.J. Goodspeed)는 “주석가들의 워터루”(the Waterloo of commentators), 바르트(M. Barth)는 “현관 앞의 낯선 손님”(a stranger at the door)이라고 한다. 이 별칭들은 에베소서의 높은 진가(眞價)를 묘사해 줄 뿐 아니라, 해석상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지에 대해서도 암시를 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서신서가 그만큼 보배로운 내용을 함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풀기 어려운 신학 난제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찾는 심정으로 이 서신서를 읽을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저자의 마음속을 캐듯 본문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수많은 학자들이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을 부인하지만 필자는 본 서신서의 신학사상, 어휘, 문체, 범교회적 특징, 골로새서와의 유사점 등을 고려할 때 오히려 바울의 저작권을 옹호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에베소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장은 교리적 부분이고 4-6장은 실천적 부분이다. 그렇다고 하여 전자에 후자의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거나, 후자에 전자의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바울은 교리를 말할 때도 실천을 염두에 두고 있고, 실천을 말할 때도 교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양자를 분리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에베소서는 전체적으로 교회론을 강조하는 서신서다. 이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연구가들 사이에 의견일치가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정작 교회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 에베소서를 읽어보면 “교회”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뚜렷이 교회를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 같지도 않다. 이것은 에베소서 독자가 겪는 거의 공통된 경험으로서 그 이유는 이 서신서가 바울의 방대한 신학사상을 압축형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의 헬라어 원문은 어려운 문장이 너무 많고, 단어 하나하나, 어구 하나하나 그 의미를 알기가 매우 까다롭다. 따라서 독자들은 본 서신서에 대한 문법적-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적, 신학적 이해를 시도할 때 그 표피 밑에 숨어 있는 교회론적 통찰들을 발굴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에까지 가기 위해서는 정확한 본문 분석과 문맥의 흐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각 단위 본문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먼저 인사말을 한다. 그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수신자들을 위해 축복의 말을 한다.

첫째, 바울은 자신을 발신자로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사람]”이라고 진술한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정체성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과거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사도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의 뜻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 1:13)였던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화시켜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고백한다.

지금 그는 사도로서 자신을 복음 증거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인식하고 있다. 내가 나를 누구로 인식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삶이 바로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자기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지금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바울은 수신자를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지칭한다. “성도들”이란 거룩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믿는 사람들은 영적 차원에서 이미 죄 씻음 받고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이다. 그들 속에는 세상 사람들과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 양자를 구분해 주는 결정적 요소는 “하나님의 의”다. 즉 믿는 자들 속에는 하나님의 의” 가 있다. 물론 믿는 사람들도 죄를 짓는 일이 많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는 자들이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독소를 제거 받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과연 나는 세상에서 얼마나 구별된 모습을 나타내며 살고 있는가? 내게서 나는 냄새가 과연 그리스도의 향기인가, 아니면 사탄의 악취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역시 믿는 자들의 특징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살다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기적 공동체 안에서 신실함이 없이는 존재의의(存在 意義)를 발견할 수 없다. 몸에 붙은 수많은 지체들이 각자의 기능을 신실히 수행할 때 몸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론적 관점에서 나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가? 보편교회 또는 개교회 안에서 나의 기능은 무엇인가? 과연 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인가?

셋째,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다. 이것은 “은혜”라고 하는 전형적인 헬라식 인사를 기독교적 개념으로 바꾸어 거기에 전형적인 히브리식 인사인 “평강”이라는 개념을 첨가한 말이다. 헬라인들에게 “은혜”는 단순히 “안녕”(hello)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으나, 바울은 이 단어를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사유의 은총”이란 뜻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평강”은 본래 전쟁이 그친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이나 복과 번영이라고 하는 적극적 의미를 함의하기도 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개념은 구속의 은총을 받은 자에게 오는 내적 평안을 가리킨다. 따라서 “은혜”와 “평강,” 이 두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간구할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한다. 모든 믿는 자들은 죄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패한 인간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때로 너무도 매정하고 무서운 존재처럼 여겨져 거부해야 할 대상, 미워해야 할 대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인 그분은 회초리 이면에 뜨거운 사랑을 품고 계신 분이시다. 그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언제든 가슴을 활짝 열고 따뜻하게 맞아 줄 준비를 하고 계신 분이시다. 그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의 방을 마련해 놓고 언제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영원히 은닉된 미궁의 “뜻”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구현되는 가시적 실재(reality)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와”라는 등위접속사가 암시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시다. 그는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위해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만유의 주재이시다.

모든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위해 구원을 설계하시고 그것을 구체화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100% 이해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주시는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께 은혜와 평강을 구하자.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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