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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큰 흐름 중 하나 ‘선교’ (2)

기사승인 2020.05.04  14: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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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로 읽는 성경 (2)

방동섭 교수 /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석사, 미국 칼빈신학교 신학석사 과정, 미국 리폼드신학교 박사, 전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글로벌비전교회 담임, 저서로는 <십자군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선교없이 교회없다> <우리의 선교가 실존입니다>

   
▲ 방동섭 교수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방법과 방향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논문을 통해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보다 선교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는 것이다. “선교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 보면 우리는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이 글의 방향이다. 요한계시록을 언뜻 보면 이 책은 거의 선교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난 선교 사상이나 가르침을 다룰 때 공동 서신이나 요한계시록을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누구를 선교 현장에 파송한다’는 말씀을 찾을 수 없다. 또한 마태복음 결론 부분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선교위임령’이나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직접적인 선교 명령, 또 이웃 사람들이나 세상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거의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피상적으로 읽고 해석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연구할 때 주로 마지막 때 이루어질 예언에 관한 책으로만 보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선교의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놓칠 때가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이 선교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교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의 종결 혹은 선교의 최종 목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가 하나님의 선교의 시작을 보여주는 책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선교의 마무리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코넬 고오너(H. Cornell Goerner) 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성경의 마지막 책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의 놀라운 기록에 대한 절정이며 결론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 아프가니스탄 어린이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교의 마무리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다면 7장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은 사도 요한이 보았던 종말론적 구원과 선교에 대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셨던 구속의 역사가 종결을 맞이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진행되었던 하나님의 선교의 마무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선교의 사명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순종해 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통해 7장은 요한계시록의 구조상 극적인 삽입(interlude)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6장부터 시작되고 있는 어린양의 인을 해제하는 과정의 마지막 부분에 7장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보았던 어린 양의 세상을 향한 심판의 마지막 과정인 7번째 인을 떼기 직전에 요한계시록 7장의 말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7장이 선교적으로 중요 한 것은 바로 이 7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선교 비전과 궁극적인 목적을 상세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양이 하나씩 인을 떼실 때마다 이 땅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게 임했는지 땅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외쳤다. 또한 그들은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부르짖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7장은 바로 이렇게 진노가 쏟아지는 한복판에서 사도 요한이 새롭게 보았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장면이었다. 7장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Μετα ταυτα ειδον και ιδου)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1절). 여기 "이 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린양이 6개의 인을 하나씩 떼시므로 일어나게 될 진노의 사건을 뜻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았다”고 하였다. 여기 ‘바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네 천사가 진노의 바람을 붙잡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네 천사 외에 등장하게 된 또 다른 천사의 메시지를 통해 분명하게 밝혀진다. 그 천사는 ‘해 돋는 데서 올라온 천사’라고 하였다(2절). 해 돋는 데, 다시 말하면 동쪽에서 천사가 올라왔다는 것은 이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메시지를 가져오게 될 것을 암시한다. 에덴동산도 동쪽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도 동편에서부터 오고,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알고 박사들도 해 돋는 데서부터 찾아왔다.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메시야가 해 돋는 데서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요한은 그 천사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세상의 한복판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인’(σφραγις)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소유권의 표시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된 백성들을 인을 치고 그들을 멸망의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시게 될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된다.23)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표시이다. ‘해 돋는 데서 온 천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부을 다른 네 천사를 향하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시기까지... 해하지 말라”고 명령하게 된 것이다(3절).

요한계시록 6장에서 사도 요한은 어린양의 인 떼시는 것을 통해 주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여주시므로 진노가 임하는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진노 중에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사도 요한은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라"고 증언했다(7:4). 여기 '십사 만 사천'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그 정체성에 대해서는 신학적 논쟁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 다양한 해석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십사만 사천’을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는 상징적인 의미의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데이비드 온(David Aune)은 144,000의 숫자에 대해 지금까지 신학적으로 논쟁이 되어 온 것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144,000을 유대인 혹은 유대적인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144,000을 유대적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 모두를 포함하는 교회로 보는 견해이다. 셋째는 144,000을 기독교인 가운데 순교했던 사람들의 숫자로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십사만 사천'을 상징적인 숫자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진실하게 주님을 믿는 기독교인의 총수를 상징하는 숫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 좀 더 집중한다면 사도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십사만 사천'에 대해서는 9절에 나오는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44,000의 숫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라는 수식 문장이 시사해주고 있는 것처럼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이스라엘과 연관시켜 보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보인다. 사도 요한은 ‘십사만 사천’ 명의 숫자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십사만 사천’에 관해서 천사를 통해서 들었다고 하였다(4절). ‘십사만 사천’이 어떻게 구성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사도 요한은 들었다. 그의 증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다 지파에서 12,000, 르우벤 지파에서 12,000, 갓 지파에서 12,000, 아셀 지파에서 12,000, 납달리 지파에서 12,000, 므낫세 지파에서 12,000, 시므온 지파에서 12,000, 레위 지파에서 12,000, 잇사갈 지파에서 12,000, 스불론 지파에서 12,000, 요셉 지파에서 12,000, 베냐민 지파에서 12,000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인 맞은 자'의 리스트를 보면 특이한 사항이 몇 가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이 리스트의 첫 번째 위치는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장남인 르우벤 지파가 아니라 네 번째 아들 유다 지파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유다 지파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출생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배치는 구약에도 이미 나타나 있기에 생소한 것은 아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향할 때 진 편성을 한 일이 있었는데 유다 지파의 이름이 이미 장남인 르우벤 지파보다 앞서 선두에 나와 있었다(민 2:1-34). 따라서 성경 기자들이 유다 지파에게 이런 우선권을 주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인 맞은 자’의 리스트에는 야곱의 아들 가운데 다섯째 아들인 ‘단’ 지파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 49:17에 나오는 야곱의 ‘단’에 대한 예언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야곱의 예언 가운데 단이 '뱀' 혹은 '독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단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 을 추종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단 지파가 리스트에서 삭제된 것은 우상 숭배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사기에 보면 단 지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되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 로버트 월(Robert W. Wall)은 “단 지파는 이교적 신앙의 우두머리이며 이스라엘 종교적인 타락의 상징이라(삿 18:30-31, 왕상 12:25-33)”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교적 우상을 숭배했던 단 지파가 ‘인 맞은 자’의 리스트에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2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신학자 이레니우스(Ireaneus)는 단 지파가 빠진 것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던 단 지파로부터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사상 때문이라고 보았다.

셋째, 단 지파가 빠진 대신 그 자리는 요셉의 아들이었던 므낫세 지파로 대치되었다. 요셉에게는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있는데, 리스트에는 특이하게도 아버지 요셉 지파와 그의 아들 므낫세 지파가 포함되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이들이 모두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 인을 맞은 자들이라“고 했는데(4절), 여기 ’인을 맞는다’(σφραγιζω)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고대 사회에서는 때로 법적인 인증을 위해 인을 찍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주인이 자신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런 뜻으로 ‘인을 맞는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에서 온 144,000 명이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구원에 참여하게 될 백성임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구원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에베소서에서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가 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마지막 때 진노가운데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끝까지 보호하 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세상을 향한 진노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은 진노 중에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나온 ‘인 맞은 자’의 리스트는 바벨론 포로 이후 사라졌던 열두 지파의 종말론적 회복을 보여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이에 관하여 데이비드 온(David Aune)은 “각 지파로부터 12,000이라는 동등한 숫자를 강조하는 것이 사도 요한이 이스라엘의 12 지파의 종말론적 회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 ‘십사만 사천’의 리스트는 단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회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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