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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해 터져 나오는 찬송이 있는가?

기사승인 2020.05.07  14: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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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 (2)

김정훈 교수 / 김정훈 교수는 영국 더람(Durham) 에서 제임스 던(James Dunn)의 지도로 석사를, 영국 글라스고(Glasgow)에서 존 바클레이(John Barclay)의 지도로 박사를 취득하였고, 백석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다 올해 2월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The Significance of Clothing Imagery in the Pauline Corpus’ (T&T Clark), ‘바울 서신 연구’ ‘사도들의 설교와 신학’ ‘약속, 성취,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작은 구름 한 조각’ 등이 있다. 현재는 B and C Mission Center 대표로 있다.

   
▲ 김정훈 교수

찬송이 터져 나오다(1): 하나님의 예정(엡1:3-6)
수신자들에 대한 인사에 이어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찬미로 그의 서신을 시작한다. 화산이 폭발하듯 바울은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영혼의 탄성을 터뜨린다(3). 삼위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그 근원에서부터 생각할 때 그는 찬미의 함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찬송하리로다”는 형용사 율로게토스(Euvloghto,j)의 번역으로 동사 율로게오(euvloge,w)에서 온 것이다. 이 단어의 뜻은 “찬미/찬양하다, 축복하다, 복/은혜를 베풀다”이다. 우리는 고린도후서1:3, 베드로전서1:3에서도 동일한 표현을 볼 수 있다.

바울이 그토록 찬미의 탄성을 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일, 특히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체적으로 시행하실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유효적으로 성취하는 분이심을 생각할 때 감탄사를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내용을 에베소서1:3-14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 본문을 읽으며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에 진술된 내용이 바울의 교회론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변적 언어로 진술하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믿는 자들(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본문(엡 1:3-6)은 주로 성부 하나님의 행위를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 분]”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찬양하세”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맘모니즘(mammonism)의 노예가 된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돈, 명예, 권세, 건강, 출세, 성공, 향락 등 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로는 이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육신으로는 부인하고 싶어한다. 어떤 불의한 자들은 세상을 좀 시끄럽게 하고 수치를 당하더라도, 그래서 감옥에 간다 할지라도 한몫 크게 챙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물질로는 메울 길이 없는 큰 허공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 허공이 채워질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정상을 회복할 수 있고, 그가 소유한 물질도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이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에 매몰된 사람들은 허무감과 빈곤감 같은 것이 영적 기갈로부터 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피폐가 물질적 빈곤에 기인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물질로 영적 빈곤을 해소해 보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은 패배감, 좌절감을 이기지 못한 채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만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복”을 추구하지 않으니 불행의 선로(線路)를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설교자는 적극적 위치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전달하는 사역자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확신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사 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그는 청중에게 천만금의 물질을 안겨주지 못하는 것으로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 생명의 말씀을 더 풍성하게 증언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한다. 아모스 선지자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한국교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촉촉해진 대지 위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만한 상태인가? 아니면 여전히 심각한 기갈인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시대의 지도자인 양 열연(熱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참조. 딤전 1:7). 성경은 여기저기서 교훈의 기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성숙단계로 나아가라고 가르치지 않는가?(히 6:1-2). 어린아이 상태를 벗고 진정한 어른이 되라고 호소하지 않는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당부하건만, 우리는 과연 명쾌히 간증할 것을 준비하고 있는가? 초보 수준도 안 되는 것을, 그것도 부정확한 언어로 반복 또 반복하고 있으니 무슨 준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제 단지 성경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경의 언어와 문맥, 교훈과 메시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성경 진리에 자신을 믿음으로 결합시켜야 한다(히 4:2).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된 일이라고 짚어 준다. 에베소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 공식구가 장소적 의미를 갖든 또는 수단적 의미를 갖든, “안에서”라는 전치사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신령한 복을 베풀어 주신 조건을 가리킨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조건이 아니고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기대할 수 없다.

그럼 정작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무엇인가? 바울은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관심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많은 물질을 받아 부자가 되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큰 구원의 은혜를 받아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는가이다. 사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예리한 구분선을 긋기란 쉽지 않다. 모든 물질세계도 영(靈)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양자(兩者)는 신비적으로 결합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에게 어떤 복을 가져왔는가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가장 결정적으로 베풀어 주신 신령한 복은 “선택과 예정”이다(4-5절). 이 두 개념은 각기 다른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실재에 대한 두 표현이다. 양자 간에 차이가 있다면 선택은 수량적 국면을, “예정은 시간적 국면을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택은 수많은 인류 중에 선별하였다는 것이고, 예정은 미리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우선 선택사상은 바울신학에서 매우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딤후2:10; 딛1:1도 참조할 것).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하여 이에서 제외된, 유기(遺棄)된 자들은 너무 억울한 것 아니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는 것이냐고 따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따지는 것은 주제 넘는 행위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소환하여 근원적 문제들에 대해 이유를 대라고 윽박지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 사이에, 모세와 바로 사이에 선택적 의지를 행사하실 권한이 없는 분이신가?(롬9:7-18).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이나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는 것인가?(롬9:21; 참조. 사29:16; 45:9).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 사랑과 공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그리고 거룩하심과 영원하심을 믿어야 할 뿐이다. 그리고 유기의 치명적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으로, 예정사상은 바울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 중의 하나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영원 시간계가 무엇이며, 피조 시간계가 무엇이며, 또한 이 두 시간계의 결합의 비밀이 무엇인지 이해할 때 비로소 약간의 답을 얻을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바울의 가슴을 쾅 하고 울린 것은 하나님의 창세 전의 예정 이 양자(養子) 신분 획득의 출발점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 비교. 롬8:14-15).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양자(養子)됨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의미하고, 포괄적으로는 구원받음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숙명론 또는 운명론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정 시점이 “창세 전”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고정된 시간 트렉(track) 안에 갇히신 분이 아니다. 그는 피조시간계 너머, 초자연적 영원한 시간 속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모든 예정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의와 사랑으로 충만한 만유의 주재이시기에 그의 기쁘신 뜻은 모든 신령한 복의 궁극적 근인(根因)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숙명론이나 운명론 같은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역동적이며, 공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의 예정을 따라 인간사를 이끌어 가신다. 세상사가 아무리 가변적이고 예측불허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영원한 예정을 따라 역동적으로 인간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예정하신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는 당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셨고, 당신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믿는 자의 지혜이며 행복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해 부어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흑암의 우주 공간을 유리하는 별무리 같은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불신자들로서는 선택/예정을 하나님을 향해 날리고 싶은 비판의 화살로 삼고 싶을지 몰라도,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확신을 위한 든든한 반석과 같은 것이다. 구원의 출발점이 내게 있지 않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해설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바울은 왜 선택/예정을 거론했을까? 두 가지로 대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유대인들이 선택을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이방인들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취할 때 바울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존재들임을 선언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1세기 유대교가 묵시문학의 영향으로 왜곡된 종말사상 위에서 메시야 왕국의 정치적 성취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종말, 즉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일 때, 바울은 시작, 즉 알파 포인트(alpha point)를 언급함으로써 유대교 사상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릇된 종말사상을 교정해 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령한 복의 근원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그것의 궁극적 성취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의 독자인 나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해 보자. 신앙인으로서 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터져 나오는 찬송이 있는가? 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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