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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치 있고 빛나는 삶을 위하여

기사승인 2020.05.19  13: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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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4)

김정훈 교수 / 김정훈 교수는 영국 더람(Durham) 에서 제임스 던(James Dunn)의 지도로 석사를, 영국 글라스고(Glasgow)에서 존 바클레이(John Barclay)의 지도로 박사를 취득하였고, 백석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다 올해 2월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The Significance of Clothing Imagery in the Pauline Corpus’ (T&T Clark), ‘바울 서신 연구’ ‘사도들의 설교와 신학’ ‘약속, 성취,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작은 구름 한 조각’ 등이 있다. 현재는 B and C Mission Center 대표로 있다.

   
▲ 김정훈 교수

4. 찬송이 터져 나오다(4): 성령으로 인치심(엡 1:11-14)

바울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께 찬미의 환호성을 올렸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때문이었다. 이제 바울은 신령한 복의 세 번째 항목을 크게 두 가지로 언급한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의 의도를 따라 예정을 입어 그의 유업이 되었다(11-12절). 여기서 핵심은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글개역개정은 “기업이 되었다”라고 하나 원문상 “유업이 되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이것은 클레로오의 수동형 클레로데멘의 번역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클레로오는 “몫을 받다, 선택하다, 소유로 삼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수동태가 되면 “~의 몫으로 받아들여지다, ~의 몫이 되다, ~에 의해 선택되다, ~의 소유가 되다”라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씩 부르셔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애지중지하신다. 누가 국가에 큰 공로를 세워 금 100돈의 포상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겠는가? 인간에게 소유란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저 집이 누구의 소유인가? 저 땅이 누구의 소유인가? 저 물건이 누구의 소유인가? 글을 쓰는 사람은 볼펜 한자루도 소중히 여긴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기를 분신처럼 여긴다. 농사 짓는 사람은 자기 연장을 살뜰히 간수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면 얼마나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겠는가? 스스로 학대하고 비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아무데나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셨고,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밝히 아시고, 우리의 행보(行步)와 우리가 하는 말을 아시며, 우리가 하늘 끝에 올라가 있든 어두운 천 길 지하 구덩이로 내려가 자리를 펴든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주한다 할지라도 거기서도 손을 내미시는 분이시다(시 139:2-10). 시편 기자(다윗)는 말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시 139:17).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넌 내 거야. 내 사랑하는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산 내 소유야. 내가 책임진다”라고.

그런데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몫이 되었다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공적 권리선언 혹은 배타적 권리확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성경신학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여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국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바로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 이것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출 19:6) 곧 하나님 나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성경은 여기저기서 믿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확인시켜 준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신 32:9; 참조. 신 7:6; 9:29; 32:9도 볼 것)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 135: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지금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체로서 궁극적 완성의 날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다. 요한계시록 1:6; 5:10; 21:1-2, 22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성전의 궁극적 성취로서의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지 않은가?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은 근원적으로 자기 뜻의 의도대로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함을 입어 성취된 일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바울은 에베소서 1:5에서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고 진술한 바 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대해 그 근원부터 밝혀주는 것은 성경뿐이다. 뿌리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실체에 접근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사로잡는 유명 디자이너의 옷이나 1천만 원 이상의 명품 핸드백이나 고가의 장신구로, 자신이 소유한 최고급 승용차나 대저택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위나 경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수 없다. 근원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그의 영원하신 계획에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계획하시고 당신의 뜻의 의도를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예정하시어 당신의 유업을 삼으신 일로 나타났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과정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실이다. 신적 작정과 시행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없이는 꽃장식 금마차에 바퀴가 없는 것이나 같다. 하나님의 계획을 성사시키는 작업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자 하나님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하신 분이시다(참조. 요 1:1-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유업으로 삼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미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12절, 필자 사역).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소망을 가진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의 소망은 우리에게 용기와 인내를 주며,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하게 하고, 종말론적 확신을 갖고 미래를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 하나님은 이런 특별한 소망을 가진 우리를 당신의 유업으로 삼아주신 것은 우리로 그의 영광을 찬미하는 존재들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 지향점을 알지 못하면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궁사가 화살촉을 과녁에 조준하듯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에 맞추지 않으면 삶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게 돼 있다.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며 목청껏 구호를 외친다 해도, 자기기만의 잘못된 레일에 올라타게 되면 처음에는 제대로 가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바울의 여러 고백들과 책망이 메아리쳐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고전 9:26)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 5:7)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로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피곤한 인생살이를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치 있고 빛나는 삶을 설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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