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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큰 흐름 중 하나 ‘선교’(2)

기사승인 2020.05.29  1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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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로 읽는 성경(5)

방동섭 교수 /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석사, 미국 칼빈신학교 신학석사 과정, 미국 리폼드신학교 박사, 전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글로벌비전교회 담임, 저서로는 <십자군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선교없이 교회없다> <우리의 선교가 실존입니다>

   
▲ 방동섭 교수

바울의 선교적 정체성: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그곳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서신을 보내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선교 비전을 알리고 그들이 협력해주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로마교회가 그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그가 선교 현장에서 선포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그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로마 교회의 성도들과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이 서신을 읽는다면 그들은 마치 바울이 그곳을 방문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또 선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선교를 통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설명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그의 선교 계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해석할 때 단지 교리나 신학적인 차원에서만 해석한다면 문제가 있게 될 것이다. 로마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선교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만일 바울의 선교적인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가 서신을 로마교회에 보내려고 했던 중요한 핵심을 놓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선교적 차원을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선 바울 자신의 선교적인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바울의 선교적 정체성: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지만 로마서 서두에 나타나는 그의 서간 문체 양식은 유대인의 전통이나 관습을 따르지 않았고 그리스식 서간 문체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이름부터 유대인식 이름인 '사울'이 아니라 로마식 이름인 '바울'(Παυλος)을 사용하였다. 또한 발신인의 이름을 언급한 후에 바울은 여격으로 된 수신자(πασιν τοις ουσιν εν Ρωμη)를 언급하고 있다. 수신자는 단수가 아니고 로마에 있는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보낸 것이다. 다만 일반적인 그리스식 서간 문체 형식과 차이점이 있다면 발신인 자신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소개와 함께 기독교적인 안부와 진술이 포함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내용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선교적 관점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종'(δουλος Χριστου Ιησου)이라고 말하고 있다. ‘종’(servant)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둘로스’(δ ουλος)라고 하는데 당시 로마 제국에서 살던 사람이라면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로마 제국에서는 노예제도가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노예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로마의 시민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처럼 당시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이 따르는 신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에 대해서 스스로를 ''이라고 부르는 것은 흔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그 문화권 속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이 따르는 신이나 왕, 지배자에 대해서 자신을 종이나 노예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셈족이나 히브리 문화 속에서는 자신이 따르는 신이나 대상에 대해 스스로를 종이라고 표현하는 일들은 많이 있었다. 구약 성경에도 이런 표현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당시 그리스 로마 문화의 관습과 사고방식과는 역행하는 것이지만 바울이 자신에 대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고 그의 제자가 되었을 때 그는 일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었다. 따라서 로마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서신을 보내면서 그런 사실을 의도적으로 강하게 보여주므로 자신의 정체성을 알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라는 표현이 단지 바울에게만 적용되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베스트(Ernest Best)는 말하기를 "종 혹은 노예라는 표현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관하여 바렛(C. K. Barrett)도 "사도 바울에게 특수하게 적용되었지만 이런 표현이 어떤 기독교인에게도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바울도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도 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하였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표현은 로마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를 주인으로 모시는 종이 된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내는 내용 가운데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유자라고 해도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는 종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주후 1세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분명한 정체성이었다. 비단 바울뿐 아니라 주후 1세기 모든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상관없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일생 동안 살아야 했다. 사람들은 싫든 좋든 간에 실제로는 누군가에 속하여 종처럼 살 수밖에 없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하였다. 예수님께 속하여 그의 종으로 살고 있지 않다면 공중 권세 잡은 자인 사탄에 매여 그의 종노릇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그에게 속한 자임을 고백하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의 서신 초두에서 제일 먼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 것이다.

선교에 헌신하는 사역자들은 선교지에서 많은 사역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지 않는다면 선교 현장에서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왕국을 세우게 되고 자신의 일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대로 선교 사역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선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소개할 때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정체성이 무너지면 선교의 방향성에 혼선을 가져오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선교사에게는 필수적이다.

(2) 사도: 두 번째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다. 여기 '사도'(αποστολος)라는 단어는 바울의 경우에는 특히 선교적인 의미를 강하게 갖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말할 때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자의 의미를 갖고 있는 '전도자'(κηρυξ)라는 말과 함께 사용했던 것이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는 초대 교회 안에서 그를 공격하는 반대자들에 의해서 늘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이슈였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 기간을 보냈던 열 두 제 자 중의 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가 생각던 사도의 자격은 요한의 세례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그와 함께하던 자이어야 했다. '사도'라는 직분은 '광의의 의미''협의의 의미'와 두 가지로 사용 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협의의 의미'의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의미하는 반면에 '광의의 의미'의 사도는 선교를 위해 함께 일하는 모든 동역자, 혹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루터는 바울이 여기서 '사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므로 "보다 분명한 방식으로 자신의 섬김과 사역의 본질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종이고 사역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사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루터는 '광의의 의미'의 '사도' 직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사도'라는 용어가 '협의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강조했다.

칼빈도 바울의 사도 직분에 관하여 말하기를 "바울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사도라"고 하였다. 칼빈 역시 사도'라는 용어가 '협의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어네스트 베스트(Ernest Best)는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은 '협의의 의미'의 사도를 뜻하며, 그가 비록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아니었지만 그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였다. 존 스토트(John Stott)도 바울이 열 두 명의 사도의 수에 더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므로 일반적인 전도자나 교사가 아니라 이방 세계에 교회를 세우는 특별한 권위를 받은 자로서 자신을 인식했던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할 때 마다 근거로 내 세우는 것은 신적인 위탁이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의 기원에 대해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베드로가 할례자를 위해 복음 전하는 사도 직분을 받았다면, 자신은 무할례자를 위해 복음 전하기 위해 사도 직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바렛(C. K. Barett)은 바울은 "교회의 사도는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그의 선교 사명과 영적인 권위를 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로마서 1장 1절에서도 바울은 그의 사도권에 대한 신적인 위탁의 근거를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클레토스’(κλητος)라고 하는데 '지명하다'(appoint) 혹은 '초대하다'(invite)의 뜻이다. 그가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은 '아포리조'(αφοριζω)라고 하는 단어인데 '분리하다'(separate)는 뜻이다. 하나님이 특별한 사명,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하나님이 그를 따로 구분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사명을 그에게 주시기 위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αφοριζω)"고 주장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원하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명은 스스로 원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부르시고 구분하여 따로 세우시는 신적인 위탁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는가?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 계획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이에 관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주장하였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개인의 어떤 특권이 아니라 순전히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는 뜻이다. 1장 5절에서도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한다"고 하였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았다"고 하는 사도의 직분은 "이방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그들이 그를 믿고 순종하도록 하는" 선교적 목적을 위한 직분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 '이방인의 사도'라고 했던 것이다.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님께서 처음 그를 부르실 때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셨다.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은 그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해를 받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복음 전하는 사역을 그에게 맡기지 않으신다. 만일 이 일이 원하는 자에게 맡겨졌다면 그 사역은 주후 1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사람들이 장차 다가오는 험난한 박해와 고난을 어떻게 뚫고 계속 나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에게 그 일을 맡겨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핍박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 사역에 헌신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선교 현장의 어려운 문제들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주님을 위해 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역자들 때문에 일어난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선교 사역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면 바울은 결코 복음의 사역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교 종교 지도자로 남았다면 적어도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지만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 것은 그의 주권을 믿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되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그것을 믿고 실천했던 사람이 바울이었다. 그러기에 수많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지역을 두루 다니며 선교 사역을 끝까지 감당했으며, 이제 로마를 거쳐 제국의 서쪽 끝이라고 생각하는 스페인 선교까지 준비하기 위해 그의 서신을 로마의 믿음의 형제들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3) 빚진 자: 바울이 로마서 서론에서 또 한 가지 자신의 선교적 사명과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였던 독특한 표현은 '빚진 자'이다. 그는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였다. 바울의 이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가 여기에 열거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채무관계를 통해 경제적으로 빚을 진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개종하게 되었을 때부터 그의 마음속에 ‘빚진 자’의 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 '빚진 자'(οφειλετης)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채무의 의무를 가진 사람을 뜻하지만 더 나아가 도덕적으로 혹은 영적인 의미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선교적인 책임을 받은 자라는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헬라인, 야만인, 지혜 있는 자, 어리석은 자"를 언급한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가 선교해야 하는 대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C. Hodge)는 '헬라인과 야만인'이라는 표현은 모든 나라,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라는 모든 계층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확하게 본다면 '헬라인'은 로마 문화권에 속해 있는 이방인들을 뜻하고, '야만인'은 그 외의 지역에 사는 이방인을 뜻한다. 또한 '지혜 있는 자'는 이방인 중에 교육받은 자를 의미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방인 중에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을 뜻한다. 따라서 인류 전체를 의미하기 위해 이 표현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선교하려는 대상이었던 이방인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바울이 '빚진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들에 대해 강한 선교적인 책임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빚진 자'라는 용어를 언제나 자신에게만 적용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서에 보면서 이 용어를 보다 넓은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선교적인 책임에 대한 의식은 일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 이 가져야 한다. 구원을 받은 자들은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구원 받기에는 자격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면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것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빚을 진 것이다. 이 빚을 우리는 하나님께 갚을 필요는 없다. 갚는다고 해도 이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나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갚는 것이다. 복음을 모르는 자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자라”고 한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그 빚을 갚는 것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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