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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기사승인 2020.06.01  11: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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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6)

김정훈 교수 / 김정훈 교수는 영국 더람(Durham) 에서 제임스 던(James Dunn)의 지도로 석사를, 영국 글라스고(Glasgow)에서 존 바클레이(John Barclay)의 지도로 박사를 취득하였고, 백석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다 올해 2월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The Significance of Clothing Imagery in the Pauline Corpus’ (T&T Clark), ‘바울 서신 연구’ ‘사도들의 설교와 신학’ ‘약속, 성취,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작은 구름 한 조각’ 등이 있다. 현재는 B and C Mission Center 대표로 있다.

   
▲ 김정훈 교수

6. 교회란 무엇인가?(엡 1:20-23)

이 본문은 에베소서의 교회론을 대변하는 핵심 본문들 중의 하나다.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 이 본문 하나로 신약의 교회론 전체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본문은 짧은 몇 마디 말로써 교회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실 바울은 이미 앞에서도 교회가 무엇인지 여러 가지 암시해 주었다. 이를테면 그는 간접적 방식으로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의해 형성된 선택공동체로, 만물통일의 구심점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공동체로 제시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영의 세계와 물질 세계, 초월 세계와 현상 세계, 신비 세계와 현실 세계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교회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그의 이러한 설명방식은 소위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 즉 교회를 “이 시대”와 “올 시대”의 중복지점에 정위시키는 독특한 종말론적 관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핵심은 역사의 종말에 최종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이미 이 세상과 교회에 침투하여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튼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 살아야 할 목회자도 묻고 싶고, 신학자도 묻고 싶고, 일평생 교회를 떠나 살 수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묻고 싶은 질문이다. 아니 세상을 깊이 관조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불신자라도 묻고 싶은 질문이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뭐 하는 사람들이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공산당들의 준동으로 심히 불안했던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보여주었던 용기와 희생과 혁혁한 활동에 대해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런 기대 속에 교회를 바라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75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는가? 최근 10여 년을 뒤돌아볼 때 국정을 책임진 자들이 보여준 실망스러운 행동들, 성폭력 사건들, 특수 경제 범죄 사건들, 나라의 도덕성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사회상식을 무시하는 듯한 낯뜨거운 발언들, 마구 쏟아내는 막말들, 하나님을 모욕하는 언사들, 세인들의 보편적 기대를 저버린 행위들 ··· 어쩌다가 한국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는가. 아니 목사가 목사라는 것이 미안해지기까지 하는 이 상황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려면 부활·승천하시고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방을 좇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어디로 가셔서 무엇을 하시는지? 그리고 동시에 이분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께 어떤 임무를 맡기셨는지 물어야 한다.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본문의 문맥을 관찰하면서 바울이 교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바로 앞 절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자들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해 주시라고 간구한다(19절). 뒤이어 나오는 2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힘의 위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언급한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20절). 하나님은 당신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다(고전 15:17). 부활의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가장 큰 소망이다. 바울은 믿는 자들이 부활을 푯대로 삼고 달려가는 삶을 사는 자들인 것을 밝히면서(빌 3:11-14), 종국에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선언한다(빌 3:21). 누가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는가? 첨단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섬모(纖毛) 하나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힘의 위력은 그리스도를 살려내신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하늘 위로 끌어 올리시고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셨다. 이곳은 물리적 공간의 어느 지점이라기보다는 초월적-영적 영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인간의 이성적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승귀의 위치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그분의 위치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그곳은 악한 천사적 존재들보다 뛰어난 최고 권자의 위치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승귀의 그리스도는 1세기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영물들보다 훨씬 뛰어난 권세자이시다. “통치,” “권세,” “능력,” “주권,” “이름”은 사탄(=마귀, 디아볼로스)의 왕국의 핵심 세력들 곧 악한 천사적 존재들을 가리킨다(롬 8:38; 고전 15:24; 엡 3:10; 6:12; 골 1:16; 2:10, 15). 이것들은 본래 천사적 존재들인데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영물들이다(유다서 6). 이 악한 영들은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사탄)의 명령을 따라 활동한다(엡 2:2). 바울은 그의 서신서 여러 곳에서 “귀신”(다이모니온)을 언급하는데, 이 영물은 우상을 매개로 인간의 종교성을 교란시키기도 하고(고전 10:20-21),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침투하여 건전한 이성의 활동을 훼방하기도 한다(딤전 4:1).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도 귀신들은 사람들로 병마에 시달리게도 하고, 괴이한 행동을 하게도 하고, 복음전파 활동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탄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으면 도리어 그와 동급이 될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시켰다. 이 결정적 사건 이후 아담의 후예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사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사탄은 노아시대 사람들을 불경건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하였고, 바로를 분기(奮起)시켜 모세를 대적하게 하였고, 아합을 격분시켜 선지자 엘리야를 죽이려 들게 하였고, 사울에게 시기심을 발동시켜 다윗을 제거하려 들게 하였고, 다윗의 마음을 오만과 욕정으로 채워 살인죄와 간음죄를 범하게 하였고, 발람 선지자를 더러운 탐심에 눈이 멀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게 하려 하였고, 3년 동안 예수와 동행하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던 그의 제자들을 십자가 처형이 임박한 때 다 배반하고 줄행랑을 치게 만들었고, 가룟 유다로 예수를 은 30에 팔아넘기게 하였고, 유대 군중들로 예수 대신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빌라도를 향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며 괴성을 지르게 하였고, 세상의 수많은 독재자들로 살인마가 되게 하였고,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었던 일본군으로 여러 나라 연약한 여성들을 유괴하듯 강탈하여 그들을 성노예로 전락시켰고, 권력욕에 눈이 먼 자들로 무고한 시민을 향해 총탄을 발사하게 하여 민족의 비애를 가중시켰고, 이단들을 간악하게 만들어 무지한 자들로 집단 우매에 빠지도록 하였고, 자칭 지도자라 하는 자들로 오만과 독선에 취해 이 시대의 개혁자인 양, 하나님의 선지자인 양 자기기만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역사 속에서 사탄이 자행해 온 짓, 하고 있는 짓, 앞으로 예견되는 짓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참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탄과 그의 핵심 세력들, 그리고 그의 졸개들의 행패를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의 속량으로 이미 이것들의 송곳니와 수염을 다 뽑아 버리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선언이며(골 2:15) 영원한 하나님 나라 확립의 공적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믿는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붙들고 산다면 그 어떤 시련과 역경도 돌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곳은 만물보다 뛰어난 우주적 통치권자의 위치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승귀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다(시 8:6). 이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 곧 우주적 통치권자가 되신 것을 의미한다. 하늘과 하늘들 위의 하늘과 공중과 땅과 땅 아랫 곳과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우리는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 위에 뛰어난 최고의 통치권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리며 까악까악 부르짖을 때 먹이를 마련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해를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매일 동편 바다 끝에서 솟아오르게 하시며 전 인류로 그 열기의 혜택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햇빛을 비춰주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이 한 혈통으로부터 나와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여 살게 하시고 연대(年代)를 정하여 존속케 하시는 분이시다. 누구에게 나를 다스리도록 내어줄 것인가? 누구에게 나를 이끌어 가도록 허락할 것인가? 나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인가? 날개를 달고 날아갈 재물인가? 우리가 믿고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분은 우주적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뿐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도전하려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자신이 쟁취하려 한다. 니므롯은 시날 땅에 바벨탑을 쌓으며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고 큰 소리쳤다(창세기 11:4).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에게 도전하는 그들에게 언어를 흔잡케 하심으로 그들을 징치하셨다. 우리는 주의 높으신 권세를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에베소서 교회론의 진수(眞髓) 중의 진수는 승귀의 그리스도가 교회에 주어지셨다고 하는 것이다. 한글개역개정은 22절 하반절을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라고 번역한다. 이는 원문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이다. 이 번역은 국문법적으로 모호하고, 의미구성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최소한 영역본들을 보라. 거의 모든 영역본들이 원문과 일치한 번역을 내놓고 있다. 원문의 정확한 뜻은 하나님이 그[그리스도] 곧 만물의 머리를 교회에 주셨다라는 것이다. 바울의 의도는 그토록 높으신 우주적 통치권자(그리스도)를 교회가 받았으니 교회가 어떤 실재인가를 인식해 보라는 것이다. 우주적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땅에 존재 하는 교회와의 신비적 결합은 교회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그리스도에게 교회가 무엇이지 생각하게 한다. 이 결합은 교회가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우주 중에 가장 중요한 실재임을 암시한다. 교회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매일 시달리고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높으신 권세와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특별한 기관이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에이전트와 같은 기관이다. 하나님이 승귀의 그리스도를 교회에 주셨으니, 그리스도는 교회를 어떤 존재로 여기시겠는가?

첫째,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기의 몸으로 여기신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23절 상반 절). 이것은 일종의 그림 언어로 그리스도가 교회를 얼마나 귀중히 여기시는지에 대한 표현이다. 그분은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교회를 사랑하신다. 사람이 본능과 의식을 전량 가동하여 자기 몸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신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충만케 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신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23절 하반절). 교회를 자기 몸으로 여기시는 그리스도는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케 된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며, 에베소서 교회론의 핵심이다. 바울은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과감하게 교회를 만물 안에 계시면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충만하게 된 실재라고 선언하고 있다. “충만”이라는 것은 물이 가득 부어진 컵처럼 승귀의 그리스도의 모든 것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 곧 더할 나위 없이 충족한 상태를 의미한다. 영적 차원에서 볼 때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로 충만케 된 실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충만인 것을 깨닫고 그 사실을 삶 속에서 실현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이 교회를 충만케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성령을 부으시고(참조. 막 9:10; 마 16:28; 눅 9:27), 필요한 모든 은사들을 보내 주시며, 영육간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 교회는 자신이 충만인 것을 실제 삶을 통해 나타내 보여야 한다. 교회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적 삶을 위해 힘쓰는 교회는 결코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결코 자신을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게 하지 않는다. 참된 교회는 악한 영들을 분별하고 그것들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의지하여 그것들과 담대히 맞서 싸워야 한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삶 속에서 실증해 보임으로 세상에 참된 부요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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