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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행가래] 장례휴가를 거부하신 주님의 마음을 읽자

기사승인 2020.06.22  10: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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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 청란교회 담임

   
▲ 송길원 목사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1~22, 눅 9:59~60)

언뜻 헷갈리는 본문 중 하나다. 하지만 당시 장례풍습으로 들여다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유대인은 사람이 죽으면 당일 장사(葬事)를 지냈다. 기후 조건이 이틀 삼일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또한 당시는 가족 동굴장이 대부분이었다. 장사한 지 1년이 지난다. 살은 썩고 뼈만 남게 된다. 이때 유골함에 넣게 된다. 이를 2차 장사라 했다. 장사가 두 번 행해지는 셈이다.

제자 중 하나가 장례를 위한 휴가를 요청한다. 한마디로 말해 ‘2차 장사’가 휴가 사유다. 예수님은 매몰차게 거절하신다. 고덕길 목사는 이렇게 해석한다.

랍비 문헌에 따르면, 육체의 살이 썩어 분해되는 것은 죽은 자의 죄가 구속되는 성화의 과정이며 그 마지막 단계는 뼈를 모아 유골함에 넣는 것이었다. 이로써 성화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당시 유대인들의 장례신학에 반대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만이 죄를 속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제자에게 가혹할 정도의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가 불필요한 장례관습을 따르려 했으며, 이것은 옳지 않은 신앙이고 더욱이 그릇된 신학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었다.”(‘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中)

   
 

나는 예수님이 지금 우리의 장례식을 놓고도 매우 노여워하실 것이란 생각을 한다. 무엇을 가장 노여워하실까?

1. 작별인사도 없이 지구별 소풍을 끝낸 무례에 대해 화내실 것이다.
갑작스런 죽음은 남은 자들에게 대한 형벌이 된다. 가족은 재산싸움으로 원수가 된다. 사랑을 남기고 떠나야 할 이들이 싸움과 분쟁을 남긴다. 꼴사나운 일이 한둘이 아니다. ‘나 없이 내일이 시작될 때’를 생각하며 유언장을 남기는 문화가 확장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유언장 작성이 1%도 안 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선진국에서 50%가 넘는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장례·장묘, 장기기증 등 아름다운 마무리를 교회가 도와야 한다. 하이패밀의 해피엔딩 스쿨이 좋은 사례다.(하이패밀리는 오래전부터 ‘해피엔딩 노트’도 보급하고 있다.)

2. 혼합잡탕식의 국적 없는 상·장례에 탄식하며 역겨워하실 것이다.
삼우제(三虞祭)란 ‘석 삼(三)’, ‘우제 지낼 우(虞)’, ‘제사 제(祭)’가 결합된 단어다. ‘우제’란 유교제사 용어다. 장례 당일에 지내는 제사가 ‘초우’(初虞)다. 그 다음날 지내는 제사를 ‘재우’(再虞), 셋째 날 지내는 제사를 ‘삼우’(三虞)라 한다. 시신을 매장한 뒤 죽은 자의 혼이 방황할 것을 염려하여 편안히 모시는 제사다. 임종예배, 입관예배, 위로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예배를 남발·남용해 놓고는 마지막은 삼우제로 마무리 짓는 장례식, 내 생각에 죽음이 배꼽을 잡을 것만 같다.

극소수라 하겠지만 49재까지 있다. 천도재(遷度齋)로도 불리는 49재는 재계할 재(齋), 법도 도(度), 옮길 천(遷)을 써서 좋은 세계로 옮겨 드리는 불공을 뜻한다. 사람이 죽고 나면 사후에 7번의 재판을 받는다. 심판관이 다 다르다. 일곱 번의 재판이 끝나야 극락행인지 지옥행인지가 결정 난다. 다섯 번째 심판관이 염라대왕이다. 이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탈상(脫喪)한다고 여긴다. 이 잘못된 관행과 용어들을 입에서 지워내는 일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를 기도할 자세가 아닐까?

3. 이름은 자연장이라고 해 놓고 자연파괴를 일삼는 이들을 심히 나무라실 것이다.
1회용품의 음식접대, 장묘·조문 때 쓰는 생화 아닌 플라스틱 조화가 환경파괴의 주범이다. 생명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죽은 자에게 죽은 꽃(조화)를 갖다 바치는 것은 모욕이다. ‘(여전히) 당신은 내게 살아 있습니다.’는 의미에서 생화를 들고 가야 한다. 싸구려 조화를 갖다 꽂아놓고 한식일이나 중추절에 우르르 몰려가 단체 급식하듯 단체 조문하는 한국의 명절 문화를 주님은 이해하실까? 그러니까 빽빽한 납골당은 줄을 서서 3분짜리 면회를 하고 나오는 꼴이다. 죽음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을까? 서너 시간 기다렸다가 몇 마디 듣고 처방전 들고 나오는 대학병원 진료와 다를 바 없다. 웃긴다. 아니 가소롭다.

조문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고인의 돌아가신 날을 중심으로 가족들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내서 방문하는 게 어떨까? 뉴욕, 9.11 메모리얼 뮤지엄은 생일 맞은 희생자에게 꽃을 헌정한다.(하이패밀리 수목장도 고인의 생일 날 유족이 오던 안 오던 꽃 한 송이를 갖다 놓는다.) 품격이 다르다. 이렇게 명절 중심이 아닌 기념일 중심으로 추모를 전환하면 교통유발과 사망률도 줄일 수 있다. 아니 명절에 몰려 일으키는 가족불화를 절반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평일에는 가정사역자, 밤에는 관리인, 명절에는 묘지관리인으로 살아온 나는 주님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죽일 넘들!”

송길원 목사 happyhome10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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