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교회는 생명력을 가진 건축물

기사승인 2020.06.22  15:06:52

공유
default_news_ad1

-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9)

김정훈 교수 / 김정훈 교수는 영국 더람(Durham) 에서 제임스 던(James Dunn)의 지도로 석사를, 영국 글라스고(Glasgow)에서 존 바클레이(John Barclay)의 지도로 박사를 취득하였고, 백석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다 올해 2월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The Significance of Clothing Imagery in the Pauline Corpus’ (T&T Clark), ‘바울 서신 연구’ ‘사도들의 설교와 신학’ ‘약속, 성취,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작은 구름 한 조각’ 등이 있다. 현재는 B and C Mission Center 대표로 있다.

   
▲ 김정훈 교수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건축술적 연합체(엡 2:19-22)

바울은 자기가 목숨을 바쳐 사역하고 있는 교회가 무엇인지 보다 전진된 진술을 시도하고 있다. 그가 앞 단락(엡 2:11-18)에서 교회를 “하나,” “한 새 사람,” “한 몸,”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라고 묘사했을 때, 그는 이미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심오한 통찰을 진술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용어들이 갖는 교회론적 의미를 또 다른 각도에서 종합함으로써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제공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강조한다.

첫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론적 결합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놀라운 신분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방인들은 이제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19절). 바울은 영적으로 유대인들과 하나가 된 이방인들의 위상을 설명하기 위해 11-13절에서 사용한 대조 도식을 재사용함으로써 교회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그는 믿는 이방인들이 더 이상 “외인”도, “나그네”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두 개념을 예리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70인경에서는 이 두 개념을 동의어로 취급한다. 그러나 “외인”이 타국인 또는 낯선 사람을 가리킨다면(비교. 12절; 참조. 마 25:35, 38, 43-44; 27:7; 행 17:18, 21; 히 11:13; 13:9),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 타지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행 7:6, 29; 벧전 2:11).

   
 

외국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억울하고 서러운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밖에 나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여 얼굴이 골절되는 치명상을 입어도 쏜살같이 달려온 경찰차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시키고 자국민을 보호하기에 급급하고 결국 사고의 원인이 아이에게 있다고 통보하며 가해자 접촉 금지 명령을 내린다. 라운드어바웃을 돌다가 급히 뛰어든 차가 내 차를 찌그러뜨려도 접촉사고의 원인이 당신의 과속에 있으니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벌금을 때린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복된 약속들로부터 제외된 이스라엘 나라 밖의 타국인들과 같이 취급하였다. 이방인들은 아무 잘못한 것도 없이 유대인-‘갑’들의 등 뒤를 서성거리며 서러움의 눈물을 삼켜야 하는 ‘을’들이었다. 또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해 본 사람이라면 현지인들의 텃세와 경계로 인해 괴로운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고, 오해를 받아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도 하고, 괜한 시비로 괴롭힘을 당하기도 해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도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걸어서 부모 심부름이나 무슨 일이 있어 타동네를 지나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그 동네 아이들이 괜히 욕을 하거나 돌을 던지기까지 하면서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이렇게 “외인”과 “나그네” 취급을 하였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훗날 지옥 불을 땔 때 장작개비로 쓸 것들이라고까지 하며 멸시하였다.

교회에서는 결코 이런 종류의 일들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다문화 가족이 교회를 찾을 때, 북한 이주민들이 교회를 찾을 때, 낯선 사람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릴 때, 모르는 사람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할 때, 기존 성도들은 그들을 대하여 경계의 울타리를 쳐서는 안 된다. “한 주,” “한 믿음”을 공유한 사실이 확인되는 한, 기존의 성도들은 개방성을 가지고 그들을 대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의 품과 같아야 한다(갈 4:26). 남모를 번민으로 아픈 심장을 쥐어짜며 몸부림치는 자, 계속된 불면으로 두개골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을 호소하는 자, 몸도 마음도 소진되어 관속의 사자(死者)처럼 미동조차 할 수 없는 자, 사람들에게서 받은 깊은 상처로 쓰라림에 흐느끼는 자, 소망을 잃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자, 거듭된 실패에 인생을 내팽개친 듯 막살아가는 자, 영혼의 황폐화로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자 ··· 교회는 이런 모든 자를 품을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더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다. 그들은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바울에게 믿는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극적 변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과 그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 된 자들이다. 지금 이방인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믿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영적 특권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지금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의 멤버로서 그의 식탁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자들이다. 이는 믿는 모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동일한 토대 위에서 새롭게 출현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그의 가족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집안 배경, 사회적 신분, 부(富)의 정도, 학벌, 세상적 지위, 성별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결정하거나 하나님 가족의 자격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속량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이며 그의 가족의 사랑스러운 식구들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 보호하심을 받는 존귀한 자들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공급과 보살핌을 받는 그분의 자녀들이다.

둘째,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는 함께 지어져 가는 건축물과 같다(20-22절; 비교. 고전 3:9-17; 벧전 2:4-5).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들을 보면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과 섬세함, 웅장함에 절로 탄성을 발한다. 거대한 건축물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감상에 젖어 속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누가 설계했을까, 어떤 자재를 사용했을까, 몇 년이나 걸렸을까, 어떤 공법으로 지었을까, 내부 구성은 어떻게 했을까, 각 방의 용도는 무엇일까, 내부 장식은 어떻게 했고 그 기준은 무엇일까, 채광은 어떻게 했을까, 채색은 어떻게 했을까 등등. 그런데 나는 본문이 보여주는 영적 건축물로서의 교회의 모습은 사람의 아이디어로 지은 그 어떤 빌딩보다도 웅장하고 견고하고 아름답고 생명 가득한 빌딩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문이 진술하고 있는 영적 건축물로서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일견해 보자.

(1) 교회 공동체의 토대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20절 상). 교회는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의 토대, 선지자들이 전한 계시의 터 위에 서 있는 신령한 건축물이다. “사도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을 중심으로 한 최전선의 복음 전파자들을, “선지자들”은 신약 성경시대 초기에 하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전한 계시 전달자들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고전 3:11), 왜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교회의 토대라고 말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뿌리가 그리스도이시고, 그들이 전한 복음과 계시가 그리스도가 전파한 천국복음과 그의 죽음, 부활, 승귀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토대”라고 하는 말과 “그리스도의 토대”라고 하는 말은 등가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할 때, 예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과 선지자들이 전한 계시의 토대 위에 서 있지 않으면 교회라고 볼 수 없다. 교회가 어떤 사람의 신비체험이나 이목을 끄는 특이한 행동, 수려한 언변, 마성적 능력, 그럴싸한 교리, 유사 복음이나 유사 계시 위에 서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아성일 뿐 교회라고 볼 수 없다. 만일 그런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결국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실망만 안겨주고 와그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인간의 사상이나 정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곳에 결코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

(2) 교회 공동체의 모퉁이돌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이기신 귀하고 견고한 기초석이시다(20절 하). 이사야 선지자는 구약시대에 이미 이 사실을 예언하였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사 28:16).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석으로 삼아 위치와 방향을 잡고 세워져 간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쓸모없는 돌로 여기고 버려 버렸다. 그러나 예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 다윗은 구약시대에 일찍이 바로 이 사실을 예언하였다(시 118:22). 베드로는 이사야서와 시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는 하나님이 택하신 산 돌 곧 보배로운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진술한다(벧전 2:4-7). 어떤 사람이 만일 교회의 모퉁잇돌처럼 행세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다. 그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위를 탈취하려고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교회는 사실 교회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종교집단 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이단들과 유사 교회들이 이런 행태를 나타낸다.

(3) 영적 건축물로서의 교회 공동체의 외관은 여러 건물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복합건물 형태로 되어 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21절). 유럽의 오래된 도시 건축물들을 보면 건물들이 연달아 이어져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좁은 면적에 수많은 민족이 함께 살아가려 하니 건축 형태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건축물로 비유하는 바울의 교회 공동체에 관한 설명은 서로 연결된 형태의 집합 건물을 연상하게 하는데, 이는 그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상징되는 다양한 종류의 구성원들과 모퉁잇돌 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결합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교회는 나라와 인종, 지역, 계층, 신분, 성별, 연령, 시대를 뛰어넘어 믿는 모든 사람이 함께 연합하여 세워져 가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후 6:16). 교회 공동체를 “성전”이라고 할 때 이는 교회가 구약 성전의 전통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교회 공동체는 신령한 건축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 국가를 초월한 세계 모든 교회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거룩한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간다. 바울은 이것을 “자란다”(아욱사노)라고 묘사한다(한글개역개정은 “되어 가고”라고 되어 있으나 이 번역은 바울의 은유적 표현이 의도하는 바를 적절히 나타내 주지 못하고 있다). “건물” 이미지에 대한 “성장” 이미지의 갑작스런 혼합은 부조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두 이미지의 합성은 “건축물” 비유가 앞의 “한 새 사람” 또는 “한 몸” 비유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 합성을 통해 자신의 건축물 비유가 어떤 무생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의 역동적 성장에 관한 이야기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는 모세 성막과 솔로몬 성전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성막과 성전의 맥을 잇는 교회는 지금도 계속 지어져 가고 있다.

(4)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지금도 건축 진행 중에 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절). “너희”는 여기서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들 역시 성전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교회 공동체로 현시된 영적 성전 건축의 목적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이다. 이 개념은 21절에서 사용한 “성전”에 대한 주해적 진술로 출애굽 시대의 성막과 왕정시대의 솔로몬 성전을 연상케 한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그가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는 장소이며 또한 그들을 통치하는 지휘소였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성막/성전이 성취되어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신령한 건축물과 같은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지는 것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 믿는 이방인과 믿는 유대인이 한 몸을 이루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엡 2:16)과 그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엡 2:18)이 서로 맞물려 있는 것처럼, 한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함께 성전으로 자라간다는 것과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은 서로 맞물려 있다. 성령께서는 이질적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결합시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완성해 가신다. 지금도 각기 성격과 배경이 다르고 수많은 차이를 가진 사람들을 그리스도라는 용광로에 녹여 거대한 건축물(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건설해 가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그는 성령이 자신을 최상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시도록 자신을 완전히 그분께 내어 드려야 한다. 인간이 교회의 주관자가 되어 교회 구석구석을 좌지우지한다면 성령께서는 활동을 멈추고 조용히 물러나 계실 것이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건축되는 것이 중단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 구성원들은 성령께 지배권을 내어드리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서의 성전 건축이 최종 완성에 이른 것이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현재 수동태)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오래 전에 완공되어 구석구석 먼지가 쌓이고 여기저기 거미줄이 낀 낡고 퇴락한 건물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생명력을 가진 건축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 건물이 견고하고 웅장하게 건축되어 갈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으신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신령한 건축물로서의 교회가 술집이나 찻집으로 용도 변경된 유물이 되어 후손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철저히 성결을 유지하며 명실공히 하나님을 만나는 처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처소, 하나님께 예배하는 처소가 되도록 잘 간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