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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빌리 그래함 목사의 ‘명암’(1)

기사승인 2020.06.24  14: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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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는 복종, 딸들은 고등학교까지만

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최은수 교수

아내는 복종, 딸들은 고등학교까지만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복음전도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가 2018년 2월 21일 소천한 이후 2주기를 지나서 3주기를 향해 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사가는 한 인물이 죽고 난 이후에 교회사적 평가를 한다. 이 글도 그런 과정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그는 ‘미국의 목사’(America’s Pastor), ‘목사 중의 목사’, ‘역대 대통령들의 영적 멘토’, ‘2억 천만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한 인물’ 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의 사역 기간 동안 186개국이 넘는 국가와 지역을 넘나들며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60년 이상 각종 신문매체들의 칼럼을 통해 제기되는 각양 질문에 답변을 하였고, 템플턴 상을 비롯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상과 명예들을 얻었으며, 34권 이상의 저술들을 통하여 전무후무한 영향들을 주었다. 그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었다면 성자로 축성되고도 남을만한 공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도 전능자의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빛(明)과 더불어 어둠(暗) 이라는 그림자의 그늘에 있었다. 1943년 8월 13일에 중국 선교사의 딸인 루스 벨(Ruth Bell)과 결혼할 때, 빌리 그래함 목사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하면서 자신은 가장으로서 권위를 가지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다짐을 받았다. 당시 루스 벨은 티벳으로 선교를 가기 위해 비전을 가지고 준비하던 중에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힘든 시간이었다. 더 나아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세 명의 딸들이 모두 20세 이전에 결혼하였고 단 한명도 제대로 대학진학을 하지 못했다. 특히 루스 버니 그래함(Ruth Bunny Graham)은 2018년 2월 21일자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기사에서 자신이 휘튼대학의 5년제 간호학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부친인 빌리 그래함에게 말하자 아버지가 단호하게 반대하였다고 회상하며 당시의 아픔을 토로하였다. 나는 빌리 그래함 목사가 남부 출신으로 가부장적이며 보수적인 견지에서 아내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한 것은 백번 양보하여 당시의 정황상 이해한다고 해도, 딸들의 대학진학을 반대하고 20세 이전의 어린나이에 모두 결혼하도록 만들었던 부분은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왜냐하면 19세기 초부터 미국 전역에 걸쳐 여성 신학교 운동(Female Seminary Movement, 후에 여자대학)과 공립학교 운동을 통하여 여성의 중고등교육과 대학교육을 위해 교회와 목회자들이 적극 앞장서 왔기 때문이다. 이런 운동들도 빌리 그래함의 시대보다 100년 이상이나 앞서 시작되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는데 말이다.

   
▲  1973년 빌리그래함 목사의 한국 여의도 전도대회 광경(BGL)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 목사의 명암(明暗) 을 생각하면서, 나는 본 글을 통하여 그의 부인할 수 없고 빛나는 업적들을 크게 세 가지로 먼저 언급코자 하는데, 지금까지 드러난 내용들은 매우 간단히 나열하는 대신 한국과 연관되었으나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중심으로 말하려고 한다. 아울러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들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평가하는 가운데 빛나는 부분과 어두운 면의 균형을 맞추고자 한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를 통한 감동과 영감
첫 번째로, 한국과 관련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의 빛나는 부분은 그가 한국교회의 새벽기도를 통하여 감동과 영감을 받았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빌리 그래함 목사와 한국을 연결시키면서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 주일 오후에 이르기까지 여의도광장에 110만 명이 운집한 대형집회를 가장 먼저 떠올리며 이것이 대표적이고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 집회가 기념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빌리 그래함의 수많은 전도 집회들 가운데서 최고로 많이 모였기 때문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블루 릿지 산맥에 위치한 빌리 그래함 훈련원에 가면 거기에 교회겸 개인 기도실들이 있는데 내부 곳곳에 그가 다니며 집회를 했던 사진들과 모인 숫자가 병기되어 있고 그중에 한국이 단연 최고의 참석 숫자로 돋보인다. 그러나 여의도 집회가 열리기 21년 전인 1952년 12월에 그가 한국을 방문했던 일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가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깊은 감명과 영감을 받았다는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내가 노스캐롤라이나 주 블랙 마운틴(Black Mountain)을 방문하였을 때 부마리아(Mariella Talmage Provost) 선교사로부터 직접 듣고 관련된 사진들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부마리아 선교사는 부친인 존 반 네스트 탈메이지(John Van Neste Talmage, 타마자) 선교사의 7남매 중 막내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도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간호학을 공부한 후 1948년에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전주예수병원에서 사역하였다. 1952년에 미 남장로교회의 선교사 훈련원이 있던 몬트릿(Montreat)에서 미 북장로교 선교사인 레이몬드 프로보스트(Raymond Provost, 부례문)와 아버지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그들의 결혼비용은 100달러 전후였다. 그 해에 빌리 그래함은 새신랑이자 장차 경주 문화 중고등학교의 설립자가 될 부례문 선교사와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당시 한국이 전쟁 중이었고 한국지리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가 부례문 선교사에게 가이드 겸 사진사로 동행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이루어진 여정이었다. 그들이 탄 비행기가 알루션 열도에 비상 착륙하면서 기체를 수리하는 와중에 두 사람은 비로소 대화를 하게 되었고, 빌리 그래함 목사가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부례문 선교사의 안내로 두 사람은 새벽기도가 열리는 피난민 교회를 방문하였다. 그 피난민 교회는 산 속에 있었는데 임시로 지붕만 가린 채 사방이 개방된 열악한 환경에서 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그 시기는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신년이 시작된 1월이었기 때문에 무척 추웠고 더군다나 새벽공기는 모든 것을 얼려버릴 기세였다. 성도들은 임시로 깔아 놓은 거적때기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신과 민족의 죄악을 통회자복 하면서 전쟁의 승리와 회복을 위해서 통성으로 기도하였다. 사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는 1890년대 시작되어 1906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영향과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새벽기도회 참석 시점으로부터 대략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국교회의 독특한 새벽기도회 전통이었기 때문에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감동이 빌리 그래함 목사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이었고, 장차 자신의 사역 역사상 가장 많은 참석자가 모이게 될 여의도집회의 영적 원천이 되었던 셈이다.
 

한국 파송 은퇴선교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두 번째로, 한국과 관련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의 빛나는 부분은 미국 남장로교회 파송 은퇴 선교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이다. 블랙 마운틴의 옆 동네인 몬트릿은 미 남장로교회의 영적인 휴식처이자 재충전의 장소였다. 몬트릿(Montreat)은 산(Mountain)과 휴양(Retreat)을 줄인 말이다. 1897년 초교파 지도자들이 마운틴 리트릿 협회(Mountain Retreat Association)를 조직하였고, 1905년에 미 남장로교회가 이 협회 소유의 4,000 에이커를 구입하여 휴양지 겸 훈련원을 세웠다. 1926년에는 미 남장로교회의 장로교 역사 재단이 문을 열면서 관련 자료들을 보관하고 열람할 수 있었다. 이곳에 있던 기록들은 1983년 6월 10일에 미 남북장로교회가 다시 하나가 되면서 현재는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역사 연구소로 옮겨졌다. 빌리 그래함 목사 부부는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루스 벨 그래함의 부모가 살고 있던 몬트릿으로 이사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미 남장로교회 파송 중국 의료선교사로 봉직하던 중에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더 이상 현지사역이 불가능해지자 귀국하여 자연스럽게 여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빌리 그래함 목사가 지역교회 목회를 정리하고 복음전도자로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들의 집이 블랙 마운틴을 거쳐 몬트릿으로 들어가다 보면 돌로 만든 아치형 구조물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서 볼 때 왼편 산의 정상에 위치하였다. 최근에 누가 새겨놓았는지는 모르지만 몬트릿 초입의 아치형 구조물 옆에 있는 이정표에 한글로 된 ‘환영’ 글자도 선명하다.

블랙 마운틴에서의 만남을 계기로 나의 ‘한 어머니’(a mother)가 되신 부마리아 선교사를 비롯하여 노령의 은퇴 선교사들은 빌리 그래함 목사의 관심과 배려와 노력 덕분에 자신들이 블랙 마운틴과 몬트릿 등지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빌리 그래함은 고향인 샬럿(Charlotte)에 위치한 자신의 옛 농장 자리에 빌리 그래함 도서관(Billy Graham Library)과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 본부를 마련했고, 블랙 마운틴에서 가까운 블루 릿지 산맥(Blue Ridge Mountains) 자락에 빌리 그래함 훈련원(The Cove)을 대규모로 조성하였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자택이 있는 몬트릿과 블랙 마운틴에 은퇴 선교사들이 비교적 저렴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빌리 그래함 부부는 몬트릿에 살면서 은퇴선교사들의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부마리아 선교사의 결혼식에는 루스 벨 그래함이 참석하여 부마리아의 남장로교회와 부례문의 북장로교회가 혼인을 통한 하나 됨을 축하했다. 당시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런 경사와 함께, 그들은 은퇴선교사 가정의 슬픈 일에도 함께 하였다. 미 남장로교회의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광주기독병원의 원장으로서 전후복구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허버트 아구스투스 카딩턴(Herbert Augustus Coddington, 고허번) 선교사의 딸 장례식에도 그래함 부부가 참석하여 함께 슬픔을 나누며 위로하였다. 당시 고허번 선교사의 딸이 미혼으로 노부모와 함께 살면서 애쉬빌(Asheville)에 있는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통근하다가 반대편에서 오던 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고허번 선교사의 큰아들로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클린턴(Clinton)에서 장로교 목사로 시무하는 허버트 카딩턴(Herbert E. Coddington) 목사는 누이의 장례식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가 기도로 위로하던 장면을 나에게 자세히 설명하는 도중에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차분하게 그래함 부부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여러 번 표현했다. 이 큰아들 목사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고 대전외국인학교를 졸업했다.
 

북한을 위한 복음의 가교역할
세 번째로, 한국과 관련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의 빛나는 부분은 북한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교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1992년에 성사된 빌리 그래함 목사의 방북은 외형적으로 볼 때 루스 벨 그래함 여사가 중국 의료선교사의 딸로서 1930년대 초부터 평양외국인학교를 다녔다는 인연 때문이었다. 당시 미 남장로교 파송 의료선교사인 부친 넬슨 벨(Nelson Bell)의 딸로서 그녀는 아버지가 의사로 있던 중국의 병원에서 기차로 5일이나 걸리는 평양외국인학교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다. 그녀도 항상 평양의 캠퍼스를 그리워하며 블랙 마운틴 주변으로 모여드는 같은 학교 출신의 선후배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타마자 선교사의 ‘막둥이’ 부마리아 선교사는 세살 연상으로 평양외국인학교 선배인 루스 벨 그래함 여사를 친언니처럼 믿고 따랐다. 북한 당국은 그래함 여사와의 인연을 명목으로 삼아 북핵 사태로 고착된 북미관계의 경색된 분위기를 해소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빌리 그래함 목사는 북한으로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고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인돈(William Linton) 선교사의 아들이자 호남신학대학교 초대 학장을 역임한 드와이트 린튼(Dwight Linton, 인도아) 선교사가 통역으로 동행하였다. 김일성 주석에게 성경을 선물한 빌리 그래함 목사는 1993년 재차 방북하였다.

그의 방북으로 북한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인도아 선교사의 주도로 한국에 본부를 둔 ‘유진벨 재단’(이사장 인세반), 블랙 마운틴에 본부를 둔 ‘한국의 그리스도인 친구들’(인안드레와 하이디 린튼 부부),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우물파주기 운동’(인야고보) 등이 조직되어 ‘린튼’ 가문을 중심으로 북한사역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는 와중에 북한에서 파견한 기술자들이 노스캐롤라이나 주 블랙 마운틴을 방문하여 인애자(Lois Elizabeth Flowers Linton, 인휴 선교사의 부인) 선교사와 그녀의 아들이자 나의 ‘행님’(hengnym, 형님)으로 모시는 인야고보 선교사 집에서 숙식하며 우물 파는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블랙 마운틴의 은퇴한 선교사들도 북한사역 팀의 일원으로 방북하여 모교인 평양외국인학교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고 추억을 되새기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전라남도 광주 태생으로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우요한(John Wilson) 의료선교사도 방북하여 평양을 다녀온 후 평양외국인학교 40년사를 발간하였다. 그에 의하면 40년 동안 재학생들은 모두 584명이었고 졸업생들은 188명이었다. 우요한 박사는 미 남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광주에 파송된 우월순(Robert Manton Wilson) 박사의 다섯째 자녀였다. 우월순 선교사는 광주에서 나병원을 시작하여 순천을 거쳐 여수애양원의 기초를 놓은 문둥병 치료의 대부였다. 우요한 박사가 나와 대화를 하면서 작고한 아버지 우월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눈시울을 적시던 모습과 교회사 서술에 사용하라고 평양외국인학교 앨범을 전해 주면서 감회에 젖어 그의 손이 떨리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우요한 박사는 정원을 가꾸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블랙 마운틴에 가면 그의 이름을 붙인 존 윌슨 정원(John Wilson Community Garden)을 볼 수 있다. 그는 100세가 되기 25일 전인 2016년 5월 4일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정리해 보면, 빌리 그래함 목사가 평양외국인학교 출신의 루스 벨 그래함과 결혼했기 때문에 이를 매개체로 해서 방북하여 교류의 물꼬를 텄고, 평양외국인학교를 명분으로 북한은 북핵 위기를 넘어 일정기간 동안 개방의 길로 나섰던 것이다. 이제 빌리 그래함 목사의 어두운 부분을 말하려고 한다.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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