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마태복음의 큰 흐름 중 하나 ‘선교’(3)

기사승인 2020.06.26  13:23:08

공유
default_news_ad1

- 방동섭 교수의 선교로 읽는 성경(9)

방동섭 교수 /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석사, 미국 칼빈신학교 신학석사 과정, 미국 리폼드신학교 박사, 전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글로벌비전교회 담임, 저서로는 <십자군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선교없이 교회없다> <우리의 선교가 실존입니다>

   
▲ 방동섭 교수

온유함: 가고 보내는 선교사들은 힘이 없어서 자신을 해하는 자에게 복수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온전히 하나님 손에 맡기고 살기 때문에 복수로부터 자유롭다.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 사역은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사람보다는 의외로 온유한 자’(οπραες)를 통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보게 된다. ‘온유하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던 ’심령의 가난‘과 ’애통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로이드 존스는 이에 대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면 결코 온유한 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이 몸서리치는 죄인이라는 것을 볼 수 없다면 그는 온유한 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온유’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서 가운데 오직 마태복음에 만 세 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첫 번째 나타나는 ‘온유’의 개념은 산상 수훈의 말씀가운데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적용하여 사용하신 것이다(5). 두 번째는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의 성품을 묘사하기 위해 ‘온유’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마태는 그것이 스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적용하여 사용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온유함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려면 무엇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우라’고 제자들에게 배움에로의 초대를 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여기서 ‘온유’(πραος)와 ‘겸손’(ταπ εινος)을 함께 사용하셨다. 그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된 것은 그 의미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온유한 자는 일반적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배워 그 모습을 본 받아 살게 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는 자가 누리게 될 축복이다. 우리가 살면서 진정한 마음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우리 마음이 너무 높은데 있고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사역자들이 교만한 모습으로 현장에서 일한다면 마음의 평안이 거할 수 있는 공간은 그들 안에 없을 것이다. 스가랴는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아는 ‘겸손하여 나귀를 탈 것이라‘고 예언 하였다. 그 말씀 그대로 왕이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마태는 스가랴의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고 하였다. 바로 여기 사용된 ‘겸손하다’는 단어가 ‘온유하다’(5)는 단어와 같은 ‘프라우스’(πραυς)이다. 마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모습을 통해 ‘온유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마태는 온유하신 예수님 이 힘을 바탕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정치적 세력과는 철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정복하실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힘이 아니라 '겸손과 희생적인 삶'으로 세상을 정복하실 것이다. 이 시대의 선교나 사역도 예수님의 이러한 온유한 삶을 본받아 진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차별성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님을 따라 온유한 모습으로 선교하지 않고 교회가 힘을 가지고 세상 나라처럼 무력을 사용하여 선교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십자군의 선교. 십자군은 이름과는 달리 ‘십자가’를 앞세우기보다는 권력을 가진 세상 정복자의 모습으로 선교 현장에 들어갔다. 그 결과 ‘십자군의 선교’는 현장의 사람들에게 정복자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을 바탕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던 정치적인 세력과는 철저하게 다른 삶의 방식으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 차이점이 바로 ‘온유한 자’의 모습이다. 마태는 예수님이 실천하신 메시야 선교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는 이에 대해 “예수님은 힘으로 정치적인 왕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샬룟 당(Zealot)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겸손과 희생적인 섬김의 삶을 사는 방식으로 메시야적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시대의 선교나 사역도 예수님의 온유한 삶의 정신을 본받아 진행되어야 한다. 과거 교회 역사에 나타났던 ‘십자군’ 운동처럼 권력을 가진 정복자의 모습을 가지고 선교 현장에 간다면 선교는 오히려 크게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사역자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나귀에 자신의 몸을 실은 겸손한 모습으로 갈보리 언덕을 향하여 나가는 ‘십자가의 선교’를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사역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선교의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온유함을 우유부단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갖는 것과 혼동하고 있다. 또한 ‘온유하다’는 것을 ‘자기부인’(self-effacement)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모리스(L. Morris)는 “온유함은 자기부인을 뜻하는 다른 단어이다”라고 하였다. 스티어(R. Stier)도 ‘온유함’을 ‘자기부인’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자기부인은 세상을 정복하는 길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온유함’의 개념들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의 개념은 그보다는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본다. 온유함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그의 온전한 다스림을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관하여 로이드 존스(Lloyd-Jones)는 “우리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것을 느껴도 우리 자신, 권리, 주장, 미래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온유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퍼거슨 (S. Ferguson)은 “온유함은 겸손한 능력이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이해하고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있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의 개념이라고 본다. 이러한 ‘온유’의 개념은 겟세마네 언덕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기 위해 진노의 쓴잔을 마셨던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도 진정한 ‘온유’의 개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영혼이 떠나실 때까지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셨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온유함의 진정한 의미를 만나게 된다. 따라서 온유한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손에 맡기고 그의 다스림을 온전하게 받으면서 살아가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이 토기장이의 의지를 따라 쓸 만한 그릇으로 빚어지는 것처럼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가 그의 절대 주권을 따라 빚어주시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온유하신 모습은 이 시대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다. 그들은 때로 현장에서 그들의 선교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악한 세력을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배운 사람들은 그 사악한 세력들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의 주권을 따라가게 된다. 선교사나 성도들이 힘이 없어서 자신들을 해하는 자에게 복수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온전히 하나님 손에 맡기고 살기 때문에 복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울이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온유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온갖 어려운 방해와 고통의 시간들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선교사만이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셨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5). 온유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땅의 기업이 있다. 여기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측면에서 해석한다면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을 선교적인 의미로 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이들에게 일할 수 있게 하는 땅, 그에게 현장을 맡기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온유한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