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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빌리 그래함 목사의 ‘명암’(2)

기사승인 2020.07.03  10: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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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전도사역과 가정생활의 불균형

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최은수 교수

앞의 글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가 한국과 관련하여 이룬 빛나는 업적에 대하여 세 가지로 알아보았다: 새벽기도회를 통한 감동과 영감, 한국 파송 은퇴 선교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북한을 위한 복음의 가교 역할. 이제 빌리 그래함 목사의 어두운 부분을 세 가지로 말하려고 한다.

복음 전도 사역과 가정생활의 불균형
첫 번째로, 빌리 그래함 목사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결혼과 자녀양육 등 가정생활에 드리웠다. 빌리 그래함이 휘튼대학에서 만난 루스 벨은 캠퍼스에서 돋보이는 존재였다. 다른 남학생들처럼, 그가 루스 벨을 자신의 반려자로 생각하고 다가가려 했지만, 당시 루스 벨이 선교사가 되어 티벳으로 가려고 준비중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누구도 안중에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건 빌리 그래함의 진정성 있고 힘이 넘치는 기도였다. 결혼을 앞두고 빌리 그래함은 가장으로서 자신이 뭐든 결정하고 인도할 것이니 아내로서 루스 벨은 복종하고 무조건 따라만 오라고 다짐시켰다. 루스 벨이 티벳으로의 선교적 소명을 포기하기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빌리 그래함이 말한 결혼 관계 속에서 아내의 역할도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도 버지니아주 출신으로 미 남장로교회의 일원으로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인물이었고, 그녀가 성장한 중국의 분위기는 유교의 영향으로 한층 더 가장의 권위가 절대적인 환경이었다. 실제적으로, 유교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 장로교가 빠르고 쉽게 토착화될 수 있었던 요인도 이런 특징들과 관계가 깊다. 특히 빌리 그래함의 배경을 볼 것 같으면, 그의 조상들은 세계에서 유일한 장로교 국가인 스코틀랜드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더 나아가 스코틀랜드 국가교회가 지교회 담임목사 임명권을 정치적으로 행사하려고 교권을 휘두를 때 신앙의 자유를 위해 기득권을 포기한 분리파 장로교회였다. 하지만 이 분리교회도 국가교회의 특권만 빼면 여전히 다른 장로교회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보수적이고 엄격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비국교회가 된 분리교회(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교인들이 대거 신대륙으로 이주하였고, 가문의 전통에 따라 빌리 그래함도 부모와 함께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 '20세기 최고의 전도자'로 불린 빌리 그래함 목사 ⓒDB

필자는 교회사적으로 미국 남부의 분위기와 미 남장로교회의 특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빌리 그래함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엄격한 분위기 자체에 대하여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타의 가장들처럼 빌리 그래함도 입장의 변화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섯 명의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그가 여행이 잦은 복음전도자이기 때문에 가족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합리화하고 심지어 미화시킨다고 할지라도, 성경적인 가족교회를 회복시키며 16세기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개혁교회의 후예로서 빌리 그래함 목사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물론 집보다 타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복음전도자의 안타까운 마음도 이해하고, 특히 그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탁월하여 눈물이 많고 감성이 풍부했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고 가장으로서의 막중한 책임마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가 자란 장로교회에서 가장의 가부장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교회를 성경의 가르침대로 섬기라고 주어졌으니 말이다. 빌리 그래함은 아내가 출산할 때도 함께 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녀들이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낯설어하고 누구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번은 루스 그래함 부인이 자녀를 데리고 빌리 그래함의 전도집회에 참석했는데, 정작 그는 그 아이가 자신의 자식인지도 몰랐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다. 빌리 그래함이 대내외적으로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을지는 몰라도, 가정적으로 그는 막강한 가장의 권한은 있으나 양육의 책임은 회피한 권력 남용자가 되어 있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자식들의 양육 책임을 소홀히 한 대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부메랑이 되어 정확히 그에게로 되돌아왔다.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의 윌리엄 마틴(William Martin)에 따르면, 장남인 프랭클린 그래함(Franklin Graham)이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면서 불법적으로 술과 담배와 마약을 가까이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위험스런 일탈을 즐기고 귀가도 늦거나 불규칙하여 부모와 주변의 우려가 컸다. 더욱이 프랭클린은 기숙학교에서 통금시간을 어겨서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차남인 넬슨 그래함(Nelson Graham)은 코카인을 포함하여 각종 마약에 중독되어 폐인이 될 지경이었다. 넬슨은 마약 복용과 귀신들림 현상으로 말미암은 우울증으로 한동안 재활센터에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런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넬슨은 이혼의 아픔을 겪었고 고통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현재의 배우자와 재혼했다. 장녀인 버지니아 ‘지지’ 그래함(Virginia ‘Gigi’ Graham)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스위스-아르메니아 후예인 스티븐 차비진(Stephen Tchividjian)과 결혼하여 7명의 자녀들을 슬하에 두었지만 극심한 우울증과 갈등으로 이혼했고, 두 번째 결혼도 오래가지 못했으며, 세 번째는 어릴적 친구와 결혼하였다. 그녀의 아들이자 플로리다주에서 메가처치 목사였던 툴리언 차비진이 전도유망한 차세대 리더로 세간의 기대와 주목을 받다가 부부 모두 부적절한 관계가 밝혀지면서 목회직을 내려놓고 이혼하였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사랑스런 막내딸인 루스 ‘버니’ 그래함(Ruth Bunny Graham)이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버니는 막내딸로서 부모와 언니들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버니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편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 자살충동을 강하게 받기도 했다. 버니가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이혼 의사를 밝혔을 때, 아버지는 막내딸인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받게 될 충격을 먼저 언급하는 것을 보고 더 큰 상처를 받았다. 버니는 5남매 중에서 가장 많은 이혼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세 번 이혼하였고 네 번째 남편도 아동 포르노물 소지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고 목사직에서 면직된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의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필자도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는 견지에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목회자든 목회자가 아니든 개혁교회의 가장들은 가족교회를 등한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 특히 목회자들이 지역교회를 섬긴다는 핑계로 가족교회를 소홀히 하면 비역사적이고 비성경적인 사람이 된다. 빌리 그래함 목사처럼 어느 누구든 복음사역을 위해 가족교회를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의 사역이 한 지역교회의 목회가 아니고 초교파적인 전도사역이라는 전제하에, 필자는 유기될 것이 뻔한 가족을 이루지 말고 바울 사도처럼 또는 수도사처럼 독신으로 살면서 자신의 사역에 매진하는 것이 이기적이지 않고 솔직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볼 때,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엄격한 교회지도자나 가장일수록 대외적인 체면치레용으로 가족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보여주려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사과는 사과나무 바로 아래로만 떨어지는가?
두 번째로, 빌리 그래함 목사의 어두운 그림자는 복음전도자인지 정치가인지 구분하기 힘든 정체성 혼란과 후계 구도에 드리워 있다. 요즘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이 격언을 인용하여 사과는 사과나무 바로 아래 떨어지기도 하지만, 이 사과나무와 전혀 상관이 없는 듯이 먼 곳에 낙과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식이 부모로부터 총체적인 유산을 계승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부모와 전혀 상관이 없는 듯이 행동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단도직입적으로, 빌리 그래함과 그가 세운 전도협회를 물려받은 프랭클린 그래함을 비교한 말이다. 일단 두 사람은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빌리 그래함은 잘 알려진 대로 ‘대통령들의 멘토’의 역할을 오랫동안 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에는 빌리 그래함도 자신이 직접 정치에 입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당시 루스 벨 그래함 여사가 남편이 정치를 하면 이혼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이혼한 후보를 유권자들이 당선시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이 일을 계기로 빌리 그래함은 자신이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려는 마음을 접고 대신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정치권과 유착 관계를 형성한 것은, 미국 헌법이 규정한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에 명백한 불법이라 할 수 있고, 반면 개혁교회의 견지에서 볼 때 국가가 교회의 사역을 보호하고 도와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합법인 셈이다.

침례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로버트 셀러스(Robert H. Sellers) 박사는 2019년 9월 30일자 뱁티스트 뉴스 글로벌(Baptist News Global)을 통해 의미심장한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침례교와 이슬람과의 대화를 꾸준히 추진해온 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그래함 부자와 개인적인 친분은 없어도 오랫동안 그들의 활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빌리 그래함을 대신하여 돌아온 탕자와 같은 프랭클린 그래함이 2001년에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후계자가 되었다. 미국같이 개인주의가 상식이 된 나라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리 혈연 관계라고 해도 개성이 존중되고 다를 수 있다. 로버트 셀러스 박사도 이 점은 인정하면서도 부친인 빌리 그래함이 기독교의 다양한 교파와 교단의 연합(Ecumenism)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반대로 후계자인 아들은 부친이 이루어 놓은 연합 정신을 훼손하면서 분란과 혼란을 주장한다고 비판하였다. 그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의 선임 작가인 데이빗 프렌치(David French)도 아들의 ‘거칠은 논리’와 ‘얄팍한 정치적 식견’으로 부친을 폄훼하며 복음주의 운동의 퇴보를 가속화시킨다고 신랄하게 성토하였다.

마찬가지로, 보스턴 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스티븐 프로데로(Stephen Prothero) 교수는 아들이 부친의 절제된 성격과 합리적인 판단력을 배우지 못하고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을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지적들과 함께, 선지자적인 역할과 관련하여, 빌리 그래함은 자신은 복음전도자이지 선지자는 아니라고 못박았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자신이 선지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공언하면서 중요한 사안마다 예언하려고 시도하였다. 아들은 이슬람교에 대해서 더욱 단호하고 적대적이어서 이슬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미국으로 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프랭클린 그래함이 스스로를 ‘연합주의자’ ‘선지자적인 사명자’ ‘화평케 하는 자’라고 생각했을지는 모르나 그의 행보는 현실과 너무나 큰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앞서 언급한 복음주의권의 학자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을 포함하여 다수의 전문가들이 후계자인 프랭클린 그래함의 예측할 수 없는 행보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후계자인 프랭클린 그래함에 대한 전문가들의 비판을 접하면서 필자는 세 가지로 그 원인들을 분석하여 제시한다.

1) 다수의 글들을 통해 프랭클린 그래함이 언급될 때마다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돌아온 탕자라고 말하듯이, 그는 인격과 성품이 형성되던 중요한 시기를 지내면서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가득차 있었고 늘 부재중인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와 같은 복음 전도자의 길을 거부하고 그는 1970년에 밥 피어스(Bob Pierce)가 설립한 국제구호단체인 ‘사마리아인의 지갑’(Samaritan’s Purse)에 1973년부터 참여하여 구호사역자로 활약하였다. 그가 22세에 회심하고 거듭난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설교자로 부름을 받고 목사 안수를 받은 때는 그로부터 10년 정도가 지난 1982년이었다.

이런 그의 삶을 통하여 볼 때, 프랭클린 그래함이 부친인 빌리 그래함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중요한 이슈마다 아버지와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버지의 총체적인 유산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여전히 반항 중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에게는 아버지의 길이 아니라 자신이 반항적으로 택한 구호사역자의 삶이 더 잘 어울려 보인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가 계속 구호단체만 이끌었다면 아버지와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지 않아도 되었고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할 필요도 없었으므로 비판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2) 프랭클린 그래함은 근본주의 기독교의 틀에 갇혀서 변화하는 사회를 선도하지 못하고 백인 복음주의(White Evangelicalism)의 한계에 부딪혀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그가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후계자가 되지만 않았어도 국제적인 구호단체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지구촌 곳곳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손길을 내밀므로 칭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을 법하다. 그는 아버지가 펼치던 복음의 ‘십자군 운동’을 계승하여 진행하고 있다. 부친이 이 운동을 진행하면서 포용과 관용을 가지고 했다면, 그는 중세기 실패한 십자군 운동의 전철을 밟듯이 적대감과 분열과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부친은 전도협회를 통해 한 생명이라도 더 전도하기 위하여 기독교 일각으로부터 세찬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복음의 문턱을 낮추고 누구든지 대화하고 설득하며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반면 아들은 기독교 근본주의에 입각하여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세력들에 대해서만 적대감을 표출해도 되는데도, 굳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온건한 이슬람까지 ‘사악한 무리’로 싸잡아 비난하면서 스스로 전도의 문을 막고 있다. 유럽의 이슬람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가 이슬람에 대하여 적대적인 입장을 표명한 후에 전도협회가 주도하는 유럽의 집회들이 곳곳에서 이슬람 단체들의 강력한 항의를 통해 반대와 취소의 압력을 받고 있다. 위대한 유산을 남긴 아버지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려면 보다 전향적이며 포용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접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협한 백인 복음주의자 들만을 의식하여 이슬람에 대한 적대적인 말들을 공개적으로 하면서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편협성은 미국 내에서도 흑백 간의 갈등, 이민문제, 국경장벽문제, 총기규제 등 민감한 사안들마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대중들의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다. 그런 여파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미국 전체에서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인구 비율이 빠른 속도로 하락 중이다. 모두가 아는 대로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로서 토착 인디언들을 제외하고는 예외 없이 해외에서 유입되었다.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초기에 이민 와서 토착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으로 몰아내고 땅을 먼저 차지한 기득권자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3) 프랭클린 그래함은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고 성경과 교리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그는 초급대학을 마치고 주립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을 뿐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다. 그의 목사안수도 애리조나주 탬피시에 있는 독립교회인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를 통하여 받았다. 미 남부는 남침례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각 지교회의 판단에 따라 목사안수를 줄 수 있었다. 목사안수의 자격요건도 각 지교회에서 별도로 정한대로 하도록 자율권을 보장하고 있다. 프랭클린 그래함이 한 독립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을 때 그 교회만의 자격요건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서도 신학대학원(seminary)을 졸업하거나 안수후에 이수해야 한다는 조건이 프랭클린 그래함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학훈련의 목적은 목회자 후보생으로 하여금 성경과 역사적 신앙에 근거하여 체계적으로 신학의 각 분야를 공부하여 궁극적으로는 신학적 사고’(Theological Thinking)를 하게 도와주고 삶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성경을 중심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의 결여는 그로 하여금 몇 가지 근본주의 신앙의 전제들을 가지고 모든 사안들을 유치하게 판단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설교, 강연, 인터뷰 등을 듣다 보면 신학훈련의 결여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 되고 성경 본문에 대한 언급은 주일학교 저학년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닌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프랭클린 그래함이 왜 복음주의권의 학자나 목회자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세 가지 원인들을 제시해 보았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구조적 문제
세 번째로, 빌리 그래함 목사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가 1950년 설립한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전반적인 체계에 드리워져 있다. 이 부분도 세 가지로 분석하여 제시한다.

1) 인적 구성의 편향성이다. 올해로 전도협회 창립 70주년이 된다. 빌리 그래함의 전방위적인 활약으로 이 전도협회는 일찌감치 세계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국제적이라고 할 때 다인종 다민족을 아우르는 인적 구성원들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 전도협회의 인적 구성을 볼 것 같으면, 그런 국제적인 단체의 위용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전도협회의 최고 의결 기구인 이사회가 15명으로 구성되는데 백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흑인 지도자가 한 명 정도다. 미국의 원주민인 토착 인디언의 후예나 아시아 계열, 그리고 멕시코를 포함하여 중남미를 아우르는 히스패닉 계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전도협회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인적 구성은 일반 직원들의 경우도 대동소이하다. 킴벌리 맥갈룸(Kimberley McCallum)이 일하던 2007년에 흑인 직원은 그녀 혼자였고 전도협회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다 파면된 후 소송을 걸었다. 당시 그녀는 전도협회가 주관하는 한 캠프를 기획하면서 635개 교회들의 리스트를 받았는데 그 중에 흑인 교회가 단 세 군데밖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그 부당성을 상사에게 항의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면되었다. 이런 소송을 겪었으면서도 전도협회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여타의 인종은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더욱 심화된 백인 일변도의 인적 구성을 합리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여건이 될 때마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 도서관, 훈련원을 방문하는데 여타의 인종에 속하는 직원을 볼 수 없었다.

2) 빌리 그래함 가문의 사역 계승에서 세습으로 중심추가 기울고 있다. 전도협회의 이사회 구성원 가운데 네 명이 가족이고 그 중에서 세 명이 최고위급 실권자들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동생이자 이사회의 실행 의장인 멜빈 그래함, 그의 아들이며 이사회 의장인 프랭클린 그래함, 그의 딸인 앤 그래함 로츠(Anne Graham Lotz), 그리고 그의 손자이자 프랭클린의 아들이며 이사회의 부의장인 윌 그래함(Will Graham)이다. 이런 구성으로 볼 때, 전도협회는 그래함 가문의 가업이 된 듯 보인다. 빌리 그래함 목사도 탕자에서 돌아온 프랭클린에게 전도협회의 대표를 맡기면서도 혹시 모를 일탈에 대비하여 자신의 동생에게 이사회의 실행 의장직을 맡겨서 균형을 도모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이미 3대에 걸친 대물림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빌리 그래함, 프랭클린 그래함, 그리고 윌 그래함으로 이어지는 구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살아본 필자의 경험으로 보자면 이런 구도가 생소하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유일한 장로교 국가인 스코틀랜드만 하더라도 철저하게 부족 즉 가문 중심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래함 가문도 스코틀랜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코틀랜드에는 네 개의 중세대학이 있고 각기 신학부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 세계적인 조직신학자인 토마스 토랜스(Thomas F. Torrance)를 위시하여 그의 형제, 아들, 조카, 사위, 손자 등이 조직신학 분야를 장악했던 시절이 있었고 아직도 그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혈연에 의한 가업의 계승은 일관성이 있어 보이는 장점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차세대로 이어지면서 혈연관계 외에 객관적인 능력에 대한 검증이 간과되기 때문에, 영향력과 명성은 당연히 경감되고 가문의 총체적 유산도 지키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런 영국과 미국의 경향으로 볼 때, 한국에서는 사역의 ‘계승’이라는 개념보다 대개 ‘세습’으로 간주되어 사회와 교계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문제’가 되지만, 특히 미국에서는 세습이든 계승이든 ‘문제’가 안된다. 미국에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유산 즉 때문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자녀들도 아버지가 남긴 유산 문제로 오랫동안 법정 다툼을 벌여왔다. ‘적극적인 사고’를 외치며 메가처치를 이루었던 로버트 슐러(Robert Harold Schuller) 목사의 가문도 아버지가 이룬 ‘수정교회’를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고 ‘세습’의 폐해를 남긴 채 아예 사라졌다.

필자는 수정교회가 건재할 때 로버트 슐러 목사가 인도하는 예배도 참석해 보았고,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한 후에도 방문했었는데, 아들이 인도하는 예배를 보면서 교회사가의 감각(Historical Sense)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뇌리를 스쳐 간 생각은 곧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로목사는 아들인 담임목사를 해임하고 딸을 그 자리에 앉혔다. 당시 수정교회는 족벌 기업의 전형적인 형태를 유지하며 사돈의 팔촌까지 여기저기 포진하여 망해가는 교회에서 이전투구에 정신이 없었다. 결국 교회가 파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로 팔려 버렸지만 로버트 슐러의 친인척들은 이런 와중에서도 거금을 챙김으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사실 이 무렵에 미국은 2005년 이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금융 사기를 필두로 세계 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은 미국발 경제 위기, 그 이후 연쇄적으로 일어난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인들, 특히 미국의 주류인 백인들의 ‘도덕적 해이’가 도를 넘었고, 신용사회의 근간도 위태하게 흔들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목회자나 사역자를 비롯하여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자본주의의 ‘정신’은 변질되어 희미해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바라볼 때,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3대에 걸친 사역의 계승이라기보다는 위험천만한 세습구도가 심히 우려되는 것이다. 필자는 현재 대표인 프랭클린 그래함과 그의 아들 윌 그래함이 전도협회에서 물러나고 ‘사마리아인의 지갑’이라는 구호단체의 사역에만 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바램이 가능하다면, 그들의 퇴진 전후에 빌리 그래함 목사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와 견줄만한 인물을 발굴하여 전도협회의 본질적인 사역을 이끌도록 하는 결단만이 이미 세계적인 기독교의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된 이 기관의 장래를 밝게 할 수 있음이다.

3) 국제적인 기관에 걸맞게 재정적인 투명성이 제고되어야 한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는 2019년 12월 기준으로 약 6,000억 원에 달하는 총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빌리 그래함이 남긴 재산도 약 300억에 육박하였고, 매년 헌금이나 기부금 수입도 천문학적이라 총자산의 규모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2016년까지는 미 국세청의 기준으로 ‘교회’가 아닌 ‘비영리기관’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매년 세금양식(IRS Form 990)에 의거하여 정확하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도협회는 세금보고를 위해 필요 이상의 인력과 비용이 지출된다는 구실로 미 국세청에 전도협회의 세법상 분류를 ‘비영리단체’가 아닌 ‘교회’로 변경해 달라고 신청하여 2016년에 승인을 받았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왜냐하면 전도협회가 ‘교회’로 분류되면 세금보고를 면제받고 프랭클린 그래함을 포함한 고위직들의 연봉을 공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런 합법적인 꼼수의 맛을 본 프랭클린 그래함이 자신이 대표로 있는 ‘사마리아인의 지갑’도 세법상 ‘교회’로 재분류해 달라고 미 국세청에 청원하여 승인을 받았다. 전도협회도 수입의 대부분을 헌금이나 기부금으로 충당하는데 고위직들의 높은 연봉이 공개되면 후원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고 이는 곧 수입의 감소로 이어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전도협회는 2014년에 프랭클린 그래함의 고액 연봉이 공개되면서 전방위적인 비판과 질타를 받은 바 있다. 당시 프랭클린은 ‘사마리아인의 지갑’과 전도협회를 합해서 약 13억 정도의 연봉을 받았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헌금한 후원자들에게는 대단히 큰 실망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비판에 직면한 프랭클린 그래함이 전도협회의 연봉은 받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정확히 1년 동안만 받지 않았고 여론이 잠잠해지자 매년 고액의 연봉을 빼지 않고 챙겼다. 이제는 세법상 ‘교회’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프랭클린 그래함이 전도협회와 ‘사마리아인의 지갑’ 두 곳 모두로부터 받는 연봉을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 이 돈만 생각한다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현 대표인 프랭클린 그래함이나 부대표인 그의 아들 윌 그래함이 퇴진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필자는 프랭클린과 윌 그래함이 전 세계 기독교의 대의를 위해 용단을 내리고 퇴진하기를 재차 간곡히 촉구하는 바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필자는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가 회계 보고를 함에 있어서 더욱 정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019년 12월까지 결산한 해당 연도의 회계보고서에서 전도협회는 일반경비와 행정 비용이 10.7퍼센트, 홍보 비용이 6퍼센트,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사역 경비가 83.3 퍼센트라고 공시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후원금의 대부분을 전도협회의 순수 사역비로 사용하는 것처럼 홍보한다. 하지만 세부적인 내역을 들여다보면 직접적인 사역 경비의 절반 이상이 인건비로 지출됨으로 전도협회의 순수 사역비는 전체의 4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진다. 2016년 이후 전도협회가 세법상 ‘교회’로 분류되어 세금보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프랭클린 그래함을 포함한 고위직들이 얼마를 챙겨가는지 알 수가 없다.
 

‘부흥’은 짧고 ‘침체’는 길다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루 릿지 산맥에 위치한 빌리 그래함 훈련원에 가면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기념교회와 그 주변을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 탐방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필자가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미국과 세계 곳곳에서 온 방문자들이 그룹을 지어 자신들의 투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대다수의 방문자들이 과거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노년 세대라는 것이다. 그들은 빌리 그래함과 더불어 기독교의 ‘부흥’과 전성기를 경험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추억’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헐리우드 영화의 ‘슈퍼맨’이나 ‘람보’처럼, 미국의 영웅주의(American Heroism)에 열광하는 대중들은 항상 영웅을 만들어 왔고, 끊임없이 영웅을 찾으며, 영웅을 기다린다. ‘추억’으로 남겨진 ‘영웅’인 빌리 그래함 목사가 이룩한 빛나는 업적들은 ‘부흥’의 시대와 조화를 이루면서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창출하였다.

반면에 그의 삶과 사역에 깔려있던 어둠의 그림자는 ‘침체’의 시대와 맞물려 위험한 기로에 서 있다.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빌리 그래함과 견줄만한 차세대 ‘영웅’을 찾아볼 수 없는 세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시대가 요구하는 영웅보다는 ‘혈연’, ‘특권’, ‘술수’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세습’ 내지 ‘야망’을 이룬 함량 미달의 무자격자들 또는 가짜들이나, 성경에 뿌리를 두지 않은 ‘근본 없는 허상’들로 말미암아 침체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흐르는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침체의 긴 터널을 헤쳐나왔던 무명의 영웅(Unsung Heroes)들이 항상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헌신하는 진정한 영웅들로 인하여 우리도 소망을 가지고 희망찬 새 시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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