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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불안과 고통을 넘어서

기사승인 2020.07.13  13: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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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12)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 김정훈 교수

교회의 통일성(엡 4:1-6)
누가 “당신들은 어떻게 ‘교회’라는 집단이 되었나요?”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개척자 이름과 설립 예배 날짜, 참석자 명단, 소속 교단, 그리고 지금까지의 교인통계, 교회조직, 교회연혁 등을 말하면 될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바울이 1-3장에서 가르친 내용 일부만 상기해도 훌륭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을 발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주와 인간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 그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1:4).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신 것이다. 그는 만물통일(엡 1:9-10), 즉 인간의 타락과 함께 훼손된 피조세계를, 창세 때부터 품고 계셨던 뜻을 따라 조화와 질서, 아름다움, 생명으로 가득한 세계로 회복시키시고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는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비밀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용해되어 종말론적인 ‘한 새 사람’ 곧 제3의 인격체로 새로 태어났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 공동체’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교회의 구성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의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자들이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가 자신의 영적 신분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신의 신분을 삶으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앵무새처럼 교회론적 원리만 되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그것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는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1절). 바울은 옥에 갇혀 참담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신자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합당하게”(악시오스)는 “균형을 맞추어 대등하게”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고백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반동강이가 나 있는 시소(seesaw)와 같다.

   
 

바울이 제안하는 교회의 실천적 삶이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다(3절 하). “하나”는 교회론적 표현으로(비교. 엡 2:14) 교회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성령께서는 이미 교회를 하나로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라는 용광로 속에서 이들을 교회 공동체로 재탄생 시키실 때, 성령께서는 그들을 녹여서 새롭게 빚어내는 역할을 하셨다. 성령께서는 평안”(에이레네, 평화)을 끈으로 삼아 물과 기름 같은 이 두 집단을 단단히 묶어 놓으셨다. 바울은 결코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2:14-18에서 (1)그리스도의 화평의 사역을 통해 교회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만드신 사실과 (2)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한 성령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교회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이,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흑인과 백인이, 문명인과 비문명인이,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평화의 띠로 그들을 결속시켰기 때문이다. 교회가 통일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세속적 이해관계를 따라 분열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상실한 것과 같다. “힘써 지키라”라는 말은 강한 의지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라는 뜻이다. 의지의 시동도 걸지 않고, 땀을 흘려 일할 생각도 없이 입바른 소리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셔, 걱정할 것 없어”라고 한다면, 이것은 믿음도 아니고 상식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할 의지가 없다는 말이나 같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눈여겨보신다. 의지의 행사가 누락된 믿음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 곧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바울은 2절에서 두 개의 메타-구(句)를 사용하여 두 묶음의 비결을 제시한다: (1)“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2)“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교회는 어떻게 해야 아름다움의 신비를 간직한 “하나 됨”이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 갈 수 있을 것인가?

첫째, 겸손과 온유로 행하는 것이다. 이 덕목들은 주께서 자신의 성품을 언급하실 때 직접 사용하셨던 개념들이다(마 11:29). “겸손”(타페이노프로쉬네)은 본래 “비굴”을 뜻하는 경멸적 용어였으나, 후에는 “거만”과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용어 즉 기독교적 미덕을 뜻하는 단어로 변용되었다. 예수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라고 말씀하셨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하늘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어 온갖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비하되셨다(빌 2:5-8; 참조. 엡 4:9; 벧전 3:19). 예수께서 공생애 마지막에 가야바의 법정에서 신문을 당하실 때 군중들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하고, 주먹으로 치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하였다. 무죄하신 메시아가 죄인들에게 치욕을 당하시는 광경이다. 어리석고, 무지하고, 철없는 군중들은 권력자들이 주도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예수를 모독하였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예언을 해 보라. 너를 때린 자가 누구냐?”(마 26:57-68). 하지만, 겸손의 역설을 관조해 보라. 그리스도는 결국 온갖 모욕을 참으시고 십자가의 승리와 승귀의 영광에 이르셨다. “겸손”은 보통 당사자에게 치욕감과 모멸감을 안겨주고 비하의 맨 밑바닥으로 끌어내리지만, 도리어 그를 더욱 강화시켜 주고 결국엔 모든 상황을 반전시켜 그에게 승리의 열매를 거두게 해준다. 이 겸손의 유익을 가장 잘 체득한 인물들 중의 하나는 바울이다. 그는 만유의 통치권자인 그리스도의 특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세상 밑바닥에 처해야 했고, 하늘의 천사들과 땅 위의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으며, 기아와 갈증과 헐벗음과 억울한 매를 감수해야 했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고, 끝없이 수고의 고통을 견뎌야 했고, 직접 손으로 일을 해야 생존할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심한 고생을 했는지 자신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적으로 어리석게 될 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게 되고, 약하게 될 때 그들이 강하게 되고, 비천하게 될 때 그들이 존귀케 되는 것을 보았다(고전 4:9-13). 사실 그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희열을 느끼며 강력한 영적 권세를 누리는 자였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 중에 10명의 보고를 더 신뢰하고 이제라도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조직적으로 자신을 반역하는 지휘관들과 이들을 따르는 군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지 않았던가?(민 14:4-5). 결국 그는 반역자들의 집단 반발을 잠재우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계속 가나안을 향해 진군할 수 있었다. 겸손히 행하다가 모멸을 당할 때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의 결말을 생각하며 참고 이겨내라. 모세와 바울 같은 인물들을 모델로 삼아 아무리 치욕적인 수모라도 끝까지 참고 자신의 몫을 감당하라.

온유”(프라우테스)온순, 친절, 부드러움, 관용을 뜻한다. 예수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강압하거나 거칠게 다루신 적이 없다. 조직을 동원하여 물리적 힘을 가하거나, 공포 분위기를 띄우고 폭언을 쏟아 내거나, 상대방을 제압하고 무릎을 꿇게 하거나, 직위에서 끌어내려 망신을 주려 하거나, 밥줄을 끊을 것처럼 엄포를 놓거나 하신 적이 없다. 그가 아무리 혁명적 설교로 유대인들을 당혹케 하셨을지라도 그는 항상 친절과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셨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의 성품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았다(참조. 고후 10:1). 온유는 그리스도인의 한 중요한 덕목이다(참조. 갈 6:1-2; 딤전 6:11; 벧전 3:4). 그것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이기도 하다(갈 5:23). 친절과 부드러움은 상대방으로 존중감을 느끼게 하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은 적당히 거만하게 행동하고, 적당히 거칠게 행동하는 것이 일하기 편하고, 자기의 뜻을 관철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강포(强暴)를 오랜 군생활 경력이나 태생적 과격성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이 조폭 출신인 것, 중범죄로 감옥에 갔다 온 것을 자랑하듯이 말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자신의 오만과 독선, 폭력적 언행을 마치 자신만 보유하고 있는 어떤 자격증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려는 술수에 불과하다. 강포한 성격은 믿는 자들이 나타내야 할 기독교적 성품과 거리가 멀다.

둘째, 오래 참는 것이다.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2절 하). 오래 참음은 분노를 한 두 번 꾹꾹 누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화가 꼭지점을 찍고 인내가 바닥을 쳐도,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와 성숙을 기대하며 문자 그대로 끝까지 참는 것을 뜻한다. 오래 참음의 미덕이 지배하지 않는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는 건강한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좋은 싹을 틔울 수 없다. 그런 공동체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며 이리저리 표류하다 암초에 부딪혀 난파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는 말은 끝까지 참고 인내하셨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바울이 말하는 오래 참음은 사랑과 거의 같은 말이다. 그러기에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는 말이 뒤따라 나오는 것이다. 사실 이 구절은 앞에서 언급한 “겸손과 온유”와도 관련되며 동시에 방금 전 언급한 “오래 참음”과 직결된 내용이다. 사랑 가운데 상호 용납함 없이는 “겸손과 온유”는 물론 “오래 참음”은 더욱 더 불가능하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장 배경과 성격, 기질, 인격 형성 과정, 믿음의 분량, 성숙도, 감성지수, 인지능력 등이 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근거로 서로를 현상태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지 않으면 오래 참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란 대형 건축물을 짓는 것과 같아서 오래 참음이 없이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며 오래 참고 기다릴 때 최후 완성을 기약할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관용은 교회 공동체의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바울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절)라고 당부한 것과 관련하여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결정적 근거들을 7가지로 제시한다(4-6절).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교회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첫째, 교회란 한 몸”-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진 유기적 통합체다. 바울은 1장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1:22)이라고 정의하였고, 2장에서는 교회를 “둘”이 “한 몸”이 된 실체라고 말하였다. 몸을 가진 인간이 분해되면 유기체로서의 본질과 생명을 상실하듯이 “한 몸”으로서의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한다면 교회는 와해 되고 생명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유기체로서의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몸의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각 제 기능을 할 때(4:16) 생명이 유지되고 성장하고 전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처럼, 성도 각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교회가 생명력과 통일성을 유지하고 세워져 가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둘째, 교회란 한 성령”-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신비 공동체다. 사람의 몸에 한 영혼이 있어야 하듯이, “한 몸”으로서의 교회 안에는 “한 성령”이 계시다. 바울이 4절에서 등위접속사 “그리고”(카이)를 이용하여 “한 몸”과 “한 성령”을 병치시켜(헨 소마 카이 헨 프뉴마) 단위화한 것은 “한 몸”으로서의 교회 안에 “한 성령”이 역사(役事)하실 때 교회가 정상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의도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 두 개념의 조합은 그리스 문화권 속에 살던 1세기 수신자들이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소아시아에는 영혼의 육적 비하(the soul’s bodily incarnation)를 가르치는 희랍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당시의 이분법적 인간 이해를 자신의 복음적 목적에 맞게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결코 플라톤적,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수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신령한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이 들어와 활동하게 되면 성도는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사탄이든, 사탄의 참모이든, 그들의 졸개(귀신)이든, 악한 영이 교묘히 천사처럼 가장하고 교회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 성령의 사람들은 영적 불안과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지배를 받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교회란 한 소망”-공동체이다. 교회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성취라고 하는 일치된 기대 가운데 역사의 최후 지점(대종말)을 향해 전진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다. “한 소망”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관련된 개념으로(비교. 엡 1:18; 4:1), 그 부르심의 대상인 성도 공동체(교회)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소망을 품고 사명감으로 오늘을 살며, 또한 미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주의 재림과 함께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며 살아야 한다.

넷째, 교회란 한 주”-공동체이다. 교회는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심을 받으신, 만유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의 통치자로 모시고 사는 그의 백성 공동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에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에게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은 다윗의 예언의 성취라고 역설하였다(행 2:34-36; 참조. 시 110:1). 그리스도는 소왕국의 왕이 아니라, 만유 위에 뛰어나신 온 우주의 주권자이시다. 그는 부활·승귀를 통해 만물 위에 뛰어나신 최고 통치권자가 되신 분이시다(엡 1:22). 교회는 바로 이분을 자신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그의 백성 공동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땅히 천지만물의 총사령관이신 그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 교회는 한순간도 그분이 교회의 머리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위에 인간을 머리로 올려놓는 것보다 위험한 행위는 없다.

다섯째, 교회란 한 믿음”-공동체이다. 교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신앙공동체다. 교회는 “예수는 주(主)시라”(고전 12:3)고 하는 신앙고백 위에 서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믿는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천하 사람 중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선언한다(행 4:12).

여섯째, 교회란 한 세례”-공동체이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 “하나”를 이룬 세례적 통합체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교회는 세례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공적으로 선언한다. 바울은 “세례”를 언급할 때 항상 성령세례를 상징하는 물세례 의식과 그것의 의미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한다. 초기 교회는 물세례 의식을 통해 수세자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을 공적으로 인정하였다. 곧, 성령의 역사로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과 교회의 정식 멤버가 된 것을 공적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의 죽으심과 사심에 연합하는 것을 뜻한다. 세례는 영적으로 수세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함께 옛사람이 죽고, 그의 부활과 함께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엡 4:22-24; 참조. 갈 5:24). 교회는 바로 이러한 의미의 세례적 통합 공동체다.

일곱째, 한 하나님”-공동체이다. 교회는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다(참조. 엡 1:4; 비교. 행 14:15하). 그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선택/예정하신 분이시다. 그는 때가 찬 시점에(엡 1:9; 갈 4:4)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분이시다(엡 1:7).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시고(롬 5:8)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또한 그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오순절 날 약속의 성령을 폭포수와 같이 부어주시고(욜 2:28-29; 비교. 겔 36:26-27) 신약교회를 탄생시키심으로 만물통일의 의지를 계시하신 분이시다(참조. 엡 1:9-10). 또한 그는 믿는 자들을 성령으로 인(印)치시어 그들이 자신의 소유된 백성인 것과 당신의 나라의 상속권자들임을 확인해 주신 분이시다. 또한 그는 승귀의 그리스도를 교회에 주시어 교회로 그의 몸과 같게 하신 분이시다(엡 1:22). 바울은 “(그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통일하시고’는 원문을 보면 “관통해 계시고”이다)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엡 4:6) 하나님이 만물통일을 성취하시기 위한 최적의 절대 주권자이심을 암시한다.

교회가 가진 가장 숭고한 과제 중의 하나는 자신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저울대에 추(錘)만 걸려있고 저울쟁반이 없으면 무익한 것처럼, 교회가 교리에만 집착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 기반인 “하나 됨”을 지켜나갈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자신이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님,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일곱 겹의 토대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통일성을 실현하기 위해 교리의 추 맞은편의 저울쟁반 위에 사랑과 관용에서 나오는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의 실천 덕목들을 올려놓아야 한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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