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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항구

기사승인 2020.08.10  10:5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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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16)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 김정훈 교수

새 사람의 기본윤리(엡 4:25-5:2)

바울은 믿는 자가 “새 사람”으로서 교회 안팎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 교훈을 준다. 본문 중 일부는 특별히 교회 공동체를 염두에 둔 내용으로 보이나, 그 나머지는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한 내용들이다. 아마도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 밖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윤리적 기준을 갖고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가장 요긴한 것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호제창이나 신앙적 분위기, 또는 기독교적 관습이나 문화만 있고 그것들 속을 윤리적 실천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할 것이다. 바울신학에서 믿음과 순종은 결코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참조. 롬 1:5; 16:26). 믿는 자의 실천은 그가 참 믿음의 소유자인지 결정하는 가늠자와 같다. 참 믿음이 있다면, 믿음은 너무도 역동적인 것이어서 그 속에 응축된 에너지는 윤리적 실천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죄를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롬 5:8). 그럼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윤리적 명령들을 한 가지씩 살펴보자.

첫째,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가 되라(25).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지체로서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 곧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슥 8:16).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낡은 옷을 벗듯이 거짓을 벗어 버려야 한다. “거짓을 버리고”에서 “버리고”의 원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에서 “벗어 버리고”의 원어와 동일하다(아포티쎄미). 거짓은 옷과 같아서 인간을 아름답게 꾸며줄 것처럼 유혹한다. 그러나 거짓의 아비는 사탄이기에(요 8:44), 거짓을 입고 있다가는 반드시 참혹한 결과에 이르게 되어 있다. 사탄은 천하를 다 줄 것같이 현혹해도 결국은 상대의 목을 틀어쥐고는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흑암의 구덩이로 던져 버린다. 믿는 자가 진리를 말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거짓을 버리는 것이 필수다.

   
 

“거짓”은 에베소 지역을 떠돌던 이단의 거짓 교훈들을 염두에 둔 개념일 것이다(참조. 엡 4:14). 반면 “참된 것”(알레데이아)은 사도들이 전한 예수의 복음 진리를 가리키는 개념일 것이다(엡 4:21). 이런 이해가 타당한 것은 바울이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라는 자신의 당부의 이유를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교훈하고자 하는 것은 믿는 자들이 교회론적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참조. 엡 2:13-22; 3:6; 4:1-3) 서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계속 교회론의 범주 안에서

자신의 당부를 이어가고 있다. 교회 안에서 누가 이단 사설을 퍼뜨리면 얼마나 전염성이 강한가? 목회자는 교회에서 이단이 침투한 흔적이 보이거나 이단 사설에 감염된 된 자가 보이면 즉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누룩처럼 급속히 퍼져 교회를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짓은 남을 기만하는 거짓말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누가 음해성 거짓말을 꾸며내거나 성도 사이를 이간하는 말을 하면 교회가 영적으로 얼마나 큰 타격을 입게 되는가?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대리자인 뱀이 아담을 미혹할 때 사용한 도구는 거짓말이었다. “말”은 언제나 듣는 자의 귓속으로 들어가 그의 의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지체들끼리 거짓말을 한다면, 그 몸은 심각하게 상해를 입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언어생활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야고보는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않고 마음을 속인다면 그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교훈한다(약 1:26). 또 그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단언한다(약 3:2).

둘째, 감정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라(26-27).
믿는 자는 자기의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시 4:4)는 사람이 분을 내게 되면 죄를 짓기 쉬운데 그렇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이다. 잠언서 기자는 말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는 이와 유사하게,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라고도 교훈한다. 감정은 마음의 세계의 한 큰 부분이다. 자기의 감정 통제를 잘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마음에 감정의 파문이 일어날 때 마음의 노(櫓)를 힘 있게 움켜쥐어야 한다. 노없이 그 마음이 어디로 표류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당사자를 범죄의 항구로 끌고 간다. 폭언이나 폭행은 분노의 표출 행위다. 믿는 자가 과격한 언행을 자제하려면 자신의 마음을 성령께 맡겨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가장 안정되고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는 분노를 길게 끌고 가지 말라는 뜻이다. 분을 오래 품고 있으면 노기(怒氣)가 점점 증폭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때는 그것이 악이 지피는 불인지 성령께서 지피시는 불인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악이 일으킨 것이면 신속히 멈추어야 하고, 성령께서 일으키신 것이면 거룩한 분노(또는 의분)를 나타낼 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독선과 위선의 철갑을 두른 유대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치시며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고(마 23:33), 성전 안에서 짐승들을 파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셨으며(요 2:15),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고 호통치셨다(요 2:16). 바울은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온 거리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과 장터에서 사람들과 토론을 벌인 일이 있다(행 17:16-17).

아무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분노는 수류탄과 같아서 마음의 성채(城寨)를 파괴하고 여기저기에 틈을 낸다고 하는 것이다. 마귀는 쉬지 않고 믿는 자의 주변을 맴돌며 틈새를 찾는다. 마귀는 항상 마음의 성을 무너뜨리고 침투할 기회를 노린다.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분노는 악감으로부터 분출하는 증오심이다. 마귀는 이런 최악의 감정을 품은 사람의 내면에 파고들어 그의 마음을 장악한다. 최악의 경우, 마귀는 그 사람의 감정조절 장치에 장애를 일으켜 병적 상태가 되도록 만든다.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마귀에게는 틈도 활짝 열린 대문과 같다. 베드로는 이렇게 명령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후 5:8-9a). 마귀에게 사로잡힌 영혼은 불행과 파멸의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다.

셋째, 남의 것을 탈취하지 말라(28).
초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노예에서 풀려난 유대인들과 노예 신분의 이방인들이 상당수 있었다(참조. 몬 18). 이들 가운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노예들이 흔히 보여주었던 도둑질 근성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다소 있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의 관습을 염두에 두고 믿는 자는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고 교훈한다. 다른 사람이 땀 흘려 일군 것을 빼앗거나, 다른 사람의 수고의 결과물을 가로채거나, 다른 사람의 몫을 착취하거나, 공적 재정을 횡령하는 행위는 노예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참 자유인이 아니다(참조. 요 8:32).

그리스도인으로서 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룟 유다같이 되지 않기 위해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고 회계 역할을 하던 중에 좀도둑처럼 돈을 슬슬 빼내곤 하다가(요 12:6) 마지막에는 자기 선생 예수를 은 30에 유대인들에게 팔아넘기지 않았던가(마 26:15).

세상에는 합법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남의 것을 강탈하여 자기의 배를 불리는 도둑들이 수없이 많다. 이런 강탈 행위가 난무하는 사회는 그 구성원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마음에 분노를 쌓게 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가 쌓이게 되면, 결국 그 분노는 폭약이 되어 파괴적 행동을 분출시키게 되어 있다. 믿는 자는 온갖 농간을 부려 횡령과 사기를 일삼는 도둑들의 수(數)를 줄이기 위해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도둑질의 뿌리는 이기심에 있다. 교회의 지도자는 사람들이 이기심을 버리고 빈궁한 자를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도록 설복하며 그러한 실천을 위해 자신의 손으로 선한 일을 찾아 수고의 땀을 흘릴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28 ; 참조. 고전 4:12; 살전 2:9). 믿는 자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적극적 관심과 실천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친 후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건너간 것은 핍절한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 지역 교회들로부터 모금한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믿는 자는 자신의 수고의 성과물을 가지고 사는 것을 철칙(鐵則)으로 삼아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것을 탈취하지 않는 정직성을 갖고 살아야 한다. 단, 그는 자신의 것을 악한 자들에게 탈취당하지 않는 지혜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신 몫은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태도가 혹여 가난한 자들을 보고도 긍휼히 여길 줄 모르는 인색함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넷째, 더러운 언어를 거부하라(29).
믿는 자는 정결한 언어 사용과 선한 말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을 습관화해야 한다. 믿는 자는 더러운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더러운 말은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의 영혼을 오염시킨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15:18-19). 이런 것들은 사람을 더럽게 한다(마 15:18, 20). 1세기의 불경건한 사회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부도덕하고 추잡한 담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언어환경을 거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믿는 자는 그 어떤 더러운 말도 입 밖으로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자는 성도를 세워 주는 선한 말,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한다. 믿는 자는 상대방을 비난하여 낙담시키거나 깎아내리는 말 대신 용기와 소망을 주는 말로 듣는 사람의 심령에 은혜를 끼쳐야 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 4:6 상)라고 권면한다. 이러한 화법은 허탄한 말로써 듣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상황에 적절한 언어는 예술적 아름다움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다섯째,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라(30).
믿는 자는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성령의 인침을 받고 그분 안에서 구속의 완성의 날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는 전적으로 성령께 의존된 존재다. 성령이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거도 없고, 하나님 나라 상속의 보장도 없다. 성령께서 붙잡아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임할 궁극적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용기 있게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결코 성령을 근심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거짓되거나, 증오심을 품거나, 탐욕스런 마음을 품거나, 더러운 언어로 우리 영혼을 더럽힌다면 성령께서는 근심할 것이다. 한 마디로,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것은 성령께 대한 배은망덕일 뿐 아니라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가해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종말이 올 때까지 마귀가 여전히 세상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마귀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에베소서에서 “마귀”(디아볼로스)를 직접 언급하는 곳은 4:27과 6:11 두 곳이다. 다른 곳에서는 마귀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2:1), “악한 자”(6:12)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여러 본문은 마귀가 자기 휘하에 측근들을 거느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1:21), “통치자들과 권세들”(3:10),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6:12)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악령의 세력들은 언제나 믿는 자와 교회를 파멸시킬 목적으로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마귀의 활동을 저지하는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다. 에베소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성령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성령으로 인(印)치시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며 (1:13; 참조. 4:30), 그들의 천국 유업 상속을 보증해 주신다(1:14).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지체들인 성도 안에 거하시며, 그들로 자기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신다(2:18). 또한 성령은 믿는 자들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시며(2:22),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은밀한 구원의 계시를 받을 때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다(3:5).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교회) 안에 거하는 참된 영(靈)으로서 성도들을 화평의 줄로 매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4:3).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성령을 근심되게 해서는 안된다(4:30). 이를 위해 우리는 그의 충만한 임재를 간구해야 하며(5:18), 사탄의 세력들(6:11-12, 16)을 물리치기 위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6:17).

여섯째, 악행을 버리고 공동체의 화목을 도모하는 덕성들을 실천하라(31-32)
믿는 자가 교회든 사회든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화목을 증진시키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본문은 우리에게 모든 악감(惡感)의 표출을 삼가고 그것들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한다고 교훈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 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31절). 여기서 “버리고”의 원어(아이로)는 “들다. 제거하다”라는 뜻이다. 즉 모든 악덕들을 통째로 들어 올려 치워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악독”은 격한 분노와 증오심을, “노함”은 분노의 폭발을, “분냄”은 화의 분출을, “떠드는 것”은 고함치는 것을, “비방하는 것”은 모욕적 언사로 욕설하는 것을 말한다. 이 모든 악덕은 교회 안에서 성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성도의 교제를 훼손하며, 교회의 거룩한 일체성을 깨뜨린다. 바울은 이런 모든 행위를 모든 “악의”와 함께 제거해 버리라고 권면한다. “악의”는 마음의 악한 의도나 성향을 의미한다. 믿는 자가 이런 성향을 스스로 제거하지 않으면 그는 “새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도 원하지 않는 악덕들을 자행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확신과 소망에 찬 믿음 생활의 즐거움이란 기대할 수 없다.

믿는 자가 공동체의 화목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취해야 할 덕성들이 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32절). 불친절과 냉담, 불관용은 화목을 저해하는 행동들이다. “친절”은 상대방에 대해 인자한 마음을 갖는 것을 뜻한다. 인자한 마음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영접하고 얼굴과 언어와 행동으로 친절을 나타낸다. “불쌍히 여김”은 인간으로서 연민(憐愍)의 정을 갖고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는 것을 뜻한다. 이는 무자비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믿는 자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자비로운 마음,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용서”는 상대방의 과오에 대해 처벌하거나 보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여, 나를 모욕하고 해를 끼친 자를 복수와 응징의 사슬에서 마음으로부터 풀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왕에게서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1만 달라트의 1/600,000) 빚진 동료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둔 것처럼 무자비하게 행동하는가(마 18:23-35). 새 사람의 모습은 상호 친절과 불쌍히 여김, 용서로 나타나야 한다. 성도들이 이러한 덕성들을 실천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든든히 서가며, 사람들을 어머니처럼 품을 수 있다.

일곱째, 사랑의 실천을 위해 힘써라(5:1-2).
믿는 자는 하나님을 본받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5:1-2).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는 사랑을 배우고 깨달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라는 뜻이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의 자녀들이다. 사랑을 많이 받아 본 사람은 사랑을 느끼고 배웠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한 사람이다. 수 개념을 알아야 덧셈 뺄셈을 할 수 있듯이, 사랑도 배워야 실천할 수 있다. 믿는 자들은 사랑의 원형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배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최선의 방식으로 사랑을 받고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배운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성령의 내적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이시다. 믿는 자가 하나님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 행위는 믿음의 진정성의 표징이 될 것이다.

믿는 자에게 사랑의 실천 모델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기 위해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프로스포라. 나는 “헌물”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한다)과 “희생제물”(쒸시아)로 하나님께 드리셨다(참조. 출 29:18, 25, 41).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적 성격은 5:25에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한 자연인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구약시대 희생 제사의 성취이며 완성이다(히 9:23-26; 10:1-14).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적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매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물과 같이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한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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