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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을 받는 네 가지 방법

기사승인 2020.08.24  14: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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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18)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 대표

   
▲ 김정훈 교수

새 사람이 추구해야 할 실천적 삶(엡 5:15-21)

바울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새 사람"으로서 교회 공동체와 세상 안에서 어떤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교훈하였다(5-14절). 그는 수신자들이 한 사람의 성도로서, 또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어떤 실천원리를 가지고 행동해야 할 것인지 포괄적인 교훈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수신자들이 믿는 자들인 점을 염두에 두고 주로 교회론적 관점에서 윤리적 교훈을 주었다. 본문 역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의 삶에 대해 더 집중하고 있다. 사실 교회 내에서의 리적 행동을 사회생활에 적용시킨다면 그것 이상의 윤리적 행동은 없을 것이다. 본문은 어떤 의미에서 앞에서 언급한 윤리적 진술들의 결론부라고 할 수 있다. 도입어 "그런즉"이 이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 접속어는 앞의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암시를 줄 뿐 아니라 또한 결론적 진술이라는 암시도 준다.

본문의 원문은 전체적으로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고(15-16, 17, 18-21절), 문법적으로 다섯 개의 명령어(15절, 블레페테; 17절, 기네스데, 쉬니에테; 18절, 메뒤스케스데, 플레루스데)와 여섯 개의 분사(16절, 엑사고라조메노이; 19절, 라룬테스, 아돈테스, 프사론테스; 20절, 유카리스툰테스; 21절, 휘포타쏘메노이)를 포함하고 있다. 더구나 분사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명령적 의미를 가진 것들이어서 그것들이 이끄는 어구들을 별도의 명령형 문장처럼 이해해도 무방하다, 뿐만 아니라 분사의 특성상 주문장과의 연계성을 생각하면, 분문을 명쾌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보다 정확한 본문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원문을 직역해 본다.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혜 없는 자들과 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들과 같이 어떻게 행할 것을 주의 깊게 살피라.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17 이를 위해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고 오히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18 또 여러분은 포도주에 취하지 말라. 그 안에는 방탕함이 있느니라. 도리어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고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며,
20 모든 일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

이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15-17절, (2) 18-21절. 15-17을 한 묶음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원문에서 "세월을 아끼라"(16절 상; 비교. 골 4:5)가 15절과 관련된 분사구문으로 되어 있고,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고"(17절)는 내용상 15절의 "지혜 없는 자들과 같이 말고"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18-21절을 한 묶음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네 절이 전체로서 한 문장이며 19-21에 나오는 5개의 분사가 모두 18절 내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구조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는 본문이 새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 이 추구해야 할 삶이 무엇인지 크게 두 가지 지침을 주고 있다고 본다.

   
 

, 지혜 없는 자가 아니라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살라. 바울은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본다. 세상에는 지혜 없는 자가 있고 지혜 있는 자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 없는 어리석은 자는 평생을 티끌처럼 날려 버릴 수도 있다. 문자 그대로 헛되고 헛된 삶을 살다가 소멸될 수 없는 "존재"라는 무게를 짊어진 채 영원히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 바울은, 지혜로운 자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인생의 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지 의 깊게 살피라고 권면한다. "어떻게 행할 것을"에서 "행할"(페리파테오)이라는 말은 "걸어가다"라는 뜻이다. 인생은 먼 길을 가는 나그네와 같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벧전 2:11)라고 말문을 열며 독자들을 권면한다. 과연 내 안에는 나그네 의식이 있는 것인지, 나는 목적지를 향해 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지금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유심히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운 자의 행동이다. 사람이 이런 기본적인 질문조차 하지 않고 산다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삶은 물에 띄운 종이배가 바람의 흐름 따라 잠시 떠가다가 물에 젖은 채 가라앉는 것과 같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조상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들의 믿음의 특징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지내면서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다고 평가한다(히 11:16).

자기의 인생길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내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월을 아끼라"는 본래 분사구문으로서 앞의 내용(15절)과 연결시켜 이해하자면, "세월을 아끼면서(또는 아낌으로써)" 지혜로운 자의 삶의 길을 궁구하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지혜로운 자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세월을 아끼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이 단순히 허튼 시간을 보내지 말고 시간을 아껴 쓰라는 뜻이 아니라보다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타이론)은 "짧은 기간, 종말론적 기간, 시대, 연대, 시간"을 뜻하고, "아끼다"(엑사고라조)는 "해방시키다, 구원하다, 건지다"라는 뜻이다. "시간을 해방시킨다, 구원한다, 건진다"라는 말이 얼마나 이상하고 생소하게 들리는가? 하지만 "아, 시간이 무엇인가에 속박되어 노예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보자. "세월을 아끼라"에 이어서 나오는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우리의 논의에 빛을 준다. 여기서 "때"(하이 헤메라이)는 "날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매일의 날들이 악의 거센 흐름 속에 흘러가고 있는데 이렇게 악에 속박된 세월을 구출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내게 주어진 세월을 악한 일들로 채울 것이 아니라 선한 일들로 채우는 삶을 살라는 뜻이다. 바울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허물과 죄 가운데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으로(엡 2:1,5)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2:8)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롭게 지어주신 사건이라고 해석한 바가 있다(2:10). 종말론적 시대에 믿는 자들이 선한 일을 행하며 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월은 악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만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시간 안에는 선과 악의 대결이 있다. 이 대결은 매일 매 순간 우리 속에서 일어난다. 선한 일들로 채울 것인가, 악한 일들로 채울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세월을 선한 일들로 채우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가르친다.

그럼 믿는 자가 자기의 시간을 선으로 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귀뜸한다: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고 오히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17절). 악에 지배되어 떠내려가는 세월을 구출해 낼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바울은 1-3장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4-6장에서는 믿는 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권면적 문맥에서(5:17; 6:6) "주의 뜻"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사실 이 두 개념 간에는 의미상 특별한 차이가 없다 (Peter T. O'Brien, The Letter to the Ephesians,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ed. D.A. Carson[Grand Rapids: Eerdmans, 1999], 385).

바울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하나님의 뜻"(참조. 롬 12:2)이라는 용어를 여기서 "주의 뜻"(5:17)이라는 용어로 바꾸는 것은 이 용어가 속한 단위 본문(5:8-14)이 기독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주의 뜻은 개인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한다기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죄인들을 구원하신 그분의 뜻, 만물통일의 비밀, 교회의 정체성, 믿는 자들의 영적 신분과 그들의 정체성, 말씀 사역자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 등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진리들을 깨닫는 것이 "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다. 아무리 최신형 엔진을 장착한 기차라도 트렉을 벗어난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 1미터도 움직일 수 없다. 우리는 만물통일과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성취라고 하는 큰 틀 안에서 교회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지혜로운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권면하는 대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롬 12:2). 하지만 이것은 각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에 대해 무관심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에 대해서도 계획을 갖고 계시며 때로는 직접 간섭하시기도 하신다. 그는 우리의 눕는 것과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신 분이시다. 단,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성령 안에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 사이에는 역동적이고도 신비한 텐션(tension), 즉 긴장이 있다.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을 따라 순종의 종이 되고자 힘써야 한다. 믿는 자 개인이 "주의 뜻"을 찾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은 내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강한 열망(소원)이 역사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는 말씀에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강한 소원이 있다고 하여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소원이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그릇된 판단에서 나온, 지나가는 열풍 같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소원은 믿음과 성령 안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는 가운데 양심의 인정과 하나님의 재가, 내적 확신과 멈출 수 없는 열정의 증거, 성경의 인증, 사명감의 검증을 받은 것이어야 한다. 바울의 경우, 그는 제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에서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가 로마에까지 가고자 결심한 일이 있다(행 19:21; 비교. 고전 16:5). 이후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그의 결심이 진행되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자신이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을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라고 말하였다. 이 결심을 따라 결국 그가 배를 타고 두로에 당도했을 때 그곳에 있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행 21:3-4).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로 가서 빌립 집사의 집으로 갔다(행 21:8). 이때 그곳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지 말라고 강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였노라"(행 21:13)라고 응답하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체포당하고 가이사랴 감옥에 구금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완전한 헌신과 강한 열망으로 자신의 계획을 밀고 나갈 때 주께서 결국 그의 결심과 소원을 따라 그를 로마에까지 보내 주셨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강권하심을 따라 우리가 마음에 어떤 강한 열망을 품게 될 때, 이는 "주의 뜻"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야고보서의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3-17)라는 말씀 또한 믿는 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선한 일들로 채우며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며, 주께서는 개인의 삶에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둘째, 포도주에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라. 바울은 먼저 "포도주에 취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말로 교훈한다(원문에 명령문으로 되어 있음). 이 말은 포도주를 비난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것은 포도주에 취한 자의 그릇된 행위를 경계하는 말이다. 이 해석이 옳은 것은 관계대명사를 사용하여 "그 안에는 방탕함이 있느니라"라는 말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포도주에 중독되거나 폭주하는 습관은 방탕으로 유도되는 경우가 많다. 독한 술기운은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세계의 정상적 기능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윤리적 관념에도 영향을 미쳐 비상식적이고 부도덕한 행동을 유발하기 쉽다. 만취한 자가 방탕으로 전도(顚倒)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잠 20:1).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짓고 포도주에 취해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하체를 드러내고 퍼졌던 사건은 술의 위력과 술에 취한 자의 추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창 9:20-23). 하나님께서 나실인이 될 자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라]"(민 5:2-3)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이른 아침부터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 하면서(사 5:11, 22), 재판관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포도주와 독주에 취해 휘청거리며 비틀거리고 있다고 한탄한다(사 28:7).

바울은 이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라"라는 긍정적인 말로 독려한다. 술취함과 성령 충만의 대비는 수사학적 효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는 술취함의 이미지를 통해 성령 충만의 의미를 묘사하고자 하는 것 같다. 성령 충만은 마치 술을 마신 자가 술기운에 사로잡히는 것과 유사하다. 믿는 자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그분의 권능에 사로잡혀야 한다. 믿는 자가 지혜로운 자의 삶의 길을 가려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육신적 부패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믿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의 법을 지키며 살 수 있으려면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만 가능하다(참조. 8:1-9).

바울은 다섯 개의 분사구문을 사용하여 성령 충만의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 제시한다(19-21절). 19절의 세 개, 20절의 한 개, 21절, 한 개가 그것들이다. 이 가운데 19절의 세 개 중에 "노래하고"와 "찬송하며"는 함께 묶을 수 있는 내용이므로 나는 4개 항목으로 줄여서 해설하고자 한다. 그럼 바울이 제시하는 4가지 성령 충만의 비결이 무엇인가? (1)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고"(19절 상). 하나님을 다양한 노래들로 찬양하는 자는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다. "시"(詩, psalms, 프살모스)는 구약의 시편의 패턴을 따라 작곡된 송가 (頌歌)들을(신약 초기 교회는 구약 시대의 전통을 따라, 또는 당시 유대교의 예배 관례에 따라 현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시편 찬양을 하거나 찬송시로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찬미"(讚 美, hymns, 휨노스)는 보다 길게 작곡된 것들로서 부분적으로 신약에서 인용된 찬송들을(주로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하신 구원을 찬양하는 찬미곡을 가리킨다, 참조. 마 26:30; 막 14:26), "신령한 노래들"(spiritual songs, 오데프뉴 마티코스)은 성령의 영감(촉구하심)을 받아 자작한 단편곡들을 가리킨다(A.T. Lincoln, Ephesians, WBC 42[Dallas: Word Books, 1990], 345).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이러한 거룩한 노래들을 불러 서로 화답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서로 화답한다는 것은 거룩한 노래로 서로 신앙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발된 찬양단은 회중의 찬양을 리드함으로써 노래 곡조와 가사로써 성도 간에 신령한 대화를 잘 나눌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2)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며"(19절 하; 비교. 골 3:16-17). 하나님께 노래하고 찬송하는 자는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다. 바울은 앞의 세 단어 중 두 개를 뽑아 동사화하여 "노래하고 찬송하며"(아돈테스 카이 프살론테스)라고 말한다. 바로 앞에서 바울이 은연중에 찬양의 수평적 성격을 강조하였다면, 여기서는 찬양의 수직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찬양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제물과 같이 바쳐져야 한다. "마음으로 주께"가 바로 그런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라고 권면한다.

"마음으로"는 "지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다 합하여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라는 뜻이다. 주께 온 마음을 다해 찬양하는 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주를 향한 찬양은 그의 존귀하신 이름과 영원하신 능력과 높으신 권세에 대한 찬송이며, 신앙고백이며, 감사와 사랑의 고백이며, 간절한 기도이며, 성결을 위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3) "모든 일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20절).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선별적으로가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 이따금씩이 아니라 항상, 다른 이름으로가 아니라 반드시 우리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창조주이시며 구원의 설계자이시며 공급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행해져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감사의 고백은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4)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21절). 교회 공동체 내에서 서로 복종 하게 되면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복종은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며 높이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 간의 복종은 사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성도 간의 복종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경외함"의 헬라어(포보스)는 본래 "두려워함"이라는 뜻이다. 믿는 자는 부활 승천하시고 높이 되신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위치와 우주적 주 되심, 모든 영들 위에 뛰어나심, 엄위하신 심판주 되심, 만유의 통치권자 되심을 깊이 알아야 한다. 이 사실들을 인식할 때 믿는 자는 비로소 거룩한 두려움으로 그를 경외할 수 있다. 성도가 그리스도께 대한 이러한 경외심을 토대로 서로 복종하며 섬길 때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주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는 다른 사람을 복종함으로 섬길 수 없다. 다른 지체들에 대한 복종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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