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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와 흑수저의 비밀

기사승인 2020.09.14  15: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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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21)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 김정훈 교수

새 사람의 가정 윤리(3): 종과 주인(엡 6:5-9)

바울은 부조리한 세상의 구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새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 인지에 대해 실천적 교훈을 준다. 그는 1세기 로마제국 시대에 가정(家庭)이라는 범주 안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 또한 부부 간의 관계와 부모 자식 간의 관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에 자유민 가정에는 종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삶은 거의 자유민인 주인에게 의존되어 있었다. 이런 정황 속에서 바울은 주인과 종들 사이에 올바른 윤리적 관계가 확립될 때 인간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 나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였다.

당시 로마 사회는 자유민들과 노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회-경제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단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노예제도의 근원에 대해 질문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노예제도는 탐욕과 타락과 포악성의 열매”라고 말한다(요한, 크리소스톰, 『에베소서 강해』, 송영의 역[서울: 지평서원, 1998], 420-21). 나는 아담이 자신의 타락의 책임을 하나님과 그의 아내 하와에게 돌린 행위(3:12) 안에 이미 노예제도의 씨앗이 배태되어 있었고,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 죽인 사건과(4:8) 라멕이 자기가 입은 부상으로 인해 상습적으로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4:23) 가운데 노예제도가 발아(發芽)할 수 있는 모판이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책임 전가를 통한 분리의 시도나 잔악한 살인행위는 인간관계를 악화시키고, 이에서 비롯된 적대적 세력들 간의 힘의 충돌은 자연히 전쟁과 전투 양상으로 확산되며, 결과 적으로 승리를 거둔 세력과 포로로 사로잡힌 세력은 각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발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주인집 종들은 “노예”라 불리는 자들과 다름없이 일생 동안 주인에게 속박되어 있었다. 종들은 주인의 소유물로서 다른 사람에게 대여되기도 하고 팔려가기도 하였다. 그들은 평생 고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빵을 위해 모진 고역을 감내해야 했다. 주인은 종들을 짐승처럼 취급하였고, 극단의 힘과 폭력으로 그들을 통제하였다. 아무튼 주인에게 부여된 권리는 너무도 과도하여 종들이 불량해 보일 경우에는 족쇄를 채우기도 하고, 고문을 가하기도 하고, 사지를 절단하기도 하고, 눈을 빼기도 하고, 집안의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참조. 존 칼빈, 『에베소서 설교』, 하, 김동현 옮김[서울: 도서 출판 솔로몬, 1995), 430, 442-43).

   
 

세상의 형국을 자세히 관조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 4:1). 바울이 1세기에 보았던 세상은 전도서 기자가 구약시대에 보았던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는 학대하는 자가 있고 학대 받는 자가 있었다. 거기에는 자유민이 있고 노예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주인들이 있고 종들이 있었다.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며 바울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그는 노예제도의 부조리함과 주종관계의 폐단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의 사회-경제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낫과 곡괭이를 들고 로마광장에 모이라고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노예연합을 결성하여 자유민 계층을 몰아내고, 각 가정의 종들이 총궐기하여 주인들을 처단하라고 선동하지 않는다. 그가 유대주의에 대항하는 모습이나 기독교 주변의 이단들과 싸우는 결기(決起)를 보면, 세상 제도와 구조의 불합리에 대해 상당히 강력한 메시지나 행동지침을 제시할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이러한 기대와 달리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너무도 소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전도서 기자 시대의 세상 형국과 1세기의 세상 형국이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강자와 약자의 구도 속에서 인간의 폭력과 억압, 멸시, 학대는 세상 끝날까지 지속되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16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즈는 자연상태의 인간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말로 묘사하지 않았던가?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주종관계가 무너지고, 절대군주제가 사라졌다 할지라도, 강자와 약자로 요약될 수 있는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 경영주와 노동자, 고용주와 고용인 등의 구도는 인간 세상에 항상 존재할 것이다. 이와 같은 통찰과 함께 바울은 세상의 어떤 제도가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를 안겨줄 것이라고 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현재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최선인가를 찾고자 하였다. 그는 주인과 종의 구도 속에서 믿는 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길인지 찾고자 하였다. 사실 이것은 실효적이고 고차원적인 제도개선의 방식이기도 하였다. 바울은, 타락한 세상은 선과 악의 대결 구도 속에서 희망이 없고 제도개선 같은 것은 무의미한 것이니 시도조차 하지 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부조리한 제도들을 폭력적으로 일거에 타파하는 것(사실은 불가능한 방식)보다는 거의 혁명적인 윤리실천을 통해 차원 높은 방식으로 인간의 불합리한 제도들이 최대한 변혁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럼 주종관계의 사회 구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새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바람직한 윤리적 행위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회구조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방식인가? 나는 본문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원문으로부터 아래와 같이 번역해 본다.

5 종들이여,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신의 주인들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자들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영혼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착한 뜻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것을 다시 받을 줄을 알라.
9 주인들이여, 여러분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 위협을 그치라. 그들과 여러분의 주께서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는 줄을 알라.

바울은 먼저 종들에게 그들이 주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윤리적 실천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교훈한다(5-8절). 그는 적대관계에 있는 주인과 종의 개념보다는 믿음의 가정 안에 있는 주인과 종의 개념으로 접근한다. 바울은 종들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한다. “순종하다”(휘파쿠오)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할 때(1절) 사용했던 단어와 같은 단어로 “아래에서 듣는다”는 뜻이다. 종들은 주인의 지시를 받고 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겸손한 자세로 주인의 말을 정확히 듣고 이행해야 한다. 주인이 자기에게 친절을 베푼다고 하여 마치 그와 동등한 신분인 양 행동하고,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충실하게 지시에 행을 하지 않는다면, 주인은 그러한 행위에 대해 불쾌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손해는 그와 같이 행동한 종의 몫이 될 것이다.

바울은 믿는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할 때 두 가지 심리상태와 확실한 순종의 준칙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두 가지 심리상태란 첫째, 두려움과 떨림, 둘째, 성실한 마음을 가리키고, 순종의 준칙이란 주께 하듯 []”을 가리킨다. “두려움과 떨림”은 상대방의 지위를 인정하고 존중히 여기며 긴장된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갖는 것을 뜻한다. 종들의 입장에서 주인은 현실적으로 폭력까지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소유한 만큼, 두렵고 떨림은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심리상태다. 하지만 바울은 “두렵고 떨림”을 적극적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권면한다.

이는 거룩한 두려움과 긴장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을 삶 속에서 실현하라는 뜻이다. “성실한 마음”은 원문에 “마음의 성실함”(엔 아플로테티 테스 카르디아스)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주인을 섬기는 종들의 마음 자세가 진실하고 순수하고 단순해야 함을 뜻한다. 주께 하듯은 종들이 주인을 섬길 때 취해야 할 섬김의 기준을 제 시하는 말로써, 주인을 대할 때 최상급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뜻이다. 바울은 5장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5)라고 권면한 일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머리이시며 구주이시며 공급자이심을 인정하고 최상의 경외심과 감사로 그분을 섬기듯이 아내도 남편을 그렇게 귀히 여기라는 말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원용하여 심지어 종들에게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 주께 대한 순종을 주인에 대한 순종의 표준으로 삼으라는 말이다.

바울은 6-7절에서 두 개의 명령형 분사를 사용하여 주인에 대해 어떻게 순종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다. 첫째, 종들은 주인의 비위를 맞추려고 눈가림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들답게 영혼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종들이 주인의‚주인의 마음을 읽고 기꺼이 악역을 자처하고 나서며 그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본질은 가린 채 아첨만 떤다면, 주인은 당장 기분 좋아하고 아첨 떠는 자의 밥그릇을 더 높게 채워줄지 모르나, 결국은 주인이나 아첨꾼 모두 꼴불견과 같이 되고, 둘 다 더욱 사악해지며, 마지막에는, 뒤늦게 상황파악을 한 주인이 분노에 차서 아첨꾼을 파멸의 낭떠러지로 밀어버릴 것이다.

만일 주인이 아첨꾼을 처단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면 그의 하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그가 남겨놓고 간 일들을 처리하실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기와 자기 일행이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살전 2:5)고 고백하며, 로마교회 성도들에게는 교회에서 이단 사설을 내세우며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자기들의 배만 섬기고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자들]”(롬 16:17)이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영혼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비록 종들이 낮고 천한 위치에서 주인을 섬기고 있다 할지라도, “나의 이 섬김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행위”라는 자부심으로 인내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의 약하고 가난하고 낮은 자들이 강하고 부하고 높은 자들을 섬길 때 그것은 단순히 주인을 위한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행위이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일들은 어떤 위치에서 수행하는 일이든 원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일들의 일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는 차원 높은 자부심으로 자신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소위 “직업 소명관”이라고 표현한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의 표준을 그리스도의 종들처럼에 맞추는 것이다. “나는 십자가 희생을 통해 나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종이다”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은 창세 때부터 세우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수행하는 행위이다”라는 고백과 함께 자기의 일들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으로”‘(에크 푸쉬케스)는 “온 마음과 육신의 수고를 합하여”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요즘 “영끌”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사람들은 이 속어를 “온 영혼을 끌어모아”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집 없는 젊은이들이 하늘까지 치솟는 집값을 보며 한 푼이라도 더 오르기 전에 대출이든 빚이든 끌어모을 수 있는 돈을 온 영혼을 다해 최대한 끌어모아 집을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자기가 맡은 일의 최선의 성취를 위해 영끌할 필요가 있다.

둘째, 종들은 착한 뜻으로 주인을 섬기되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해서는 안 된다. 종들은 “주께 하듯 [함]”을 섬김의 기준으로 삼고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는 첨언은 믿는 자가 주인을 섬길 때 차원을 달리하라는 말이다. 즉, “너나 나나... 네가 나보다 잘난 것이 뭔데... 너는 운이 좋아 금수저이고 나는 억울한 흑수저일 뿐 내가 왜 너를 섬겨야 하는데...”라는 마음으로 인간을 대하듯이 하지 말고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신 주를 대하듯이 섬기라는 말이다. 주인이 비록 까다롭고 난폭한 자라 할지라도(벧전 2:18) 그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를 다루실 분도 하나님이시니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을 쏟아부어 주신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주인을 섬기라는 말이다. 나의 섬김을 인간 주인과만 연결시키지 말고 구원의 주와 연결시킴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에서 종으로서의 현실적 의무를 감당하라는 말이다. “착한 뜻으로”(메트 유노이아스)는 “선한 의지를 갖고”라는 뜻이다. 거의 모든 영역본들은 “유노이아”를 “good will”(선한 의지)로 번역한다. 종들이 주인을 섬길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선한 의지와 악한 의지 간의 대결이 일어날 것이다. 믿는 종들은 주인을 섬길 때 항상 선한 의지를 품어야 한다. 악한 의지는 어떤 형태로든 파멸을 초래하고 선한 의지는 상황을 안전적으로 유지해 주며 긍정적 결과를 산출할 것이다.

바울은 8절에서 또 하나의 명령형 분사를 추가하여 종들이 6-7절에서 당부한 말들을 실천할 때 어떤 보상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 암시한다.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것을 다시 받을 줄을 알라(명분)”(8절). 여기서 “종이나 자유인이나”라 는 말의 등장은 앞에서 종들에게 준 당부의 말들이 사실은 자유인인 주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즉, 주인 입장에서도 종들을 대할 때 그들을 자기 앞에서 설설 기게 만들어서 자기 기분을 가장 잘 맞춰준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방식으로 그들을 농락하거나(6절) 그들을 악의적으로 대하거나 하지(7절) 말고,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자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며, 또한 “주께 하듯”이라는 준칙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주인이든 종이든 이렇게 영적인 차원에서 선을 행하면 그 행위에 대해 주께로부터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다시 받을 줄을 알라라는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각 사람의 선한 행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허비되는 부분이 전혀 없다. 모든 선한 행위는 주께서 기억하시고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주인이 종들을 대할 때 어떤 윤리적 실천 행위를 나타내야 할지 교훈한다(9절). 그는 이 한 절 안에 주인들에게 주는 교훈을 축약하여 담고 있다. 따라서 종들에 대한 교훈에 비해 내용이 아주 짧으나 이는 종들에게 더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준 교훈 속에 이미 주인들이 지향해야 할 준칙들이 상당 부분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도 명령문 하나로 주인들에게 당부의 말을 준 다음, 두 개의 명령형 분사구문을 사용하여 그 실천을 위한 교훈을 베푼다. “주인들이여, 여러분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 위협을 그치라. 그들과 여러분의 주께서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는 줄을 알라.” 여기서 “그와 같이 행하라”는 앞에서 종들에게 준 교훈들(5-8절) 안에서 주인 된 자신들에게 적용할 만한 내용들을 식별하여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이다. 주인은 종들에게 부당하고 그릇된 지시를 내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강압적 순종을 요구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인 역시 종들에게 명령하거나 무엇을 요구할 때 주께 하듯해야 한다. 주인은 종들을 자신의 권위에 굴종하게 해서는 안 된다. 종들을 자신의 기쁨조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종들을 자신의 지시를 흉내만 내는 가련한 광대처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자신 역시 주인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 인식해야 한다. 자신 역시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온 영혼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인은 종들을 대할 때 “주께 하듯”을 기준으로 삼고 선의(善意)로써 종들을 대하며, 그들이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주인 역시 스스로를 하나님의 뜻의 수행자로 인식하고 선한 일들을 행해야 하며, 이에 대해 주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집안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바울은 특히 주인들에게 위협을 그치라고 당부한다. 주인들은 보통 종들에 대한 협박과 공갈이 자기들의 특권이라고 착각한다. 1세기 자유민들의 위세가 아무리 하늘을 찌른다 할지라도 믿는 주인들이 종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쓸데없이 엄포를 놓고 그릇된 일로 으름장을 놓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위협은 인격 모독이며, 인권 유린이다. 주인들이 한편으로 종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고 그들을 보호해 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노동의 수고와 섬김과 가정의 유지를 위한 헌신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이지 자신들이 베푸는 일방적 시혜(施惠)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들에 대한 협박과 공갈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어리석은 군주가 폭력을 자기의 통치수단으로 삼듯이, 열등의식과 자격지심에 짓눌린 어리석은 주인들이 언어폭력, 협박, 엄포, 조롱, 억지 주장, 음모를 자기의 지배수단으로 삼는다. 바울은 종들에 대한 주인들의 위협이 일상처럼 되어 버린 1세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종들과 주인들 모두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알라고 주인들에게 경고한다. 하나님은 종들의 주인이시며 또한 주인들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종들을 지켜보시며 주인들도 지켜보시는 엄위하신 분이시다. 그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의 폐부를 보고 판단하시는 공정하신 심판주이시다. 바울의 결론은 종이든 주인이든 이 사실을 엄중히 기억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없는 세상과 고용주와 고용인 없는 세상, 부자와 가난한 자가 없는 세상, 경영주와 노동자가 없는 세상, 업주와 채용자가 없는 세상은 없다. 인간의 역사가 다하는 날까지 세상에는 강자와 약자가 존재할 것이며, 그 어떤 힘도 이 구도를 깰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 믿는 자들의 목표는 이 구도를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구도가 빚어내는 부조리함과 참상들을 최소화하여 주의 재림과 함께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다. 강자와 약자라는 구도는 전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부정하기만 하면 정답이 나올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구도는 타락한 인간 사회가 피할 수 없는 필요악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는 바로 그 구도 속에서 도도히 흘러가고 있고, 그 부정적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성취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한 상황 가운데도 악의 존재를 허용하시며(엡 2:2), 악한 상황을 선으로 변혁시키시기도 하신다(창 50:20). 이 오묘한 섭리와 신비를 인간이 어디까지 헤아려 알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욥처럼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다 (욥 40:4). 내가 약자인가? 내가 강자인가? 세상에는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다. 지금 어느 쪽에 속해 있든 주께 하듯우리의 윤리실천의 지침으로 삼고, 현재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길이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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