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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2020.10.05  10: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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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에베소서 해설(23)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에베소서 연구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자 가운데 한 분인 김정훈 교수의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신앙적인 도전을 받았다. 이번 23회를 끝으로 에베소서 해설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휘날레를 장식하게 된다. 김정훈 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앞으로 다른 글을 통해서도 선한 영향력이 확대되기를 소망하고 고대한다. <편집자 주>

   
▲ 김정훈 교수

두기고의 파송과 기원(엡 6:21-24)

바울은 이제 에베소서를 마치고자 한다. 그는 간략한 후기(後記)와 축복의 말로 결론을 대신한다. 그는 먼저 두기고를 에베소 교회로 파송하는 일에 대해 언급한다(21-22절). 두기고는 소아시아 지역(지금의 터키 서부) 출신으로(행 20:4. 소아시아 지방의 또 다른 대표자 드로비모가 에베소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 (에베소 아니면 골로새),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 말기에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모금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헬라(아가야의 수도 고린도. 행 20:2)를 출발하여 마게도냐와 아시아를 거쳐 수리아(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에 인접한 이스라엘 북부 지역)로 가고자 할 때,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다(행 20:4).

우리의 본문은 이때로부터 약 4년이 지난 지금 두기고가 에베소서의 전달을 위해 위탁받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21-22절). 바울은 두기고 편에 에베소서를 보낼 때 골로새서도 함께 발송하였고, 이때 빌레몬 집의 탈주 노예였던 오네시모도 함께 돌려보냈던 것으로 보인다(4:7-9; 1:1, 8-22). 두기고는 바울의 1차 투옥 기간은 물론 그가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중에 석방되었던 기간(A.D. 63-66)2차 투옥되었던 기간(A.D. 66-67)에도 바울 가까이에서 그를 섬겼던 것으로 보인다(3:12; 딤후 4:12). 그는 디도의 후임으로 그레데에 파송될 두 명의 후보자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되기도 하였고(딛 3:12), 바울의 사역 말기에는 다시 에베소로 파송되기도 하였다(딤후 4:12). 이런 사실들은 두기고가 얼마나 바울의 신임을 받는 신실한 동역자였는지를 반증해 준다.

   
 

바울의 입장에서 자신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가까이에서 자기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는 두기고가 얼마나 고마웠을까?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곤궁할 때의 친구가 진짜 친구다)라는 서양 속담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두기고의 행동은 너무도 고귀하게 보이고, 의리 있게 보이고, 가장 크고 첫째 되는 사랑의 계명 중 하나를 진실하게 실천하는 행위로 보인다. 오늘날은 참된 스승도, 참된 제자도 만나 보기 어렵다. 복음 진리의 전승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고귀한 사명은 고사하고 “청출어람이 청어람이라”라고 하는 일반 은총적 차원의 관계 개념조차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아름다운 권위 질서와 영원히 가치 있는 것들의 보존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이 가르치는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관계의 복원을 위해서는 양자 모두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참조. 요일 3:18).

바울은 두기고를 파송하면서 그를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라고 추천하다. 원문에서 “주 안에서”가 헬라어 관사(冠詞) “호”가 이끄는 두기고의 인품에 관한 진술 전체를 수식하는 부사구임을 감안할 때, 그리고 “사랑을 받은”으로 번역된 “아가페토스”가 수동적 의미의 과거형으로 번역해야 할 이유가 특별히 없고, “진실한”으로 번역된 “피스토스”의 일차적 의미가 “신뢰할 만한, 신실한, 충성된”인 점을 생각할 때, 위 문구는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바울은 두기고를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신실한 일꾼으로 여겼다. 바울은 일찍이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해하였다(2:19). 그러기에 바울이 자신에게 가까이에서 돕고 있는 두기고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바울은 자기의 청중들을 향해 종종 “형제들아”라고 호칭하였다. 이 교회 공동체적 호칭은 어떤 의미에서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높은 친밀도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다. “신실한 일꾼”은 두기고가 복음전파 사역과 교회 섬기는 일을 감당할 때 헌신된 마음과 충성된 자세를 보여준 것을 반영한다. 이런 사람은 특사의 역할을 할 때(“내가 특별히 그를 보내었노라”) 자기의 뜻을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파송한 자의 뜻을 왜곡하지 않고 신실하게 전달한다.

이러한 신실성은 평소의 헌신된 마음과 충성된 섬김으로부터 나온다. 신실한 일꾼은 공동체를 견고하게 하고 알찬 열매들을 산출한다. 신실함이 없는 일꾼들은 일을 할 때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지 않고 억지로 하며 양 무리의 유익보다는 자신의 이득을 더 추구한다(참조. 벧전 5:2).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두기고를 파송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바울은 자신의 사정 곧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를 교회에 알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지역을 초월하여 자신과 지 교회들 간의 네트웍을 유지하는 것이 교회론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교회”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실재다. 그러기에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자신의 유기체성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엡 4:16). 그는 개인적으로 아시아와 그리스, 로마와 그 외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 성도들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의 소식을 알리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와 교회들 간에 통신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서로 연락이 끊기면 관계가 단절되고 서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소통은 당사자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증진시켜 주고 이해의 폭을 넓혀 주며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그러므로 신자, 불신자를 떠나 인간은 평등과 질서 개념 하에서 다른 사람들과 정상적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보편적 상식과 행동 양식을 습득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독선과 아집, 교만, 자기기만, 편협한 사고, 사유의 불균형에 빠지기 쉽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줄 모르면 영적 무지와 무감각과 완고함에 매몰되기 쉽다. 만일 이런 류의 사람이 돈과 조직과 권력을 장악하고 명예까지 획득한다면 스스로 높아져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멸시하고, 심한 경우 이단의 교주같이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온갖 변명과 정당화, 합리화가 가능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당신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에 불과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건강한 보편 교회를 이루기 위해 교회들과 연락하고 안부를 묻고 상호 소통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는 편지와 같이 글로써 수신지에 보내는 것 못지않게 자신 또는 자신이 파송한 신실한 사람들을 목표한 지역에 보내어 그곳 성도들과 얼굴을 대면하여 자신의 상황을 말로써 알리며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기능상 문서는 영구성에 있어서 탁월하고 대면 언어는 생동감에 있어서 탁월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두 가지 방식을 균형 있게 잘 활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교회는 복음 진리를 문서화하는 일과 동시에 그것을 언어로 선포함으로써 오고 오는 세대를 위해 전승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둘째, 바울은 두기고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본 서신서에서 일찍이 자신을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라고 말하였다(3:1). 그는 자신이 수많은 환난 가운데 있다고도 말하였다(3:13). 그리고 바로 앞에서는 자신이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라고도 하였다(6:20). 그의 상황은 한 가지도 쉬운 것이 없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감금된 상태에서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였고, 육신적으로도 편안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를 지키는 간수들의 인격적 모독과 험악한 행동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생명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세계를 활보하며 다니던 사도였는데 지금 감옥에 감금되어 간수들의 감시하에 적막과 고독을 이겨내야만 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 이는 참으로 견디기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다. 아마도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환난에 대해 다른 경로를 통해 소식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3:13). 또한 믿음에서 후퇴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핍박과 불신 유대인들의 조롱으로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려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에베소에 두기고를 파송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성도들의 육신적, 영적 형편을 자세히 알아야 하고, 성도들 또한 지도자의 사정을 깊이 인지해야 한다. 두기고를 파송하는 목적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바울이 먼저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위로받아야 할 암담한 현실에 처해 있었을지라도 자신이 먼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그는 그들을 위해 교회가 무엇인지, 믿는 자들의 현재의 축복과 소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미래적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편지를 써서 두기고 편에 보내면서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믿는 자들은 바울처럼 언제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로써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도록 대용량의 위로 배터리(battery)를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 성경은 바로 이런 사람을 일컬어 성령의 사람이라고 한다.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레토스”는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위로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축복하며 글을 마친다(23-24절). 그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23절)라고 기원한다. 그가 비는 것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평안”과 “사랑”이다. “평안”(에이레네)의 원천지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평화를 주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그들을 한 새 사람이라 불리는 제3의 인격 곧 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이들은 이제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관계가 청산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원수 관계가 해소된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공동체에 이 평화의 복을 주시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역시 그 원천지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인들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영원한 심판과 저주 아래 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받고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된 사람들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 사랑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물로 교회 밖의 인간의 삶 속에서도 인간의 가치 있고 존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다. 믿는 자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사랑 안에 담겨진 무한한 은총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바울은 에베소 교회 공동체에 이 사랑의 복을 주시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사랑” 앞에 “믿음을 겸한”(메타 피스테오스)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는 일종의 단서조항 같은 것이다. 사랑은 지극히 숭고한 것이지만 이것이 곡해되면, 이보다 더 세상에 해악을 끼치고, 인간을 슬프게 하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복음에 뿌리를 두고 소망에 토대를 둔 믿음과 결합돼 있는 것이어야 한다(골 1:5). 믿음이 겸비되지 않은 사랑은 어느 순간에 어떤 괴물로 둔갑할지 모른다. 믿음을 수반한 사랑의 기원은 에베소서 첫 장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칭찬한 내용과 메아리가 있다(1:15-16).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24절)라고 기원하며 편지를 마친다. 그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발견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라는 말 속에는 그들에 대한 칭찬이 암시되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핍박과 환란, 불공평, 불이익, 불편부당을 인내로 감수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흔들림 없이 굳게 지켰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이시며, 만유의 통치자이시며, 교회의 충만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의 공급자이시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분이었다. 또한 바울의 기원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항상 동일한 성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것에 대한 권면과 격려를 내포하고 있다. 바울은 그렇게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은혜가 있기를 축복한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의미한다. 성도가 세상에 사는 날 동안 가장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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