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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론’이란 무엇인가?(5)

기사승인 2020.10.14  14: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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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제2장 선교적 교회의 신학적 방향성

3. 선교적 교회와 성육신
성육신(incarnation)은 선교를 개념화하는 과정에 있어서 혹은 선교의 동기를 설명하려고 할 때 가장 폭넓게 사용되는 주제어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당연히 성육신의 주체는 성자 예수님이시다. 사도 요한은 성자 예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예수님의 성육신 사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 '거하셨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케노'(σκηνόω)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장막을 치다'(encamp) 혹은 '거주하다'(reside)는 뜻이다. 영원하신 분이 우리의 이웃으로 오셨으며, 우리 가운데 거주하시게 된 것이다. 성육신은 이 세상이 창조되어지기 전에 선제하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자신의 삶을 나누신 것을 뜻한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아픔과 슬픔, 그리고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셨다. "체휼하셨다"는 것은 '숨 파테오'(συμπαθέω)라고 하는데 이것은 '함께 고통을 경험하고 나누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간의 모든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셨다.

벌코프(Louis Berkhof)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설명하기를 예수님은 "무한자이시기에 유한한 관계 속으로 들어오실 수 있으며, 초월자이시기에 이 세상 역사의 현장으로 어떤 방식으로든지 들어오실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으로 스스로 들어오신 성육신 사건은 오직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이루실 수 있는 사건이었다. 성육신은 이처럼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성자 예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예수의 성육신적인 삶과 정신은 예수님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성육신을 통해 이루신 것은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통해서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세상에 다가오시는 방법이 성육신이었다면 우리도 세상에 다가가는 방법이 성육신의 방법이어야 한다"는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적 삶과 정신을 이어가는 공동체이다. 예수님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것처럼 교회는 내려가야 하고, 예수님이 인간의 한계 안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교회는 사람들의 고난과 아픔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선교적 교회'가 왜 선교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선교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출발점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실 수 있었던 근거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께서 자신을 비운 삶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빌 2:6-7). 여기 "자기를 비우다"는 것은 헬라어로 '케노'(κενόω)라고 하는데 이것은 결코 예수님이 무능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어떤 의미로든지 절대적이고 내재적인 속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지만 그는 여전히 전능하신 분이고, 전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다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오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고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 '선교적 교회'는 힘을 더 많이 가진 자가 연약한 자를 조금 도와주는 사역에 관심을 갖는 개념이 아니다. 또 재정적으로 더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에게 뭔가 원조해 주는 개념도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로서 문제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죤 스타트는 기독교인들의 선교는 예수님의 성육신이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면서 "모든 진정한 선교는 성육신적 선교이며, 성육신은 정체성(identity)의 상실없이 동일시(identification)되는 것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이런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세속성'(holy worldliness)이 요구된다. '거룩한 세속성'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과 삶을 나누지만 세속화되거나 그 자신이 세속에 물들어 죄악성에 오염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선교적 교회가 가야 하는 길도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처럼 거룩한 세속성의 길로 가야 한다. 교회됨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할 수 는 길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실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 들어가 녹아져야 하지만 소금이 가지고 있는 맛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이 맛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밝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거룩한 세속성'이 요구된다. 시 말하면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전통이나 종교 형식, 심지어 모든 기득권까지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성육신적 선교 모델을 철저하게 따른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고 "인간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그 처절한 아픔에 동참하고 그들의 고뇌에 찬 삶을 같이 나누게 될 것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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