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무당 굿 하듯이 기도하지 말고

기사승인 2020.10.19  11:37:04

공유
default_news_ad1

-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1)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먼저 에베소서 해설이 인기리에 연재되어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점에 대하여 김정훈 교수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번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 시리즈를 통하여 기도에 대한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이 올바르게 적립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현금 교계에 난무하는 비성경적이고 이교적인 기도의 관행들이 제대로 개혁되기를 소망해 본다. <편집자 주>

   
▲ 김정훈 교수

기도의 근거(마 7:7-11):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

인간은 믿는 자, 믿지 않는 자를 떠나 신(神)을 찾는 존재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그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하나님의 불가분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것으로 인간 존재를 위해 불변의 원형(prototype)을 제공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최강의 결속 요소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어떤 시인(詩人)이 인간을 가리켜 “그[신]의 소생”(스토아학파의 아라투스[c. 315-240 B.C.]의 시 “파이노메나[뜻: 조명]”의 한 어구)이라고 한 것을 상기시키면서(행 17:28) 인류는 모두 참 신(神) “하나님의 소생”(행 17:29)이라고 역설한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서 자신 안에 본유적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선언한다(전 3:11).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안에 당신의 형상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기도는 믿는 자가 하나님을 찾는 가장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위 중의 하나다. 기도자는 자기 앞에서 계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또 기도할 때마다 신비적 황홀경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기도자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청취를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얼마나 경건하고 확신에 찬 신앙 행위인가? 베드로는 자기의 수신자들에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라며 격려를 보낸다. 하지만 기도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도의 근거(또는 출발점)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종교성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에? 믿는 자로서의 당연한 의무감에? 여러 가지 설득력 있는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기도의 근거는 인간 쪽에 있지 않고 하나님 쪽에 있다. , 우리의 기도의 출발점은 인간의 종교성이나 의무감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도의 요청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의 근거가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면 이보다 더 탄탄한 기도의 기반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된 우리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성령께서는 시편 기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 에스겔 선지자(597 B.C.에 끌려감)는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장차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며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라고 하신 말씀을 충실히 증언하였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 약속을 믿고 회복을 간구하는 자에게 성취된다. 우리의 기도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하나님의 기도의 명령 또는 요청에 있다. 이 명령은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종교성과 성경 지식, 믿음, 경건한 의지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하다.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 시작하는 기도는 그 어떤 동기에 의한 기도보다도 그 근거가 강력하다.

   
 

신약성경에도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도 요청에 비견할 만한 기도의 명령이 나온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이신 성자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명령하신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얼마나 강력하고도 친절한 명령인가? 메시야 왕이신 성자 예수(참조. 마 1:1, 6; 2:2, 6)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시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인간이 항상 꺼져가는 장작불을 지피듯 영성을 고조시켜야만 기도의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피곤하고 공허한 일이겠는가? 기도자가 기도를 수학 공식처럼 생각하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목청만 높이면 언제든지 성령을 소환할 수 있고 하나님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영적 오만이요 착각이며, 억지와 생떼에 불과할 것이다. 기도란 결코 요술방망이 같은 것이 아니다. 기도란 겸손히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성령께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르짖으라,” 예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고 명령하시기에 우리는 미신숭배적 오류에 빠지지 않고 탄탄한 근거 위에서 기도할 수 있다. 더구나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기도를 받으시는지 그 내용까지 보여 주니 우리는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도 탄탄한 기초를 갖출 수 있다.

기도에 관한 글을 여는 나의 주된 관심사는 기도란 무엇인가?”가 아니다. 나는 기도에 관한 이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관심사는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에 있다. , 성경에 나오는 실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피려는 것이다.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일만 번 말하는 것보다 성경 속의 기도를 숙지하고 그것을 나에게 적용시켜 다섯 번 기도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공석(公席) 기도든 사석(私席) 기도든, 내용이 불명확하고 비성경적인 기도는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는 무의미한 주문(呪文)과도 같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내용도 불분명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합치하지도 않는 기도(참조. 요 15:7)를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들어주시라고 간청하겠는가? 그러기에 예수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고 말씀하신다. 나는 성경에 나타난 현장 기도들을 찾아 해당 본문들을 분석하면서 어떤 정황에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 주목해 보고자 한다. 단, 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 첫 번째 글에서는 마태복음 7:7-11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기도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기도의 명령을 디딤돌로 삼고 기도를 시작한다면 우리는 능력 있는 기도와 지치지 않는 기도, 열정적인 기도,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 온갖 신령한 복 들을 체험하는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7:7-11은 보다 큰 문맥인 산상수훈(5:1-7:29)에 속한 작은 단위 본문이다. 산상수훈은 단순히 기독교인의 윤리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메시야 왕 예수께서 베푸신 천국 백성의 법의 선포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내용이 아니라 이미 천국 백성이 된 자가 어떻게 살아야 세상에서 천국을 실현하며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천국 윤리(5:1-7:5)를 실천하기 위한 대안(代案)으로서 제시되는 근접 단위 본문 (7:6-12)의 큰 부분인 기도의 명령에 관한 내용이다(6절은 바른 분별력에 관한 내용; 12절은 황금률). 다시 말하여 믿는 자들은 천국 백성으로서 지속적 기도를 통해 숭고한 천국 윤리를 실천함으로써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실현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3가지다. 첫째, 믿는 자는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원문에서 7절의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문법적으로 모두 현재 명령형으로 되어 있고, 이 명령에 부응하는 자를 가리키는 “구하는 이,” “찾는 이,” “두드리는 이”는 모두 현재형 분사 앞에 관사를 붙여 의인화(擬人化)한 것이다. 따라서 세 명령형 동사는 행동의 지속성을 요구하는 단어들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 단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속적으로 기도하라”라는 것이다. 한두 번 기도하다가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계속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 행위는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한밤중의 벗의 간청(懇請. 눅 11:8)과도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은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신다(눅 18:1-8).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매달려 계속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께 드려진 향()과 같이 여기신다.

기도는 우리의 영육간의 필요를 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수단이다. 기도는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하늘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이다. 기도 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신실한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기도의 강도를 점진적으로 높여가는 것을 암시한다. 구한다는 것(to ask)은 입술로 요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찾는다는 것(to seek)은 발로 뛰어다니며 찾는 것을 의미한다. 두드린다는 것(to knock)은 손으로 규칙성 있게 문을 똑똑 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기도할 때 점점 강도를 높여 가며 간절히 부르짖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은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영적 필요 또는 육적 필요 중 어느 하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6:33a), “이 모든 것(=일상의 필요)”(6:32b, 33b), 그리고 자기성찰과 분별력의 필요성(7:1-6)에 대한 언급은 그것을 영육간의 모든 필요로 볼 것을 주문한다. 아무튼 우리는 영육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하나님께 알려드려야 한다(4:6-7).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미리 다 알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점검하고 당신께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뢰기를 원하신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가장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를 최상의 은혜의 수혜자로 만들고 싶어 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믿는 자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8절). 헬라어 원문에서 7절의 “주실 것이요”(도쎄세타이)와 “열릴 것이니”(아노이게세타이)가 수동형으로 되어 있고, 8절의 “열릴 것이니라”(아노이게세타이)가 수동형으로 되어 있는데, 행위자가 명시되지 않은 이러한 수동형 동사를 신적수동태(神的受動態)라고 부른다. 이는 동사의 행위자가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주실 것이요는 하나님이 믿는 자가 구한 것을 응답해 주신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여 하나님이 구한 것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가 간절히 구한 것을 그의 손에 얹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단,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근거로 기도할 때 쾌히 응답해 주신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찾아낼 것이요”는 믿는 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믿는 자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가 찾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궁구하는 자에게 찾을 수 있게 해 주신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대언한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믿는 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찾기 위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잠언서 기자는 경건한 삶을 간구하는 자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독려한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4, 5).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도 역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철통같이 막혀 있는 보물창고의 문을 열어 온갖 보배로운 것들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시다(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참조. 아 5:2). 그리스도의 두드리심에 마음의 문을 여는 자에게 당신과의 완전한 연합을 통해 최고의 복락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역(逆)으로 우리가 문을 두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문을 열어 복된 길을 열어주시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로 채워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스도는 온갖 보배로운 것들을 예비해 놓으시고 문 뒤에 서서 우리가 문을 두드리기를 기다리신다.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문을 두드릴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 주신다.

메시야 왕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는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다(시 65:2; 사 56:7; 마 21:13). 그는 하늘에서 우리의 간청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을 친히 약속해 주셨다(빌 4:19). 그는 우리의 요구를 어떻게 들어주는 것이 최상인지 정확히 아시는 분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요청하는 것마다 무조건 다 들어주시는 분은 아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그는 자신의 판단과 무한한 지혜를 따라 우리에게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친히 결정하실 권리를 갖고 계신다.

셋째,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9-11). 예수는 비유(譬喩)를 들어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겠느냐고 반문한다. 아마도 떡덩이(아르토 스: 빵덩어리)과 돌의 생김새가 비슷하고, 생선과 뱀이 비슷해서 이렇게 비유하신 것 같다. 돌은 아무리 보기 좋은 것이라 하여도 먹을 수 없다. 뱀 역시 아무리 생선과 유사하게 보여도 식품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떡을 구할 때 씹을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는 돌을 주실 분이 아니시며, 생선을 구할 때 혐오감을 주는 뱀을 주실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영육간의 양식을 구할 때 “좋은 것”을 주신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1절). 이것은 수사학적 질문으로, 악인도 자기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을 아는데, 의로우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당신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좋은 것”(아가도스)은 포괄적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영육간의 모든 복을 가리킨다. 병행절인 누가복음 11:13에서는 “좋은 것”을 “성령”으로 적시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의 보편적 임하심은 예수의 종말론적 오심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강한 특징 중의 하나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것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동반된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은혜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구약시대로부터 선지자들에 의해 일관성 있게 예언된 영적인 나라로 역사 속에서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최종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믿는 자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시는 제3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은 성령의 종말론적 임재 안에서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사는 자들이다. 성령은 믿는 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참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신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친히 기도해 주시는 분이시다(롬 8:26-27).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면 그는 당신의 나라의 보화들을 풍성히 내려 주실 것이다. 기도는 아무 비용 없이 가장 높은 곳, 하나님의 통치소가 있는 하늘 보좌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은혜의 방편이다. 단지 겸손한 무릎과 하나님을 대면할 담대한 믿음과 확신만 있으면 그곳까지 도달할 것이다.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인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매일의 양식을 위해, 더 나은 은사들을 위해, 내면의 변화를 위해, 심령의 새롭게 됨을 위해, 인격의 성숙을 위해 기도하자.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교회와신앙> 후원 회원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은행 607301-01-412365 (예금주 교회와신앙)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