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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자녀에 의한, 자녀를 위한 기도

기사승인 2020.10.26  13:4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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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 (2)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 김정훈 교수

아브라함의 기도(1): 아들을 주소서(창 15:1-5)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1세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세계 모든 민족 중에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모든 인류 중에 특별히 선택하셨고 그와 그의 후손에게 특별한 복을 약속하셨기에 자기들이야말로 이방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민족이라는 배타적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별하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복을 약속하신 목적은 세상에 혈통적으로 뛰어난 한 민족을 심어놓으시고 그들만 특별한 권리를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창조주로서 당신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당신의 나라를 회복하시고 죄로 인해 사망의 종노릇 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인종을 초월한 수많은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복을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이다.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 조상”이란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내시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라고 약속하신 수십년이 지난 시점에(참조 창 11:32[데라 205세에 죽음]; 12:4[아브라함75세]; 17:1[아브라함99세]) 그에게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라고 말씀하셨다(창 17:5). 창세기에서 개인 이름의 개명은 이것이 처음이다(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NICOT, ed. Robert L. Hubbard, JR.[Grand Rapids: Eerdmans, 1990], 464).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 많은 민족의 조상”이란 뜻이다(창 17:4-5; 롬 4:17).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한 가계 안의 조상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되어야 할 것을 계획하시고 새 이름을 주셨다. 이러한 이해가 타당한 것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부터 그로 “큰 민족” (창 12:2-3)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소돔의 심판을 위해 보내신 천사들을 통해 그로 “강대한 나라”(창 18:8)가 되게 하실 것을 약속 하였기 때문이다. 큰 민족이나 강대한 나라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될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 곧 모든 인종과 시대를 초월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모든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 곧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조상으로서 믿음의 계보의 정점(頂点)에 있는 인물이다. 1세기 유대인들이 혈통적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을 내세워 아브라함을 독점하려 한 것은 그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롬 2:28-29; 9:6-8)이라고 주장하며,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모든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역설한다(갈 3:6-7; 비교. 고후 11:2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기도를 살피고 그의 기도를 배우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1. 아브라함의 기도의 정황과 계기

1) 기도의 정황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다(창 11:28). 그의 아버지 데라는 자기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래 [후에는 하나님의 지시로 사라로 개명. 창 17:15])와 손자 롯(하란의 아들)을 데리고 이방신들이 우글거리는 갈대아 우르(수 24:2, 14-15)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였다(창 11:31). 그런데 데라는 우르를 떠나 서진(西進)하여 바로 가나안을 향해 가지 않고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북서진(北西進)하여 멀리 밧단아람의 하란 땅으로 갔다(창 11:31). 아마도 그는 끝없이 펼쳐진 시리아 사막을 거쳐 바로 가나안으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아무튼 데라의 행동은 도시(우르)의 안락함이나 당시 사회 풍속으로 볼 때 상상할 수 없는 대단한 결단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이런 결단력과 통솔력을 직접 보고 배우며 성장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데라는 가나안까지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가 한번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은 데라의 가나안 이주(移住) 결심이 그의 남다른 신앙심 곧 우르에 가득한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감에 기인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먼저 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감동하시어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셨고, 그가 아버지 데라를 설득함으로 아버지로 이주를 결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이해가 타당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실 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보도하기 때문이다(창 12:1, 4).

하나님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곳에 영원히 숨어 계신 분이 아니다. 그는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도 말씀하셨고 타락한 후에도 찾아와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계속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숲의 나무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시냇물 소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재난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천둥번개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세계 열방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불신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가까운 이웃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각종 상황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미상의 한 싯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소박한 들꽃 한 송이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인간의 역사(歷史)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교회의 정황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무엇보다도 그는 기록된 계시의 말씀(신구약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각종 주해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설교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연인에게도 하나님의 계시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그러나 이 감지력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 특히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반계시뿐 아니라 특별계시(구원계시)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인지력을 주셨다.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던 것(창 11:31)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곳을 지목해 주셨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비교. 행 7:2-3)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점점 더 확연히 보여주실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우르를 떠나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히 11:8)고 보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데라가 아들 아브라함과 자부 사라와 손자 롯과 함께 가나안으로 가고자 했던 것은 인간 편에서 보면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청사진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나안은 훗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땅이었다. 그러나 데라 가족은 처음부터 그 땅의 의미를 알고 그곳으로 가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를 하란 땅에서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했다. 한편 그는 하란에 거주하는 동안 수많은 소유와 사람들을 얻었다. 큰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보통 사람들은 재산이 늘어날 때 거기에 마음을 쏟고 안주하려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던 것은 단지 현실적 삶의 부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데라의 뜻을 이어받아 자신도 가나안을 향해 떠나고자 결단하였다. 그는 자기 아내 사라, 조카 롯과 함께 모든 재산과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이 곧 천국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로 이동하든지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여러 곳에 제단을 쌓았고(창 12:7, 8; 13:3, 18), 식솔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수고함으로 상당한 재력을 얻을 수 있었다(참조. 창 13:1-2, 6; 14:14). 하지만 가나안 생활이 녹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가나안 땅에 불어 닥친 기근으로 인해 아브라함 가족은 먹을 것을 위해 애굽으로 피신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왕 앞에서 목숨 부지와 생계유지를 위해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그녀를 바로 궁에 들여보냈다가 들통이 나서 망신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상황을 반전시키셨다. 바로는 아브라함과 사라, 롯 그리고 모든 소유를 다 돌려보내 주었다(창 12:20-13:1). 또 아브라함이 겪어야 했던 한 가지 큰 괴로움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오랜 세월 동고동락해 온 조카 롯과 갈라서야 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재산이 늘어난 데서 비롯되었다. 아브라함과 롯이 소유한 짐승의 수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하니 두 사람의 목자들 간에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참다못한 아브라함이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니 상호 간 싸우지 말고 목자들도 서로 싸우지 못하게 하자”고 제안하면서(창 13:8) 서로 헤어지자고 하였다. 이 결과 아브라함은 헤브론으로 가서 살고(창 13:18), 롯은 소돔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창 13:12). 롯이 속한 소돔은 당시에 목초지가 넓고 문화가 발달하고 부가 축적된 환락의 도시였다.

하지만 헤어짐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브라함에게 또 다른 아픔이 찾아 왔다. 조카 롯이 살고 있던 땅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에 소돔 왕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시날 왕 아므라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이 전쟁 통에 소돔에 살고 있던 롯과 그의 가족들과 종들이 다 끌려갔고 모든 재물을 탈취당했다. 헤브론에 거주하던 아브라함이 이 비보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서 먹이고 기른 318명의 친위대를 이끌고 단까지 추격하였고, 이들 중 일부를 선발하여 야음(夜陰)을 틈타 공격을 감행하여 적들을 궤멸시켰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올라가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조카 롯과 여자들과 잡혀간 포로들을 모두 찾아 왔다(창 14:15-16).

이 정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돔 왕이 얼마나 흡족했던지, 그는 아브라함에게 되찾아 온 사람들은 자기에게 다 돌려보내고 모든 물품은 다 가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하였다: “22 천지의 주재 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창 14:22-24). 아브라함은 자기의 공로에 대한 왕의 호의에 대해 이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하였다. 그는 아주 작은 물질에 대한 탐심도 거부하였다.

2) 기도의 계기
아브라함이 기도를 하게 된 시점은 그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되찾아 온 물품과 사람들을 놓고 소돔 왕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마무리를 한 후였다. 그는 물질과 인력에 대해 욕심을 버리고 호탕하게 담판을 지은 후였기 때문에 그가 기도한 시점은 영적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자기가 격파한 왕들은 여전히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현실적으로 인간적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적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반격해 오면 언제든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하나님이 아브람(아직 이 이름을 쓰는 시기임)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람이 인간적 두려움에 사로잡혀 불안감에 싸여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이 말씀은 (1) 하나님이 친히 아브람의 방패가 되시어 적들의 모든 공격을 막아주시고, (2) 큰 상급을 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이와 같이 본문에 나타난 아브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말을 걸으심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는 일찍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 그로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창 12:2-3)을 상기(想起)시켜 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의 기도도 사실은 이 큰 그림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셨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의 특별한 감동하심이 있어 기도하든, 어떤 난제를 풀기 위해 기도하든,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도 커서 감사하여 기도하든, 어떤 특별한 목표가 있어 기도하든, 어떤 마음의 소원이 있어 기도하든,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한 계획이 있어 기도하든, 특별히 기쁜 어떤 일이 있어 기도하든,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결단을 위해 기도하든, 어떤 심각하고 중차대한 일이 있어 무슨 결정을 위해 기도하든, 어떤 중직을 내려놓고자 기도하든, 속수무책의 재난 앞에 살길을 찾고자 절규하며 기도하든, 생명의 위협으로 인한 공포심 가운데 기도하든, 육체의 가시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기 위해 기도하든, 악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기 위해 기도하든, 마음의 압박이 너무도 커서 통곡하며 기도하든, 처절한 실패로 인해 가슴을 움켜쥐고 기도하든, 극한 가난으로 인해 낙심 중에 기도하든, 삶을 거부하고 싶을 만큼 극에 달한 고난 중에 기도하든, 우리는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 역사와 인생에 대한 그 의 설계도를 생각하며 기도하면 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풍성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못할 기도는 아무것도 없다.
 

2. 기도의 내용

아브라함은 환상 중에 자기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대면한다(창 15:1). “환상”은 하나님의 현현(顯現) 방식 중의 하나로 “환상 중에”(밤마히제)는 (비교. 민 24:4, 16; 겔 13:7)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소통 방식을 묘사한다. 본문에서 이 어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모습(가시적 이미지)을 보고 있다는 것을 묘사하기 보다는 그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의 말씀을 접하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혹독한 전쟁을 치른 후에 영적-심리적으로 비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환상 중에 그에게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불안한 마음과 당신의 뜻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아시고 신비상태 가운데 그에게 찾아오셨다.

아브라함으로서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부터 엄청난 약속을 받은 터라 현재 자기 앞에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 아브라함에게 대화를 신청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자가 처한 상황이나 그의 내면에 조성된 영적 환경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황과 상관없이 아무 때나 불쑥불쑥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매우 짧은 대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아브라함은 “2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창 15:2-3).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브라함으로서 하나님이 친히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에 얼마나 안도가 되었겠는가?

더구나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씀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온 후 자신에게 닥친 수많은 시련 속에서 응어리처럼 풀리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창 12:1-3)에 대해 무슨 말인가 추가적으로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적들의 공격을 막아주시리라는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씀에 꽂혀 있었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에 받은 약속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 자기 속에서 증폭된 마음의 소원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기에 그는 주저함 없이 하나님께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2절)라고 하였다. 이전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창 12:2-3)이 성취되려면 자식이 있어야만 하는데 90세를 넘긴 지금까지 자식이 없으니 “내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하지만 내게는 자식이 없어요”라는 말은 하나님의 대답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호소력 있는 간청이었다. 아브라함의 말은 “저로서는 전에 제게 주신 약속의 성취보다 더 큰 응답은 없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요, 저는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어 다메섹 출신의 성실한 종 엘리에셀이나 상속자로 삼으려려고 합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다소 소극적인 기도로 아브라함이 정작 간청하고 싶은 내용은 자식을 주소서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판단에 자식을 갖는다 것이 인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겠으니 위축된 마음에 빙빙 돌려서 간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그와 같은 심정을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3절)라는 첨언에서 읽을 수 있다(“씨”[자라]는 자식을 가리키는 은유적 용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간구는 외견상 소심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아들을 주세요. 그래야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다라는 대담하고도 논리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적, 생물학적 판단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속의 성취를 위한 “씨”의 요구(비록 완곡한 접근방법을 사용하고 있지만)는 결코 부실한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우회적이지만 매우 강력한 청구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대담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단지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간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기도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근거로 진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라고 하신 약속을 한 시도 잊지 않았다. 그는 지금 비록 아무 자식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따라 자기에게 수많은 후손을 줄 것이며, 자신을 복의 표상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성취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조카 롯이 자기 곁을 떠난 후에 쓸쓸해 할 때 하나님이 “14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 13:14-16)라고 하셨던 말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기에 그는 이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께 “제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그런데 제게는 아들이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진술이 좀 우회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제게 아들을 주세요”라는 당찬 요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현실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우리는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동일한 약속의 소유자라는 인식을 갖고 그 언약을 근거로 담대하게 기도해야 한다.
 

3. 기도의 응답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고 이렇게 응답하셨다: “그 사람[엘리에셀]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4절). 모호한 부분이 일획도 없는 너무도 선명한 말씀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소원하는 대로 아들을 주시겠다는 응답이다. “네 몸에서 날 자”는 아브라함의 친자 외에 다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그런 나약한 얘기 하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생물학적 방식을 따라 역사 속에서 당신의 나라를 상속할 자들을 번성케 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에 대한 실현 의지를 보여주시고자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약속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이는 원 약속(창 12:2-3)과 이에 대한 제1차 확인 약속(창 13:15-16)과 제2차 확인 약속(창 15:1-4)에 대한 추가적 인증(認證)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중의 확인 약속과 인증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의 확고성에 대한 공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성취된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성취를 바라보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그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전진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에서 태어날 자가 자기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자기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들과 같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감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창세기 기록자(모세)는 이에 대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6절)라고 보도한다. 이 보도의 중요성을 인지한 신약 기자들(특히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은 훗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義)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을 주실 때, 약속 성취의 싸인(sign)을 주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자식을 달라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하나님은 강보에 싸인 어떤 아기를 즉석에서 넘겨주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생물학적 과정에 개입하시어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체험해야 했다. 그는 자기 몸에서 태어날 아들을 낳기까지 믿음으로 기다려야 했다. 대신 하나님은 다시 한번 당신의 언약을 공고히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약서 작성 이상의 의미를 갖는 엄중한 언약 체결식을 갖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에 대한 확약 요구에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 삼 년 된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9절). 아브라함은 이것이 피의 언약식을 행하자는 요구인 것을 알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 모든 짐승을 가져다가 새들을 제외한 모든 짐승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았다(10). 해가 진 후에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큰 흑암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12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3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13-16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음성과 함께 어두움 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로가 보이고 활활 타는 횃불이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이 광경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이르는 방대한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언약하셨다(17절). 이 언약 체결 장면에서 세 가지 주목할 것은 첫째, 사백 년 동안 이방 땅에서의 객 생활과 그곳으로부터의 탈출은 우상숭배와 죄의 권세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하고, 둘째, 쪼개진 짐승은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31:31-33) 체결을 예표하고, 셋째, 아브라함의 후손이 차지할 애굽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활한 땅은 하나님 나라의 소유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이 그의 당대나 그의 몇 대 후손에게서 그칠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사 전체를 내다보며 주어진 거시적 약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약속을 붙들고 담대히 기도하자.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토 안에 들어와 있음을 믿고 기도하자. 우리가 가나안 곧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바라보며 행진하고 있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도하자.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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