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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개혁만 한다면

기사승인 2020.11.05  16: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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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503회 종교개혁 주일에

최삼경 목사 / <빛과소금교회> 담임 목사, 본지 편집인

   
▲ 최삼경 목사

필자는 누구보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많이 외쳐온 목사 중에 하나이고, 또 누구보다도 교회 개혁에 힘썼던 사람 중에 하나라는 점을 감사한다. 그러나 개혁을 말할 때마다, 필자 속에 정직하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내가 개혁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데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애굽에 가겠습니까?’라고 한 모세처럼, 거룩한 제단 앞에서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한 이사야처럼 나를 보면 개혁을 외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개혁이란 이름으로 오히려 교회를 해롭게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이 점은 필자뿐 아니라 진정한 개혁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같이 가져야 할 고민이요 또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자기를 위한 이단 연구가나 개혁자는 그 결과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무조건 비판하고 이단으로 규정하려고만 한다. 한국교회 개혁을 가장 많이 외친 목사 중에 두 분은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자기가 올라가려는 목사로 보이지만, 많은 일반인들이 그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교회와 영혼을 위한 이단 연구가와 개혁자라면 비판의 결과까지 내다보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참 개혁자는 비록 바르게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그 결과가 부정적 결과가 나올 때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참된 개혁자라면 자기가 하는 비판이 올바르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해도 주저하며 비판하는 것은 그 결과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잘못하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또 소수의 사람의 인권과 이익을 위하려다 정작 기독교 자체에 큰 손해를 입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단자들과 친 이단언론인들은 참된 이단연구가나 개혁자들을 기독교를 해롭게 하는 자로 공격하는 데 익숙하다. 필자는 그들의 판단과 송사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요동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필자의 지혜와 겸손과 용기와 진실을 돌아보게 되는데, 이는 원수들이 준 유익이라고 생각한다.

   
▲ 마틴 루터

종교 개혁자 중에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성공한 개혁자도 있고, 반대로 실패한 개혁자들도 있다. 성공한 개혁자로는 존 위클리프(J. Wycliff, 1333-1384), 얀 후스(John Hus, 1369-1315), 마르틴 루터(M. Luther, 1483-1546),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존 칼빈(J. Calvin, 1509-1564) 그리고 존 낙스(John Knox, 1513-1572), 등이다. 이들 한 분, 한 분 다 살펴보면 유익한 하나님의 개혁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실패한 개혁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사보나놀라(Savonarola, 1452-1498)와 토마스 뮨쳐(Thomas Muntzer, 1489-1525) 같은 사람들이다. 성경에서 보면 사도의 위치에 있었지만 실패한 가룟 유다도 있고, 또 열심히 개혁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끝내 실패한 남왕조 유다 세 번째 왕인 아사 왕 같은 사람도 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3주년이 되는 해다. 필자는 개혁을 외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개혁에 대한 설교를 별로 하지 못하였다. 역시 두 가지 때문이다. 밝힌 것처럼 ‘내가 무슨 자격으로’라는 내면의 소리 때문이고, 반대로는 누구보다 한국교회가 무엇을 개혁해야 할 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두렵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는 지금 중병을 앓고 있으며, 만신창이 상태로 보인다. 물론 이 말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완전히 절망적이란 말도 아니다. 그러나 거짓이 난무하고, 반기독교 정서와 사상이 팽배하다. 이단 문제, 금품선거, 정치 문제, 한기총 등의 한심한 연합기관, 굽은 재판국 문제,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 등, 하나하나를 보면 성한 곳이 없어 보인다.
 

인간은 누구나 개혁이 항상 필요하다.

인간은 ‘항상 개혁’을 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에게 개혁이 필요 없는 때는 없다. 가끔 개혁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일 때는 잠시 순간의 상태이거나 또는 문제가 숨겨져 있는데 착각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인간의 질병과 유사하다. 인류에게 질병이 없을 때는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이번 코로나를 통하여 보면 미래에는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부패한 모습은 각각 다르고 따라서 그 대처 방법 또한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있는 곳에는 항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유는 하나다. 인간은 모두 타락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성이 가득 차서 거기에서부터 나오는 악들은 상상할 수 없도록 다양하고 깊고 높다. 따라서 인간이 있는 곳은 어디나 썩은 냄새가 진동하여 견딜 수 없다.

혹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옳게 보이고, 그것이 오판이 아니라고 해도 인간은 쉽게 변질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를 항상 악한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한 번 선하다고 해서 그를 항상 선한 사람일 것으로 믿어도 안 된다. 오늘 선하다가도 내일 악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고양이 발톱이 항상 자라기 때문에 위험하듯 사랑도 변하고, 충성도 변하고, 진실도 변하고, 그리고 믿음도 변한다. 그래서 ‘항상 개혁’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필자는 검찰 개혁을 이 진보 정권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보수정권도 하려고 했다는 기사를 보고 사실 놀랐다. 노무현 정권은 물론, 김영삼 정권과 이명박 정권과 심지어 박근혜 정권까지도 검사개혁을 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전두환 씨가 더 잘 증명한다고 본다. 그가 사회정화란 이름으로 전국 각 군부대 내에 소위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운영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아픔을 준 전 씨도 그 일을 개혁의 이름으로 했다는 점이다. 당시 전두환 씨에게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동네 깡패들이 다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개혁의 대상인 사람마저 개혁을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개혁을 외쳐서 자신은 개혁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피하려는 꼼수다. 이는 기독교계도 다르지 않다. 존경하는 옥한흠 목사님이 만드신 교회갱신협의회가 지금 한국교회에 무슨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지 다시 평가해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이 단체가 만들어진 초기에 한국교회를 가장 부패하게 하던 두 사람이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숨기기 위한 묘수였을 것이다. 한국교회 대표자들 중에 금품선거를 공개적으로 회개한 목사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은 죄를 해결하려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회개란 이름으로 자신에게 죄의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하려고 한 가증한 행위였다. 그들은 회개한 죄를 또 회개해야 할 것인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인간은 항상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쇠퇴이며 결국은 망하게 된다. 시대는 급변하는데 나만 변하지 않으면 나는 결국 뒤처지게 되고 결국 망하게 된다. 흐르는 물 위에 떠 있는 배는 부지런히 노를 저을 때만 앞으로 가는 법이다. 그렇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 배는 점점 뒤로 밀려 결국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때로 그 자리를 유지만 하려고 해도 죽도록 노를 저어야 가능할 때도 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미국의 코닥 필름도 망했다. 영원할 줄 알았던 로마도 망하였고, 1913년에 우리나라보다 60년이나 먼저 지하철을 만든 세계 5대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몰락했던 것처럼 누구라도 변화하여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 이 땅에 보장된 행복, 보장된 의, 보장된 성공은 없다.

삼성의 이건희 씨가 사망하고 그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를 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남긴 말 중에 최근에 가장 많이 회자된 말이 하나 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꿔라”라는 말이다. 이 슬로건 하나로 위기의 삼성을 살렸고 나아가 지금의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모든 기업들은 삼성처럼 큰 기업이 되기를 원할 것이지만 그러나 삼성처럼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이점은 국가도 개인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변하려고 하지 않으면 망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성도들은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고향을 떠나려고 하지는 않는다. 놀던 물이 좋다. 낯 설은 사람, 낮 설은 자연은 누구나 다 싫어한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지 않으려고 한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한국교회 중에 ‘다음 세대’ ‘다음 세대’라는 말을 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정작 다음 세대를 위하여 변하려고 하는 교회도 찾기 어렵다.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정관을 개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본다. 변할 것들이 많을 것이고 더 철저하게 변해야 한다.

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나 기득권 세력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기득권 세력이 있고, 비기득권 세력이 있다. 작은 교회에도 있고, 가난한 가정에도 있고, 회사에도 있고, 사회와 국가에도 있다. 심지어 망해가는 나라와 망해가는 교회에도 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집에서도 곡간 열쇠를 가지고 기득권 세력인 시어머니와 비기득권 세력인 며느리가 싸운다.

그런데 어디나 비기득권 세력은 혁명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란다. 누가 와서 확 뒤집어 주어야, 그 틈을 이용하여 자기도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울하고 분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쉽게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신 기득권 세력은 썩어 스스로 망할 때까지 변하지 않으려고 한다. 둘 다 경계해야 한다.

변하고 개혁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는 쉬지 않고 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찬란한 부흥을 과거에 이루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망하기 쉽다. 전에는 교회가 사회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변하는 사회를 선도하기는커녕 뒤따라가기도 바쁘다. 지금이 변해야 할 그 때다. 우리 주변에 큰 대형교회였다가 갑자기 몰락한 교회들이 아주 많다. 만 명 대 교회가 천 명 이하로 떨어진 교회나, 천 명 대 교회가 백 명 대 교회로 전락한 것을 보고 귀감을 삼아야 한다. 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요해도 망하게 하는 데는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는다. 700년 동안 지은 쾰른 성당도 필자 혼자 해도 며칠이면 초토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중에 하나다. 하나는 내적 분열과 싸움이고, 다른 하나는 변하지 않으려는 욕망 때문이다. 변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은 변할 수 없는 이유로 ‘환경 탓, 돈 탓’을 한다. 아니다. 의식이 변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고향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이들이 변하려고 할 때가 있다. 오직 자기 이익과 기득권을 보장받는 선에서는 변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자는 진정한 변화와 개혁을 이루지 못한다. 또 어쩔 수 없이  개혁에 참여하고도 바로 또 후회한다. 공개적으로 회개를 한 후에 다시 후회하고 번복하는 미련한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두 번, 세 번 어리석은 사람이다.

결국 기회를 잃으면 영원히 회복되지 못한다. 그 때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 한국교회는 지금 변해야 할 때다. 이 기회를 이용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망할 것이다.
 

성도라면 개혁적 사명을 누구나 가진다.

누구나 참 성도라면 개혁적 사명이 생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성령을 받으면, 제일 먼저 가치관이 변한다. 의식이 변하면 삶은 자연히 따라서 변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의식의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으면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한다. 구원받기 전에는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다. 비록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다. 선도, 의도, 사랑도 자기중심적이다. 따라서 판단도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그의 비판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

아직도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믿는 사람은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중심인 것처럼 하는 위선을 부리는 것이 문제다. 성령이 임하면, 그 다음부터 하나님 중심이 된다. 무엇을 하든 시작도, 결과도, 노력도 다 하나님 중심이다.

그리고 그 후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인간관계다. 인간관계가 변하지 않았다면 아직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요, 성령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이다. 청소년들이 은혜만 받으면 누구나 제일 먼저 효자가 되는 것을 보면 안다.

그리고 다음은 열심히 산다. 억지로 하던 공부도 그 후에는 자기 책임 속에서 기쁘게 한다. 게으른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한 달란트 받은 자 외에는 없다. 다음은 어디에서나 무엇을 해도 충성하게 된다. 요셉처럼 종으로 살 때도 충성하고, 감옥에서 살 때도 충성하고, 그리고 궁전에서 총리로 살 때도 충성한다. 요셉은 체질이 충성된 자였는데 참으로 충성된 자의 바른 자세라고 본다.

끝으로 성도는 어디에서나 개혁자가 된다. 참 성도는 맛없는 곳에 가서 맛있는 곳으로 변하게 하는 개혁자가 되고, 변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변하게 하는 개혁자가 되고, 침체된 곳에 활기를 불어넣는 개혁자가 되고, 미움의 땅에 사랑을 심고 무질서한 곳에 질서를 심고 이기심 때문에 다투는 곳에 자기가 먼저 희생하는 개혁자가 된다.

이 개혁적 사명은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권사나, 그리고 평신도나 다 같다. 목사와 장로가 아닌 평신도라도 개혁의 사명을 가지는 것은 동일하다. 한국교회는 목사와 장로만 변하면 변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평신도가 변하면 더 무섭다. 개혁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개혁도 있지만,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개혁도 있다. 그렇게 많은 국민이 촛불을 드니까 대통령도 물러났다. 지금 태국에 부는 민주화 바람이 철옹성처럼 견고한 태국 왕궁까지도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기도 불이 꺼진 냉랭한 교회에 중고등학생들 몇 명만 은혜를 받으면 기도 바람이 일어난다. 기도하지 않던 장로 권사들도 다 기도하러 나오게 된다. 신학도 신학자들이 만들고 이끌어 가지만, 그러나 평신도가 용납하지 않는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사실은 개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지도자만이 아니다. 평민들도 마찬가지다. 자기들을 위하여 개혁을 하려고 해도 우매한 백성들은 반대한다. 변화가 싫어서도 그렇지만 기득권층에 줄을 서서 그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살아가려는 자들의 미련 때문이다.

성도와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을 거부하는 성도와 교회는 쇠퇴하고 타락하고 만다. 칼빈은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했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듯이 교회는 늘 개혁하지 않으면 부패하고 만다. 죽을 때까지 개혁하다가 가야 잘 사는 것이고, 잘 믿는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무엇인가?

우선 진정한 개혁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가짜 개혁은 개혁이 아니고 참 개혁을 방해하고 혼돈하게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악이다. 진정한 개혁은 세 가지다.

첫째, 진정한 개혁은 자기 개혁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항상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기 비판의식이 없으면 신앙적 오류와 도덕적 부패에 스스로 저항할 수 없게 되고, 그런 자의 개혁은 위선이 되어 힘을 가지지 못한다. 죄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자기를 비판하며 살았다. 바울 고린도전서 9:27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5:31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다.

최대의 개혁자 요시야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는 개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왕이다. 같은 문제에 대하여도, 야당 때는 변화를 외치지만 여당이 되면 안정을 외친다. 그렇다면 요시야는 개혁을 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부터 말씀에 근거하여 철저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줌으로 이방 우상숭배에 젖어 있던 백성들을 회개시키고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열왕기하 22:2에서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했고, 열왕기하 23:25에서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고 했다.

기독교인의 개혁은 남을 개혁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개혁하는 것이다. 중세의 교회가 타락한 이유는 남은 개혁이란 이름으로 죽이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을 개혁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개혁은 자기 개혁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앙생활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인격과 성품을 끊임없이 개혁해 나가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개혁의 고삐를 풀어놓으면 바로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사실 누구나 자기 개혁만 잘하면 어느 공동체나 문제가 없고, 살아나게 된다. 종교개혁의 대상은 나와 내 가정이며 내 교회다. 개혁은 구호가 아닌 ‘변화한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개혁자는 불의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그 불의가 내 속에 있든, 네 속에 있든, 내 사랑하는 친구나 내 부모나 내 자식 속에 있든 그것을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불의하고 모순된 꼴을 그냥 보고 지나지 못하는 성품을 가졌다. 한국에서도 자동차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분들과 자주 싸워서 경찰서에 가기도 하였는데, 안수를 받은 후에는 담배를 피우는 자가 있으면 자동차에서 그냥 내려 버렸다. 미국에서 자동차 속에서 담배 피는 흑인에게 담배를 피지 말라고 타 일렀더니, 옆에 있던 친구로부터 ‘총 맞아 죽으려고 환장을 했냐’는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 필자는 우연히 목격한 자동차 사고에도 자처하여 증인이 되겠다고 명함을 주고 오고,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집단으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목격하였을 때에도, 그들에게 충고하다가 큰 봉변을 당할까 두려운 마음이 있지만,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천 사람이 보기에 다 불의한 일임이 교회나 노회나 총회에서 버젓이 일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왜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뒤에서는 악한 일이라고 성토도 하면서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자기에게 찾아올 불이익에 대한 계산 때문일 것이고, 또 진심은 자기도 그 곳에 줄을 서서 그 이익을 보고 싶기 때문은 아닐지 모르겠다.

인도네시아에서 자국인 가이드가 자기 나라 공무원들이 부패한 것에 대하여 성토하고 분해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었더니, 어제 한 말은 잊기라도 한 듯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것이 개혁이라면 개혁은 불평꾼의 불평 정도가 되고 말 것이고 그런 자를 통하여 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아무리 불의한 정권이라도 장관이 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전두환 정권 때를 보면 알 수 있다. 비록 아웅산에서 대부분 그들을 잃고 말았지만, 당시 내각은 우리나라 내각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분들로 이루어졌다고 평가한다. 물론 그들 중에 전두환을 지지하거나 장관 자리가 탐나서 입각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들어간 사람도 있고, 실제는 그렇지 않아도 형식상 그렇게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합리화될 수 있다면 아무리 불의한 일, 불의한 단체, 불의한 조직에 가담하고 내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해도 잘못이 없다는 말이 되고 만다.

한국교회에 200-300여 개의 교단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사실 10여 개 교단이 한국교회 90-95%의 교인들을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도 예장 통합측이 가장 의로운 교단이라고 본다. 기독교 윤리학자들도 그렇게 본다. 그런데 세습 문제 후에 급격하게 타락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고 분노가 치민다.

필자가 속한 노회에서 이번 가을에 서로 임원으로 뽑아 달라고 문자질을 하고, 거기에 담임 목사까지 합류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문제의식도 없다는 것이 더 한심한 일이다. 모 교단은 교세가 통합교단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노회 숫자가 100여 개가 많다. 그 이유는 그래야 노회장을 할 수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런데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터인데 오히려 자랑한다는 점이다. ‘명함에 직책이 많을수록 사기성이 높다’는 말은 진리인지도 모른다.

최고의 개혁자는 누구인가? 루터인가? 칼빈인가? 아니다. 우리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한 편으로는 부패했던 종교적 현실과 맞서 싸우며, 한편으로는 당시 죄인으로 불렸던 가난하고 억눌린 자, 병든 자,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을 찾을 때 구원하셨다. 구원자 예수님처럼 한없이 온유하신 분이 없으시지만, 또 개혁자 예수님처럼 무서운 분도 없으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단호해야 한다. 예수님과 같이 하면 된다. 예수님보다 더 온유할 자도 없고, 예수님보다 더 의로울 자도 없다. 예수님처럼 세리와 창녀들에게 천국문을 활짝 열어주어야 하지만, 불의한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에 대하여는 채찍도 들고 상도 뒤집어엎어야 개혁자다.

우리는 신앙과 생활이 이원화된 한국교회 신앙행태에 대하여, 교회 개혁의 걸림돌이 되어 버린 정치꾼 목회자와 장로들에 대하여, 세습하는 대형교회들에 대하여, 이단 앞잡이하고 세습 옹호하며 먹고 사는, 필자의 몸에 붙은 기생충과 같은 부패한 언론들에 대하여 분을 내고 채찍질을 해야 한다. 또 기복신앙과 물량주의, 동성연애 지지자들, 자유주의자들, 지방색, 금품선거, 교회 직분을 명예로 생각하고 그걸 차지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력들과 싸워야 한다.

누구나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개혁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 목사 숫자가 무려 13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 개혁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산불도 작은 불씨 하나로 이루어진다. 비록 악한 무리가 비록 미사일 부대와 같다고 해도, 개혁자는 소총이 아닌 새총을 하나 들고 있다고 해도 들고 나가 싸워야 한다. 한국교회에는 숨은 개혁자들이 많다고 본다. 그들의 힘을 합하여야 한다.

우리 개신 교회가 8만 개라고 한다. 교회들마다 교회에 하나의 교회를 더하지 말고, 개혁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한다면 그 교회는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이 땅에 존재해야 할 이유와 가치가 있는 교회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교회가 더 이상 생길 이유도 없다.

개혁이란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드는 것이다. 영어로 개혁을 ‘reformation’라고 한다. ‘Re’라는 말은 ‘다시’라는 말이고 ‘Formation’이란 말은 ‘형식’을 의미다. 그렇게 보면 종교개혁은 Re-formation이라기보다는 오히려 Trans-formation이라고 해야 좋겠다고 한다. 새 포도주는 절대도 새 부대에만 담아야 한다. 새 부대로 바꾸어야 한다. 한국교회를 바꾸어야 한다. 총회도 바꾸어야 한다. 노회도 바꾸어야 한다.

둘째, 진정한 개혁은 마음의 개혁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가장 개혁을 많이 한 최대의 개혁자 두 왕이 있다. 물론 남왕조 4번째 왕인 여호사밧도 개혁을 많이 하였지만, 히스기야와 요시야에 미치지는 못한다. 이보다 더 훌륭한 개혁자는 없었다. 히스기야는 나이 2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29년 동안(BC 715∼687) 통치한 유다의 13대 왕이다. 요시야는 분열 유다 왕국의 16대 왕으로 무려 31년(BC 640년경-609년경)이나 통치한 왕이다. 요시야는 히스기야 후 3대째로 왕이었고, 그것도 남왕조가 20대 왕 시드기야 때 나라가 망한 것을 보면 요시야는 남왕조 후반기의 왕이다.

이들 모두 철저한 개혁자였다. 형식적으로 보면 이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왕이 무려 60년이나 한 종교개혁인데 왜 망해가는 남왕조 유다를 살려내지 못하였느냐는 것이다.

마음의 개혁이 되지 않아서다. 우상 숭배자들을 죽이고, 폐위시키고, 죽은 자의 무덤을 파서 그 뼈를 빻아서 기드론 시냇가에 뿌림으로 개혁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형식상 누가 감히 우상을 숭배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마음은 아니었다.

한국교회 한 신학교가 문제가 많아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결국 관선 이사가 들어가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새 총장이 들어가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그런데 한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저 학교는 원래 문제 자체가 없었던 학교다.” 그 때 그 총장이 “이제 개혁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다. 뿌리 깊은 마음의 죄까지 개혁되려면 많은 아픔을 감당해야 하고 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어야 한다. 그러면 필자는 감동도 받았을 것이고 그분을 존경도 했을 것이고, 그 학교와 그 교단에 더 큰 소망을 가졌을 것이다.

한 공동체는 그리 쉽게 개혁되지 않는다. 문제 많은 가정도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개혁을 하면 일단 그 대상자들은 움츠린다. 그러다가 습기와 온도만 맞으면 피어오르는 곰팡이처럼 다시 피어오른다. 문제는 마음이다. 마음이 개혁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개혁을 하면 피곤하고, 특히 기득권 세력은 손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개혁하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면서도 내 책임이라는 것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요지 중 하나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바꿔주실 수 있는 그 마음의 변화, 하지만 변화되지 않으면 그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믿음이란 바로 마음의 변화를 동반해야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마음의 변화가 나의 의지적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먹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변화가 개혁이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셋째, 진정한 개혁은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천주교가 그렇게 부패한 것은 성경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은 말씀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중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최고의 모토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다. 로마 가톨릭에서 내세우는 교황의 교서나 주교회의의 결정문이나 또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의식이나 제도, 어떤 관행이나 습관보다 하나님 말씀에 주권이 있음을 주장하자 개혁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신앙의 원리요 기초인데도 천주교는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천주교인이 하는 고백이다. ‘왜 천주교는 교리 공부는 많이 시키는데 성경 공부는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천주교의 본래 모습이라고 본다.

당시 로마 가톨릭의 교권주의자들은 평신도들로부터 의도적으로 성경에 접할 기회를 차단하였다. 마틴 루터가 개혁운동을 벌일 때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반포함으로써 사제들의 전유물로 감추어져 있던 성경을 백성들이 직접 읽고 깨닫게 하였다. 사실상 이 일이 종교개혁을 성공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된 것이다.

우리가 따라야 할 가장 강력한 최종의 권위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다. 모든 것을 최종권위인 성경에 비춰서 잘못된 것이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물어보고 실행해야 한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말씀의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정확하게 발견하고 범죄한 자기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 불만이나 욕망은 개혁이 아니다. 자기 뜻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것도 개혁이 아니다. 그것들은 위장된 개혁이다. 오직 말씀이다. 말씀으로 돌아가면 된다. 말씀을 사랑하면 된다.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면 된다. 성경을 사랑하면 된다. 말씀으로 가고, 말씀으로 멎으면 된다.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고, 말씀이 멎으라고 하면 멎자.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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