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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난을 통한 기도

기사승인 2020.11.09  14: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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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4)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 김정훈 교수

야곱의 기도(1): 서원(誓願) 기도(창 28:10-22)

1) 기도의 정황

본문의 주인공은 야곱이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와의 사이에서, 사해 서쪽에 위치한 네게브(그랄이 이 지역에 속함)에서 아들 쌍둥이 중 둘째로 태어났다(참조. 창 24:62, 67; 25:7-8; 26:1). 때는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나이 160세, 아버지 이삭의 나이 60세가 된 무렵이었다(창 25:26). 할머니 사라는 사망한 지 23년이 지난 때였다(창 23:1). 아브라함이 175세에 사망하였으므로(창 25:6), 야곱은 적어도 15년 동안 할아버지에게서 직접 신비로운 하나님의 언약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물론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서도 가문에 내려오는 그 신비한 이야기와 아버지가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일들에 대해서도 들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또한 야곱은 15세 이후 청년 기를 지나 77세가 되어 밧단아람으로(홀리원 바이블, 14) 피신 여행을 떠날 때까지 부모의 삶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자신이 직접 족장이 되어 가정을 이끌어 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삭이 40세에 결혼하여(창 25:20) 60세에 낳은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마치 싸우는 것처럼 경쟁하였다. 출생 시에는 에서가 먼저 나왔는데, 야곱이 질세라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따라 나왔다. 이삭과 리브가가 이 두 아이를 보니 쌍둥이임에도 여러 면에서 서로 달랐다. 에서는 피부가 붉고 몸에 털이 많은 반면, 야곱은 피부가 희고 몸이 매끈하였다. 둘이 성격도 서로 달랐다. 에서가 외향적이고, 남성적이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사냥하기를 좋아했던 반면, 야곱은 내성적이고, 여성적이고, 집에 있기를 좋아하였다. 에서는 기진맥진한 채 헐떡거리며 집에 들어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이었다. 집에 있던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는데, 이 날도 에서는 활을 둘러맨 채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되어 집에 들어왔다. 팥죽을 본 에서는 야곱에게 팥죽 좀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야곱은 에서가 자기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면 줄 수 있겠다고 응답했다. 장자의 명분은 기본적으로 가문의 우두머리 지위, 곧 형제와 전 가족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한다(27:29). 또한 그것은 최우위의 재산 상속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장자는 부모의 재산을 상속할 때 가장 많은 몫을 받는다.

   
 

하지만 야곱이 형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한 것은 범상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가족 통솔권과 재산상속권 획득을 위해 그런 요구를 한 것 같지 않다. 결과론적으로, 이후에 전개된 일들을 보면 야곱의 행동은 치밀한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얼떨결에 나온 행동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된 행동이라는 말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직접 들려준 하나님의 계시 이야기가 인간이 꾸며낸 신화가 아니라 실화라는 데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경외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아브라함은 손자 야곱이 15세가 될 때까지 생존해 있었다. 야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갈대아 우르에서 “하 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은 이야기, 이 약속에 대한 수차례의 확인 사건들, 피의 언약체결 사건,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나가 대승한 이야기, 하나님이 직접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 소돔과 고모라 심판 사건, 할머니 사라가 임신하고 아버지 이삭을 낳은 이야기,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모리아산에 올라갔다가 “여호와 이레”를 체험한 이야기 등 수 많은 실화들을 들으며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 이삭이 어머니 리브가가 결혼한 후 20년 동안 아이가 없어 하나님께 자녀를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응답받아 낳은 자녀가 자기와 형 에서라는 이야기와 자기가 쌍둥이로 태어날 때 기를 쓰며 경쟁하듯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다는 이야기는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도록 자극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야곱에게는 할아버지가 들려준 언약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게 마음에 새겨졌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이 할아버지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 아버지에게도 나타나셔서 동일한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창 26:1-4, 24) 그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것에(참조. 창 26:16, 22, 28-29) 감동과 신비를 느꼈을 것이다. 나는 야곱이 에서에게 원하는 팥죽을 줄 것이니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한 것은 단지 장난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야곱은 형의 장자의 명분을 자기가 차지하는 것이 아직은 막연해 보이지만 할아버지 (아브라함) 때부터 받은 축복의 약속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라고 본다(참조. Keil & Delitch).

야곱의 제의에 에서는 덥석 걸려들었다. 에서는 그만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기고 말았다. 에서는 야곱과 동일동시에 먼저 태어난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 일인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기록을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은 상속권과 상속받을 물건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양 3마리에 상속받은 토지를 팔아 버렸다고 한다. 아마 유목민들에게는 토지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에서도 “당장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다 뭐야, 하나님의 축복 약속이란 게 다 뭐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장자의 명분 같은 것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에서의 처신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경홀히 여기는 행위였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불신하는 행위였다. 그는 무엇이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인지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에서가 자기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아넘긴 후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야곱이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챈 사건이었다. 두 사건 사이의 기간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먼 훗날 야곱이 요셉의 주선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들어갈 때의 나이가 130세이고(창 47:9), 사망할 당시 나이가 147세이고(창 47:28),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된 것이 30세 때이고,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갈 때 나이가 17세였던 점을 고려하면서 역산(逆算)해 보면 야곱이 형의 축복을 가로챈 후 형의 살해 위협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칠 때의 나이가 그리 젊었을 때가 아니라 고령인 77세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에서는 40세에 이방인(헷족속) 여자 유딧과 바스맛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창 26:34), 이 일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창 26:35). 아마도 두 부부는 부모된 입장에서 에서와 야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특히 리브가는 에서의 행동을 보며 두 아들이 복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이들에 대해 예언하신 내용(25:23)과 남편 이삭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26:2-3)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삭의 나이 137세 무렵이었다. 눈이 침침하여 사물을 잘 식별하지 못하는 그는 어느 날 맏아들 에서를 불러 자기가 이제는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짐승을 사냥하여 자기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오면 죽기 전에 그에게 마음껏 축복하고 싶다고 했다(창 27:1-4). 아마도 이삭은 평소에 건강이 썩 좋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180세까지 살았으니 이후로도 43년이나 더 살았는데, 그의 시력은 매우 좋지 못하였고, 자신도 너무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에서도 그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창 27:41). 리브가는 남편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듣고 야곱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리브가는 야곱과 모사를 꾸며 야곱을 털이 많은 에서처럼 변장하게 하였고, 염소 새끼 두 마리를 잡아 별미를 만들어 이삭을 대접하도록 했다. 리브가의 행동은 평상시에 그녀가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 계승되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리브가와 야곱 간에는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침묵의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리브가와 야곱의 언약의 복 탈취 작전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삭은 야곱이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안력(眼力)이 약하여 그가 야곱인지 분별하지 못하였다. 이삭은 야곱에게 “음성은 야곱인데 손은 에서로구나”라고 하며 의아해 하면서도 에서의 손처럼 털이 만져지는 것을 확인하고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고 이삭에게 마음껏 축복하였다. 이 축복의 핵심 내용은 풍성한 재물을 얻을 것과 만민의 섬김을 받고 열국에 대해 통치권을 가질 것과 수많은 사람 앞에 복의 표상이 될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 아브라함 때부터 주신 축복의 언약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개진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에서가 뒤늦게 사냥에서 돌아와 별미를 만들어 이삭에게 갖고 갔을 때, 이삭은 심히 크게 떨며 이미 축복은 끝났고 축복을 받은 야곱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창 27:30-34). 이삭이 두려워하며 떨었던 이유는 리브가가 임신을 하고 복중에서 두 아이가 서로 싸울 때(25:21-22) 하셨던 말씀 곧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라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삭은 순간 이렇게 해서[자기의 축복 행위] 그 예언이 성취되어 갈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삭은 에서에게 말했다: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27:35). 이 말을 들은 에서는 이삭에게 매달리듯이 말했다: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27:36). 에서의 이 하소연은 그가 장자의 명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인식과 실천을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고 인식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고 실천을 소홀히 하기가 쉽다.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을 인식하고 고백하면서도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내포된 축복의 약속을 계승해 나가는 데는 실패한다.

에서는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으로 탈취해 갔던 일을 새삼 떠올리며 “이 자식이 내가 받아야 할 복까지 가로챘구나”하는 생각에 분노하였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에게 뭐라도 남겨놓은 축복이 있으면 빌어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이삭의 대답은 오히려 야곱을 에서의 주로 세우고 야곱의 모든 형제를 야곱에게 종으로 주었다고 하며(창 27:37), 에서는 척박한 주소지에서 칼을 믿고 살며, 야곱을 섬길 것이고, 속박에서 벗어날 때 목에 태워져 있던 멍에를 떨쳐버릴 것이라고 하였다(창 27:39-40). 아버지와의 대화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에서는 야곱이 자기의 축복을 가로챈 것에 분노하여 증오심과 살인 의지를 품었다(창 27:41-42). 인간이 자기 속에 무엇을 경작하고 있고 무슨 싹을 키우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성령과 더불어 순종하며 사는 중에 생명과 평안을 산출한다. 그러나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고 그의 법을 대적할 뿐 아니라 그에 불복종하며 사는 중에 결국 사망에 이른다(8:5-7).

야곱과 함께 축복 탈취 사건을 공모하고 결행했던 리브가는 에서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어떻게든 야곱을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리브가는 남편 이삭에게 에서와 야곱 사이에 일어난 일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충분히 설명했을 것이다(참조. 창 27:46). 이삭은 조용히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창 28:1),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지 말고 밧단아람으로 가서 외삼촌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으라고 당부하며(창 28:2), 하나님이 아담에게 언명하셨던 생육과 번성의 복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의 실현을 기원하였다(창 28:3-4). 이삭은 아브라함에 대한 복의 약속이 아담 언약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35:11-12도 볼 것). 이삭과 리브가는 단순히 야곱 보호 차원을 넘어서서 그가 어떻게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삭은 입장은 야곱이 가나안의 딸들 중에 아내를 맞지 말고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의 딸들 중에 아내를 맞아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차별 의식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구별된 언약 백성 개념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타당한 것은 이삭이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반의 아버지 브두엘은 아브라함의 형제 중의 하나인 나홀의 아들이었고,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는 데라였다. 데라는 아들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이주 명령(일 종의 언약)을 듣고 가장으로서 큰 결단을 내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족들을 이끌고 하란 땅으로 이주했던 인물이다(창 11:31). 아무튼 야곱은 증오심에 불타는 형 에서의 살해 위협을 모면하기 위해 부모의 권고를 받고 밧단아람으로 피신여행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2) 기도의 계기

(1) 황량한 사막
야곱은 살기 등등한 에서를 피해 멀리 북동쪽에 위치한 밧단아람 외삼촌댁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가 떠난 곳은 브엘세바였는데(창 28:10), 밧단아람은 브엘세바로부터 약 900km 떨어진 곳이었다(홀리원 바이블』, 121). 이 도시는 일찍이 수백 년 전에 데라와 아브라함과 롯이 머물렀던 지역이다.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탈취한 후에 어머니와 공모하여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것은 그의 거룩한 욕심 때문이었다. 야곱의 욕심은 그를 황량한 사막으로 내몰았고, 이로 인해 그는 끝없는 고독에 몸부림쳐야 했다. 하지만 허허벌판의 고독과 공포는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야곱은 집을 떠나던 날 발길을 재촉하여 약 70km 정도를 이동했다. 야곱은 더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피곤에 지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는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싸준 빵을 몇 입을 먹고, 둘러메고 온 가죽 부대의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옆에 있는 돌 하나를 끌어다가 베개 삼고 누웠다. 그는 황량한 사막에서 널부러진 채 가느다란 숨을 쉬며 홀로 누워있었다. 여전히 “죽이고야 말겠다”는 형 에서의 성난 목소리가 자기를 뒤쫓는 것 같았다. 또 자기 마음속에선 “과연 네가 한 일 이 잘한 짓이냐?”하는 양심의 소리가 심장을 치는 것 같았고, “과연 다시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용서를 빌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형에게 사과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머니 얼굴을 다시 뵐 수 있을 것인가?”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불안감과 좌절감을 증폭시켰다.

캄캄한 밤, 하늘에 총총한 별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야곱은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뒤척이다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돌베개를 하고 웅크린 야곱은 사막의 늑대들에게 던져진 먹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추위와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야곱은 마치 사막에 버려진 존재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죽음처럼 무서운 거친 사막에 홀로 쓰러져 있는 야곱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축복의 언약에 욕심을 내다가 이처럼 속수무책의 위기에 처한 야곱을 버리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전쟁을 치른 후 두려움에 사로 잡힌 그에게 나타나시어 처음 그에게 주셨던 축복의 언약을 재확인시켜 주셨던 것처럼, 홀로 사막에 누워 잠든 야곱에게 나타나셨다.

(2) 사닥다리 환상
잠에 떨어진 야곱은 꿈을 꾸었다. 야곱은 꿈속에서 아주 신비한 일을 목격하였다. 그의 머리맡에는 사닥다리(쏠람. 계단 같은 것)가 하나가 서 있었다. 사닥다리가 얼마나 높은지, 그 끝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웬 사닥다리가 하늘까지 뻗쳐 있을까?” 감탄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사닥다리 위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천사는 야곱의 모든 슬픔, 공포, 불안, 고독, 후회, 절박, 이 모든 것을 한 보따리 싸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잠시 뒤에 하나님의 위로, 용서, 사랑, 보호의 약속을 한 보따리 싸서 다시 야곱에게로 내려왔다. 먼 훗날 예수는 야곱의 사닥다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사실을 넌지시 말씀해 주셨다(1:51). 야곱이 본 사닥다리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서 계셨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을 소개하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 28:13).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아버지 이삭은 아직 살아 있으니 말할 것도 없고, 할 아버지 아브라함은 죽었으나 실상은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잠시 후에 하나님은 위험에 처한 자식을 보고 깜짝 놀란 아버지처럼 사닥다리 꼭대기에 서셔서 야곱에게 약속의 말씀을 보내셨다(창세기 28:13-15).

13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네 가지 약속을 담고 있다. 첫째, 야곱에게 무수히 많은 후손을 주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둘째, 하나님이 항상 야곱과 동행하심으로 그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셋째, 야곱을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다. 넷째, 하나님이 야곱에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항상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다. 첫 번째 내용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약속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야곱의 선조 때부터 주신 약속들을 잊지 않고 이행해 가신다. 나머지 세 가지 내용은 야곱에게 적용되는 약속으로 동행과 보호, 귀향(회복), 임재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 때부터 주신 축복의 언약 위에서 야곱에게 절실한 플러스 알파의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약속을 받은 야곱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꿈속에서 본 사닥다리 환상을 계기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3) 기도의 내용

야곱은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닥다리 환상 속에서 하늘 꼭대기 위에 서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언약의 말씀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너무도 감격하여 벌떡 일어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라고 탄성을 질렀다. 하나님의 임재를 지진처럼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거룩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7절). 그는 자기가 누웠던 바로 그곳이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며, 바로 그곳이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고 느꼈다. 그 순간 그는 베개로 삼았던 돌을 취하여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칭하고, 하나님께 서원(誓願) 기도를 드렸다. 돌기둥을 세운 것은 서원의 기념석을 세운 것을 뜻하고, 기름을 부은 것은 그곳을 거룩한 장소로 의미 부여를 한 것을 뜻하고, 그곳을 벧엘이라 명명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당당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을 뜻하고, 서원 기도를 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답게 살 것을 굳게 맹세한 것을 뜻한다.야곱은 서원 기도를 하며 세 가지 조건을 걸었다. , 자기가 제시하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 주시면 자기의 서원을 이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세 가지 조건이란 첫째,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지켜 주시면, 둘째,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면, 셋째,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면이었다. 이 세 가지 조건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가고 있는 자기의 길에 동행해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에 대한 요청이고, 육신에 필요한 음식과 옷을 공급해 주실 것에 대한 요청이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요청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 것은 야곱이 꿈속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 곧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5)고 하신 약속을 부여잡고 하는 기도다. 이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끝없는 사막에 홀로 있는 야곱으로서 하나님의 동행과 보호, 귀향의 은총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었다. 또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귀환한다는 것은 잠시의 굴절을 멈추고 하나님의 언약의 청사진(무대)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즉, 언약의 후손이 자기가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을 뜻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로(歸路)에 하나님의 동행 과 보호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또 유랑생활이 예측되는 야곱에게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은 육체의 생명과 보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야곱의 기도는 너무도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외견상 그의 기도는 너무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은 소소한 것까지 챙기는 야곱을 귀엽게 보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눅 11:3)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강함과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까지 그분께 맡기고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먹을 것을 주세요, 입을 옷을 주세요, 내 길을 인도해 주세요, 보호해 주세요, 회복시켜 주세요라고 하는 청원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함부로 서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고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시 15:4). 하나님은 우리의 서원에 주목하시고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서원이 필요한 순간에는 야곱처럼 언약의 지도를 펼치고 그 근거 위에서 서원 기도를 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왜 야곱은 하나님이 꿈속에서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13-14절)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인가?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 최초로 그에게 주셨던 “언약의 원본”과 같은 말씀이다. 야곱은 이 말씀을 잊은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사실 그는 이 언약에 대한 확신과 그에 따른 행동 때문에 현재의 위기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야곱은 장차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에게 수많은 후손이 태어나고 자기와 자기 후손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는 이 거시적이고도 어마어마한 약속에 대해 무어라고 언급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약속에 대해서는 잠시 심장 깊은 곳에 묻어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곱은 자신이 내건 위 세 가지 조건을 하나님이 충족시켜 주시면 자기가 세 가지 사항을 준행하겠다고 서원하였다. 그는 첫째,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길 것이며, 둘째, 자기가 세운 돌기둥을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할 것이며, 셋째,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첫 번째 서원은 오직 하나님만 자기의 왕으로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의 인도와 통치를 받으며 살겠다는 맹세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오직 그만 따르며 그에게 순종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서원은 하나님의 현현의 장소(벧엘)와 기념 돌을 잊지 않고 경건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살겠다는 맹세다. 세 번째 서원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실현을 위해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맹세다. 야곱이 이 십일조 서원을 어렵지 않게 한 것을 보면, 그는 아브라함 때부터 물질적 헌신의 의미에 대해 비중 있게 배웠던 것 같다. 아브라함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시날왕 아므라벨의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의 1/10을 주었다(창 14:18-20). 야곱 시대 이후 하나님은 아론에게 레위 지파에게는 땅의 기업이 없겠고 대신 다른 지파들이 레위 지파에게 1/10을 주어 생활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민 18:20-24; 수 18:7). 단, 레위 지파에게는 거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물을 둘 들판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수 14:3-4). 하나님은 레위 지파가 다른 지파들로부터 1/10을 받되 다시 그것의 1/10을 하나님께 거제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민 18:25-28). 말라기 선지자는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사실을 언급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다고 지적하였다(말 3:7-10).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밧단아람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직도 수백 킬로미터 이상 더 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더이상 두려워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었다. 창세기 기자는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창 29:1)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길을 떠나”는 히브리어로 이쌰인데, 이 단어는 “둥둥 떠서 날아가다, 공중에 들리어 날아가다”를 뜻한다. 하나님을 만난 야곱이 그럴 만하지 않았겠는가? 자연스럽게 이 서원을 한 것을 보면 말이다.

4) 기도의 응답

야곱이 하나님께 세 가지 조건을 걸고 세 가지 맹세를 하며 드린 서원 기도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야곱은 무사히 밧단아람에 도착하였고, 외삼촌 라반(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의 도움 가운데 그의 딸들(레아와 라헬)과 결혼하였고, 딸들의 여종들도 아내로 맞았다. 야곱은 밧단아람에 거하는 동안 네 아내에게서 열 한 아들을 낳았다(창 31장). 땅의 티끌과 같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수많은 후손을 주어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해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밑그림을 보는 듯하다. 야곱은 라반의 목축업을 도우며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고,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보호 가운데 밧단아람에 주하다가(31:5, 29),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31:3, 5, 13) 20년 만에(31:38) 가나안으로 귀환하여 아버지와 재회하였다(35:27). 이때 이삭의 나이는 157세였고, 야곱의 나이는 97세였다. 야곱은 이후로도 50년을 더 살았다(창 47:28).

하나님은 야곱에게 귀환명령을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창 31:13). 이 말씀은 야곱이 벧엘에서 절박한 중에 당신께 서원했던 것을 잊지 않고 계시며 야곱이 그대로 이행하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족장시대에 언약의 후손들이 머물러야 할 곳은 가나안 땅(하나님의 백성의 거주지 상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불행히도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 요단 서편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후에도 벧엘로 가지 않고 먼저 세겜으로 들어갔다가 외동딸 디나가 그곳 사람들로부터 강간을 당하는 참상을 겪어야 했다(창 33:18; 34:1-7). 이 비통한 사건 후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창 35:1)고 명령하셨다. 이는 서원 기도의 무게가 얼마나 중한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당신께 경배한 후에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셨고(창 35:10), 언약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갱신해 주셨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창 35:11-12)고 하셨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약속의 재확인이며, 이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이 아담 언약의 토대 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주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고(창 35:13), 야곱은 이때에야 비로소 전에 벧엘에서 서원했던 약속을 이행하였다: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창 35:14-15). 야곱의 이 상징적 행위의 의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구속 사역을 완수하게 하시고, 역사 속에 교회가 탄생하게 될 때 드러날 것이었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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