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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중용의 신학자 윌리엄 이언 헤즐렛

기사승인 2020.11.11  11: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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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지도자들에게 한국교회의 길을 묻는다(14)

사회: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대담: 윌리엄 이언 헤즐렛(William Ian Hazlett)/ 독일 뮌스터 대학교 박사,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 명예 박사, 아일랜드 장로교 신학대학원 명예 박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대학교 교수 역임,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 교수 역임, 영국 학술원 연구교수 역임,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교 교수 역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왕립 교수, 글래스고 트리니티 칼리지 학장 역임, 스코틀랜드 교회사학회 회장 역임, 마르퀴즈 후스 후(Marquis Who’s Who)에 탁월한 종교학 교육자로 등재

대담 원문 번역: 이우정 기자

   
▲ 윌리엄 이언 헤즐렛 교수

최은수 교수: 교수님과 인상적인 첫 대면을 한 이후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대영제국의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은 남한과 북한이 한국 전쟁 이후 휴전을 한 사실을 모르고 여전히 전쟁 중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어떤 지인은 당시에 한국에서 전쟁이 한창 치열할 텐데 어떻게 빠져나와 여기까지 왔냐고 해서 한참 동안 웃었던 기억도 납니다. 제가 영국에 도착한 계절이 초가을 정도 되었는데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라고 느낄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제가 처음에 중세기를 연구하고 싶다고 했을 때 고전학과로 보내셔서 라틴어를 듣도록 하셨지요. 그때 정말 좋은 기억을 간직할 수 있었고, 반면에 라틴어 강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도가 빨리 나가서 정신이 없었지요. 당시 고전학과의 라틴어 교수님은 까운을 걸치시고 고전, 중세, 그리고 라틴어로 노래도 부르시고 일상 대화도 하시고 등등 제가 도무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진도가 빨라서 무척 당황했었지요. 하지만 모두 좋은 추억입니다. 제가 중세에서 종교개혁 이후의 장로교회사로 전공을 바뀌었을 때에도 여전히 지지해 주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죠. 참으로 슬픈 일은 제가 박사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의 박사 지도교수셨고 전도 유망하셨던 더글라스 머레이 교수님이 위암으로 갑자기 생을 마감한 것이었습니다. 교수님도 충격과 함께 안타까우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시에 모든 신학부 관계자들이 그랬으니까요. 제가 그 소식을 듣고 신학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직원분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슬픔에 잠겨 있는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평생을 신학자로 살아오시면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가인 마틴 부쳐에 대한 연구로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 중 한 분으로 자리매김을 하셨고, 네 개의 왕국으로 이루어진 영국의 종교개혁사 분야에서도 탁월성을 인정받고 계십니다. 교수님이 언제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사가가 되기로 결심하신 특별한 계기나 동기가 있으셨나요?

   
▲ 윌리엄 교수의 역작인 영국과 아일랜드의 종교개혁사

윌리엄 이언 헤즐렛 교수: 저는 늘 역사를 좋아했고 중학생이던 시절 역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부생일 때 북아일랜드의 퀸즈 벨파스트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류스대에서 신학 학사를 공부할 때에도 사학을 전공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교회 사역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아일랜드의 장로교 목사셨던 아버지께서 교회사를 더 공부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고 저의 가까운 삼촌이자 교회사/예배학 교수 존 M. 바클리(John M. Barkley) 박사도 저에게 교회사 공부를 제안하셨습니다. 세인트 앤드류스에 재학 중일 때 교회사가 제임스 휴스턴 백스터(James Houston Baxter)와 유안 카메론(Euan Cameron)의 아버지인 제임스 커 카메론(James Kerr Cameron)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가 지냈던 오래되고 조그마한 도시, 세인트 앤드류스 시도 저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인트 앤드류스 시의 경우, 그 당시까지 장장 1400년의 교회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카메론 교수님은 제가 독일에서 박사 공부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주셨고 저는 실제로 독일에서 박사 공부를 했는데, 독일에서의 공부를 통해 교회사가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와 파리, 또 스위스 제네바에서 그랬던 것처럼 독일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교회사에 정통한 여러 학자들을 만나고 그분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다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받았던 영향과 여러 요인들이 저로 하여금 교회사가의 길을 가도록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사가가 된 주요 동기로는 넓게는 기독교의 기원과 전통에 대한 관심, 또 구체적으로는 종교개혁사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방금 언급한 사안들에 대해 널리 퍼져있는 의견들이 비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잘못 알려지거나 이해되는 경우가 많죠.

최은수 교수: 저도 세인트 앤드류스를 방문할 때마다 교수님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교수님이 연구하신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가 마틴 부쳐는 칼빈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나중에 잉글랜드로 망명하여 캐임브릿지에서 왕립 교수로 가르치면서 영국의 청교도주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압니다. 교수님께서 특별히 마틴 부쳐를 연구하게 되신 이유가 있었는지요?

윌리엄 이언 헤즐렛 교수: 처음 독일에 갔을 때는 필립 멜랑히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뮌스터대에서 저를 지도하셨던 로버트 스터페리치(Robert Stupperich) 교수님이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가 마틴 부쳐를 연구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죠. 부쳐는 루터, 에라스무스, 멜랑히톤, 츠빙글리, 불링거, 칼빈, 영국 국교회, 재세례파, 일부 로마 가톨릭 신학자 등 다양한 사람과 개인적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부쳐가 초교파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쳐는 교회가 여러 분파로 나뉘고 분열되는 것이 믿음을 거스르는 일이며 그리스도께 해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에 반대했죠. 아일랜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저는 기독교 분열과 분파간 싸움에 익숙했습니다. 제가 부쳐를 좋아했던 또 다른 이유는 부쳐가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거나 자신과 다른 신학을 따르는 신학자들을 나쁘게 말하거나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신학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지요. 부쳐는 강한 신념을 가진다는 이유로 그 신념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잔인하고 무례하고 버릇없이 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뮌스터에는 독일어와 라틴어로 쓰인 부서의 원문 저작의 현대 비평판을 연구하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들이 1차 자료와 여러 전문가의 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우 좋은 환경이었죠. 제가 연구한 분야는 부쳐의 성찬 신학이었습니다. 종교개혁 교회들이 이 논쟁적인 주제로 인해 안타깝게도 루터파와 개혁파로 나누어졌어요. 두 진영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부쳐의 노력은 가히 영웅적이었고 일부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고백주의나 교파주의 분파의 편협한 관점을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방금 얘기한 부쳐 연구 기관에서 시간제로 일을 하기도 했는데 매우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제로 일하면서 글을 편집하는 여러 기술을 익히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때 배운 기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때 배웠던 기술은 7년 후 부쳐 전문 연구가이자 종교개혁 저작 편집자로 스코틀랜드에 돌아가기 전까지 스트라스부르, 제네바, 파리 등에서의 연구와 훈련을 통해 더 다듬어졌습니다.

최은수 교수: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신학부에는 대영제국의 왕이었던 조지 1세가 제정한 왕립 교수 자리가 있고, 교수님도 그중 한 분으로 현직에 계시다가 은퇴를 하셨습니다. 수백 년 동안 참으로 기라성 같은 분들이 왕립 교수로 자리를 지키셨었지요. 교수님에게 왕립 교수의 바톤을 넘기신 분이 프렌드(W.H.C. Frend) 교수님이신데요. 프렌드 교수님이 왕립 교수로 계실 때 이 분야의 세계적인 명성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학생들이 몰려 왔었습니다. 교수님이 프렌드 교수님의 후임으로 왕립 교수가 되셨는데, 교수님의 시각에서 프렌드 교수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 프렌드(W.H.C. Frend) 교수를 추모하는 초대 기독교 역사

윌리엄 이언 헤즐렛 교수: 1979년에 교회사 강사로 글래스고대에 갔을 때, 저명한 프렌드(Frend) 교수님께서는 교회사 학과장이셨고 초대교회사를 전공해 그 분야에 조예가 깊으셨습니다. 프렌드 교수님에 관한 저의 의견과 그분을 만났던 이야기가 궁금하면 옥스퍼드 인명사전(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시면 될 겁니다. 프렌드 교수님께서는 초대교회사 분야에 큰 열정을 갖고 계셨고 초대교회사 연구가 다시 살아나도록 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신학자나 목회자나 성직자가 아닌 사람들, 즉 교육받은 평신도와 일반 역사가들이 교회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셨죠. 큰 업적이자 교수님께서 남기신 선물입니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으셨습니다. 다른 학자들이 언급한 것처럼 교회의 내부 생태와 교리 측면보다는 교회가 외부에 비춰지는 모습 즉, 교회의 얼굴, 행동, 또한 세상과 사회에서의 역할에 더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세계 2차대전 중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 장교로 복무한 경험이 교수님으로 하여금 북아프리카의 파괴된 기독교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와 초대교회 당시 어거스틴이 반대했던 도나투스파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나치와의 전쟁 막바지에 교수님께서는 베를린에 계셨는데 그때 전쟁의 참상과 파시즘의 끔찍함을 피부로 느끼셨다고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 앞에 진실되게 서 있는 한 이 땅에서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유일한 것이 교회라고 보셨고, 교회가 교회 외부인에게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단체로 전락한다면 교회는 그 생명을 잃은 것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친절하시고, 마음이 넓고, 유머 감각도 갖고 계셨는데 조금 독특하시기도 했습니다. 은퇴하신 후에 교수님은 20년 간 영국 성공회 사제로 섬기셨습니다. 교수님께서 85세가 될 때까지 사제로 섬기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제로서의 삶을 통해 교수님께서는 더 큰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최은수 교수: 교수님은 현직에 계실 때보다 은퇴하고 나서 더 많은 학문적 작업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도 이 제이 브릴(E.J. Brill)에서 간행될 예정인 250,000자 분량의 종교개혁사에 관한 책의 탈고를 10월 말로 끝내셨지요. 열정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입니다. 최근 교회사 연구의 흐름은 어떤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윌리엄 이언 헤즐렛 교수: 첫 번째로는 넓은 관점을 갖고 신빙성 있는 일반 지식을 연구하고 종합하던 방식에서 아주 특정한 분야를 세밀하게 연구하는 방식으로 흐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흐름은 일반인이나 현대 교회와 문화가 교회사와 멀어지도록 만든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교회사가 교리, 성경, 제도, 예전 중심적 연구에서 멀어지고 종교사회사, 영성 및 경건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사가 신학교육을 받은 기독교인이나 교회와 관련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도화된 교회에 반대하는 기독교인 및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 교회와 전혀 관련이 없는 비기독교인들에 의해서도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일부는 이전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사를 연구하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런 흐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이런 현상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실 수 있겠지요.

최은수 교수: 그럼 교수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꼽으라면요?

윌리엄 이언 헤즐렛 교수: , 바로 제가 이 땅에 태어난 순간입니다. 비록 제가 그 순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요. 저의 탄생을 통해 제가 하나님의 창조와 인류와 교회의 일부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 탄생이 가져온 경이로움과 약속과 기회와 모험의 가능성은 아주 놀랍다고 생각해요. 저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값없이, 제가 이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거나 증명할 필요 없이 주어졌습니다. 아주 놀라운 신비입니다.

최은수 교수: 신학자요 교회사가로서 살아오시면서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윌리엄 이언 헤즐렛 교수: 저는 장수하는 복을 누려왔습니다. 그런데 연구자라는 이 축복된 길을 힘들게 한 가장 큰 문제는 생 자체가 너무 짧아서 어떤 것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지혜,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긴 생애를 산다고 할지라도요. 현재 교회사와 종교개혁 분야의 책과 논문은 굉장히 많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사실상 학문의 흐름에 맞춰 그 자료들을 다 읽는 것은 불가능하죠. 아무리 인터넷 덕분에 자료에 접근하기가 쉬워졌다고 해도 그 누구도 그 자료들을 다 읽을 수는 없습니다. 특이한 것은 기독교 관련 서적과 출판물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온 것이 서구의 기독교 쇠퇴와 일치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생은 너무 짧아서 그 모든 출판물을 읽을 수도, 저보다 더 풍부한 지식과 식견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도 없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많은 젊은 연구가들이 이미 충분히 연구된 적이 있거나, 특히 다른 언어로 출판되었거나 인터넷에 올라와 있지 않아 젊은 연구가들이 알 수 없었던 주제에 대해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나기도 하죠. 또 그렇게나 많은 책과 연구물들이 출판된다면 누가 각 책의 리뷰를 읽을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최은수 교수: 교수님께서는 평생을 유기체적인 생명체인 교회가 역사의 질곡을 헤쳐나왔던 역사와 신학을 연구하셨습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위기가 현실이 되고 심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교수님께서 한국교회를 위해 나누어 주실 지혜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조언 한 마디 구해도 될까요?

윌리엄 이언 헤즐렛 교수: 짧게 말하자면, 기독교인의 삶과 가치관은 하나님 중심적 삶과 가치관을 가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는 동시에 인류와 인간의 본성 및 행동에 대한 연구와도 깊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와 본성에 관한 지식,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듯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신비와 본성을 아는 지식은 기독교가 추구해야 하는 두 가지 중요한 목표입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시작하며 이에 관해 말한 바 있죠. 이 두 목표의 균형을 맞추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기독교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잃어버리면 기독교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어두울 뿐입니다.

최은수 교수: 귀한 시간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여름에 글래스고를 방문하여 교수님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만남의 기회를 연기할 수밖에 없어서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교수님께서 저희 일행들을 위해서 레스토랑을 생각해 두시고 만날 시간만을 기다리셨는데 말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 재차 드리고 싶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고 훌륭한 고견을 들을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더욱 오랫동안 장수하시고 교회를 위한 학문적 봉사에 심혈을 기울여 주시기를 소원해 마지않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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