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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난 그 이후: 원한을 푸는 기도

기사승인 2020.11.17  1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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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5)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 김정훈 교수

야곱의 기도(2): 살려 주소서(창 32:9-12, 24-32)

1) 기도의 정황

야곱은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과 함께했던 20년 세월(창 31:38, 41)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는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를 아내로 삼기 위해 7년 동안 라반을 섬기겠다고 하므로 라반이 이를 허락해 주었다. 7년간의 유목민 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는 라헬을 사랑하였기에 7년을 며칠 같이 여기며 이겨냈다 (창 29:20). 사랑은 이토록 중노동의 고통도 잊게 할 만큼 위력적이다. 7년이 찼을 때 야곱은 라반에게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요구하였다. 라반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을 초청하고 성대하게 혼인잔치를 열었다. 저녁이 되었을 때 라반은 라헬 대신 맏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갔다. 이때 라반은 자기의 여종 실바를 레아의 시녀로 주었다. 야곱은 라반이 데려온 여인이 당연히 라헬일 것으로 알고 신혼 첫날밤을 보냈다. 하지만 막상 아침이 되어 보니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야곱은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만취해서 그랬는지 어두움 때문에 그랬는지 지난밤 자기에게 들어온 여인이 라헬인지 레아인지 식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야곱은 20년 전 에서가 받아야 할 언약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몸에 염소털을 붙이고 어머니와 함께 변장극()을 꾸몄던 일을 회상하지 않았을까? 남을 속이는 데 선수인 야곱이 라반에게 속은 것이었다. 야곱은 라반에게 왜 자기를 속였느냐고 항의하였다. 야곱의 반발에 라반은 그 지방에서 언니보다 동생을 먼저 주는 일은 없다고 변명하였다. 라반의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당시 부잣집에서 딸을 시집보낼 때 시녀도 함께 딸려 보낸 것처럼 라반도 그렇게 한 것을 보면, 그는 풍습과 전통, 제도에 충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전통과 문화를 배경으로 자기가 가진 정보와 지식, 경험, 욕구, 의지를 따라 행동한다. 죄악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反)할 때가 수없이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사건건 심판의 칼을 들이대고 당신의 뜻에 맞추어 행동하도록 강제하시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에 인간에게 극약처방을 내리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판단을 따라 자기 책임 하에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떤 선택과 어떤 행동을 한다 해도 하나님은 당신의 판단을 따라 축복이든 심판이든 최적의 방식으로 인간의 행동에 대응하시며 묵직하게 당신의 뜻을 성취해 나가신다고 하는 사실이다.

라반은 야곱에게 레아와의 혼인 상태에서 7일을 채우면 바로 라헬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대신 라헬을 위해 7년을 더 자신을 섬기라고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부모가 딸을 시집보내면 그만큼 노동력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1세기 유대인 사회에서도 여전히 지속되었고, 남편 될 사람이 결혼 지참금을 신부 아버지에게 주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야곱은 라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7일이 찼을 때 라반은 야곱에게 라헬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이때에도 라반은 자기의 여종 빌하를 라헬의 시녀로 주었다. 야곱은 두 정실 아내와 두 후실을 통해 열 한 아들을 낳았다. 그는 레아에게서 여섯 아들(르우벤, 시므론,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을, 라헬의 시녀 빌하에게서 두 아들(단, 납달리)을, 레아의 시녀 실바에게서 두 아들(갓, 아셀)을, 라헬에게서 요셉을 낳았다. 야곱이 네 아내를 둔 것은 하나님이 창세 때부터 세우신 일부일처제의 혼인제도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야곱은 밧단 아람의 결혼 풍습을 따라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네 아내를 두고 열 한 아들을 낳았다. 당시에 목축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유목민들로서 아들을 많이 둔다는 것은 자기보호 수단이기도 하고, 생계유지 수단이기도 하였다. 야곱은 귀향 후에 라헬에게서 한 아들(베냐민)을 더 낳아 12명의 아들을 갖게 되는데, 이토록 많은 아들들은 현실적으로 야곱 가정의 힘의 과시이기도 하였지만 훗날 이들의 후손들 간에 발생할 여러 갈등과 충돌의 예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벧엘에서 약속하신 “티끌같이 많은 자손”(참조. 창 28:14)의 첫 작품들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인간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역사의 신비이다. 더구나 야곱의 12명의 아들이 훗날 형성될 이스라엘 민족 12지파를 대표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를 예표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과 함께 성취될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의 신비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도저히 헤아려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해독 불가능한 무수히 많은 단층들의 결합체로서의 역사 속에 살면서 함부로 “역사의 아이러니,” “역사의 신비”를 운운하면서 자신의 불의나 악행을 정당화, 합리화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폭넓은 하나님의 허용은 인간의 불의와 악행을 정의와 선행으로 둔갑시켜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야곱은 밧단아람에 머무는 동안 큰 재물을 얻었다. 그는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를 많이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창 31:43). 그가 어느 정도의 재산을 모았는지는 그가 에서의 노(怒)를 풀기 위해 에서에게 보낸 예물의 크기를 보면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에서에게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젖을 먹이고 있는 낙타 30마리 와 모든 새끼들,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와 새끼 나귀 10마리를 에서에게 예물로 보냈다. 이것들이 야곱의 소유의 일부에 불과한 것을 생각하면 그의 재산이 어마어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어떻게 이 큰 재물을 얻었을까? 그는 특출난 목축업자도 아니고, 처음부터 씨드 머니(seed money)가 두둑했던 금수저도 아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육축을 소유하게 되었을까? 첫째, 야곱의 재물은 그의 성실성의 산물이었다. 그는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견뎌내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열심히 일했다(창 47:40). 번영은 결코 게으른 자의 몫이 아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잠 6:9).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둘째, 야곱의 재물은 참음의 결과였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자원하여 7년을 참으며 라반을 섬겼다. 야곱은 라반에게 속아 라헬 대신 레아를 아내로 맞고 라반으로부터 라헬도 줄 것이니 7년을 더 일하라는 요구받았을 때에도 참고 묵묵히 일하였다. 야곱이 14년의 고된 노동 후에 라반에게 고향으로 귀환할 의사를 밝히니 라반은 품삯을 정하자고 하며 자기를 위해 좀 더 일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야곱은 이 요청을 받아들이고 6년을 더 인내하며 라반을 위해 일하였다. 이렇게 참으며 수고하는 동안 야곱의 재산은 증식되어 갔다. 야곱은 라반이 자기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할 때에도 네 명의 아내와 아직은 20세 미만인 열 한 아들과 여러 종들, 수많은 육축의 안전을 생각하며 라반이 순순히 보내 줄 때까지 꾹꾹 참았다. 셋째, 야곱의 재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의 동행과 복 주심의 결과였다. 라반은 하나님이 야곱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복을 주셨다고 고백한다(30:27).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하기 위해 라반에게도 복을 주셨던 것이다(창 30:30). 야곱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다]”(창 31:5)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라반이 자기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막아 자신을 해치지 못하게 해 주셨다고 고백한다(창 31:7).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그를 보호해 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거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재물을 부러워할지 모르나 우리는 하나님이 그 재물을 통해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짐승들을 이끌고 고향 땅으로 가고자 하였다. 야곱이 이 뜻을 라반에게 밝혔을 때 라반은 품삯을 주겠으니 더 있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라반은 이전과 달리 자기가 큰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하심으로 자기에게 복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었다(창 30:27). 라반도 “하나님”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물질에 있었다. 야곱은 라반과 품삯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창 30:30). 이미 네 아내와 열 한 아들을 거느린 야곱이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의아해 보인다. 야곱의 말이 피상적으로는 분가(分家)나 경제적 독립을 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것이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끝에 나온 말이기 때문에 단순히 그런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아마도 야곱은 밧단아람에서의 20년 세월 내내 벧엘 사건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꿈속에서 사닥다리 환상을 본 후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벧엘 사건의 발단이 된, 자신이 저지른 장자의 명분과 언약의 축복 탈취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기의 집을 세우고 싶다는 야곱의 말은 단순히 라반의 지배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독립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자로서 명실공히 자신의 위치(족장권)를 확립하고 할아버지 아브라함 때부터 물려받은 언약의 축복의 계승자가 되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아무튼 야곱은 라반과 품삯 협상을 하고 그를 위해 다시 6년을 더 일해야 했다. 이 6년 동안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는 야곱의 집을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야곱의 집은 멀리 신약시대의 교회론적 하나님의 가족을 내다보는 개념이다. 야곱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언약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야곱이 6년을 더 일하는 동안 그의 재산이 크게 증식되는 것을 보고 라반의 얼굴색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셨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 31:3). 이것은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 요청했던 것에 대한 응답이었다. 하나님의 귀환 명령을 들은 야곱은 라헬과 레아를 불러 라반의 심상치 않은 안색에 대해 언급하며 고백하기를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창 31:5)라고 하였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언약을 떠올리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라는 고백은 하나님이 벧엘에서 해 주신 약속을 응답해 주셨다는 고백이다.

야곱은 라헬과 레아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더 털어놓는데, 그는 그녀들의 아버지 라반이 자기에게 약조한 품삯을 열 번이나 변개하며 자기를 해치려 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 주셨다고 진술한다 (창 31:7). 이것은 자기가 벧엘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한 것을 응답해 주셨다는 고백이다. 또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가 꿈속에 나타나 자기의 몫으로 돌아올 얼룩무늬 양과 점박이 양, 아롱진 양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셨다고 두 아내에게 말해 주었다. 이는 자기가 가진 수많은 가축이 벧엘에서 자기가 드린 서원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결과라는 고백이다. 야곱은 계속 그때 그 꿈속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한 말을 전해 주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 31:13). 하나님의 사자가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라고 한 것은 그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특사의 자격으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듯이 전언한다는 말이다. 야곱이 두 아내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밧단아람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기의 서원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며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벧엘에서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그때 야곱이 취한 행동과 서원 기도를 생생히 기억하시고 그에게 밧단아람을 떠날 것을 명령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야곱의 서원은 그가 밧단아람을 떠나야만 응답될 일이었고, 하나님은 야곱의 맹세 이행을 통해 당신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언약(큰 민족, 복의 근원)을 성취해 가고자 하셨던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하나님은 밧단아람이 아닌 가나안 땅에서 야곱이 족장으로서 선조들의 맥을 이어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목표지로 삼았던 땅이고(11:31), 훗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최종적으로 정착할 땅으로 삼았던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땅이다.

야곱의 말을 들은 두 아내는 야곱을 응원하였고, 모든 가축과 소유물들을 이끌고 밧단아람을 떠나 그의 아버지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단하였다(창 31:16-18).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멀리 나간 틈을 타 길르앗 산을 향해 도망하였다. 어찌 보면 이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라반은 뒤늦게 야곱의 도주 소식을 듣고 그를 추격하였다. 현재 상황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브엘세바에서 도망쳐 나올 때와 전혀 딴판이었다. 야곱은 대가족과 무수히 많은 가축들을 이끌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야곱이 간구했던 대로 그를 보호하시려고 라반의 꿈속에 나타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창 31:24)고 당부하셨다. 라반은 야곱을 만나 점잖은 말로 꾸짖고는(31:26-28), 자기가 야곱을 해칠 만한 능력이 자기 손에 있지만 지난 밤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나시어 그런 당부를 하셨다는 말을 하면서 그를 해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증거였다.

야곱은 라반에게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섭섭한 감정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라반에게 양심껏 성실하게 대하였고,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힘껏 봉사하였으나 라반은 열 번이나 품삯을 변경하였다고 토로하였다(창 31:38-41). 그러면서 그는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창 31:42)라고 말하였다. 야곱의 이 말속에는 언약의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하시며 자기를 보호해 주셨다고 하는 확실한 고백이 담겨있다. 야곱과 라반은 많은 대화 끝에 일종의 신사 협정을 맺었다(창 31:36-54). 그들은 길르앗 산자락(창 31:21, 23) 한 모퉁이에 돌기둥을 세우고 옆에 돌무더기를 쌓은 후에 이곳을 경계로 서로 침범하여 해치지 않기로 확약하였다(창 31:45-46, 50-52). 라반은 야곱 앞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창 31:53)라고 하였다. 이는 언약의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과 의로운 판단을 시인하는 고백이다. 라반의 진심어린 고백에 힘을 얻어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였다]”(창 31:54). 야곱이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했다는 것은 그가 라반의 고백에 동의하며 불가침 협정에 조인(調印)한 것을 뜻하고, 길르앗 산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그가 족장으로서 공식적으로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한 것을 의미하고, “형제들”(“친족들”로 번역 가능)을 불러 떡을 먹였다는 것은 라반의 가족이나 자기 가족이나 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라고 고백하는 것을 함의한다. 결과적으로 야곱과 라반은 매우 멋진 모습으로 서로 작별하였다(창 31:55).

이와 같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힘을 얻은 후에 야곱은 가족들과 종들과 함께 수많은 가축들을 이끌고 고향 땅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야곱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전봇대처럼 박혀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불안한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야곱이 길을 가고 있을 때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어 만나 주셨다(창 32:1). 야곱은 이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르고 그 땅을 “마하나임”이라 명명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사자들을 군대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싸워주실 것이라는 확신의 표명이며, 땅에 이름을 붙인 것은 그러한 확신 가운데 담대해진 자신의 마음의 표출이다. 야곱은 에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그가 거주하는 세일 땅 에돔으로 전령들을 보냈다. 야곱은 전령들을 보내며 에서를 만나면 그를 주(主)라 칭하고, 자신을 주의 종이라 칭하며 자기가 그동안 어디에 가서 거류했는지 최대한 몸을 낮춰 설명하라고 하였다(창 32:4). 그리고 혹시 에서가 급습할 것에 대비하여 자기에게 소, 나귀, 양떼, 노비가 많은 것을 알리고 은혜를 베풀어 해치지 말 것을 간구하라고 당부하였다(창 32:5). 우리는 위기 상황에 강한 야곱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2) 기도의 계기

하지만 야곱의 귀로(歸路)의 현실은 녹녹하지 않았다. 철벽같은 난관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세일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전령들은 에서가 자기의 귀로 소식을 듣고 자기를 만나기 위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얍복강 맞은편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야곱은 형 에서가 2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에 대해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령들의 보고를 받은 야곱은 공포에 질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본문은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창 32:7 상)라고 보도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야곱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밧단 아람을 떠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없던 일처럼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야곱은 이 상황 속에서 최선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전략을 짰다(창 32:7-8). 그는 자기에게 딸린 동행자들과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었다. 이는 만일 에서가 공격해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전략이 별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같이 현실적 대처를 하면서도,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가 영적인 대처를 동시에 강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야곱의 절박한 상황은 오히려 그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언약의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갈 수가 있었다. 귀로 중에 드린 야곱의 기도는 두 곳에 나타난다. 첫 번째 기도는 창세기 32:9-12에 기록된 것이고, 두 번째 기도는 창 32:24-32에 기록된 것이다.
 

3) 기도의 내용

(1) 첫 번째 기도(창 32:9-12)
야곱은 에서가 400명의 친위대를 이끌고 자신을 대적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소식에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첫째, 야곱은 고향(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붙들고 기도하였다.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9절). 여기서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라는 호칭은 야곱이 살아계신 언약의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는 고백을 함의한다.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라는 기억의 소환은 하나님이 당신이 지정하신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계보를 따라 당신의 약속을 실현시켜 나가기 원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의 반영이다.

둘째, 야곱은 벧엘에서 자기가 하나님께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애절하게 간구했던 것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수천, 수만 배로 신실하게 응답해 주신 사실을 고백하며 기도하였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10). 이 고백은 야곱이 자기가 드린 기도를 기억하고 그에 대한 결과를 꼼꼼히 챙긴 것을 반영한다. 참으로 우리는 절박한 중에 드린 기도를 잊을 때가 많고 그 기도를 들어주신 사실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셋째, 야곱은 자기에게 닥친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벧엘에서 받았던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를 올렸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 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1-12). 야곱은 에서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는 자기가 자기와 가족들의 목숨이 위험해질까 전전긍긍하였다. 우리는 지금 누구 손에 빠져 있는가? 무엇이 나를 겁박하고 있는가? 현실적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12 절 내용은 11절에서 에서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을 요청한 기도가 응답되어야만 논리적으로도 맞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가족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라는 논리다. 야곱은 하나님이 벧엘에서 약속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창 28;14). 당시에는 야곱이 서원기도를 할 때 이 큰 약속에 대해 아무 거론조차 하지 못하였다. 너무도 거창하게 들려 어떻게 적용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자료로 삼고 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이 모든 사물에 대해 핵심을 찌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한데 실상 그의 삶의 궤적을 보면 세속적 욕망을 따라 살 때가 많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 매를 맞을 때가 많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2) 두 번째 기도(창 32:24-32)
야곱은 하나님께 “살려주세요”라고 절규하듯 기도한 후에 다시 현실적으로 대처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야곱이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현실적 대처 사이에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는 현실적 대처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총탄이 날아오는 전장(戰場)에서 사령관이 막사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전선을 가다듬고 심기일전하여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 아니다. 모세도 출애굽한 후에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투를 벌일 때 자기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기도하고, 전장에서는 여호수아가 혈투를 벌인 끝에 승리하지 않았는가?(출 17:8-13). 야곱은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무수히 많은 가축들을 그를 위한 예물로 준비하였다: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젖을 먹이고 있는 낙타 30마리와 모든 새끼들,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와 새끼 나귀 10마리(창 32:14-15). 야곱은 이 짐승들을 여러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겨 간격을 두고 얍복강 (요단강 동편에 위치)을 건너게 하고, 에서가 만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며 이 짐승들이 누구의 것이냐고 묻거든, “이것들은 모두 주(에서)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의 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이며, 야곱은 우리 뒤를 좇아 오고 있습니다”(나의 의역. 창 32:19)라고 대답하라고 당부하였다. 이는 야곱이 형 에서의 분을 풀기 위한 전략이었다.

야곱은 에서에게 한 떼씩 짐승들을 연달아 보낸 후에 무리 틈에서 밤을 지내다가 마지막 결단을 하고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 자신의 소유까지 몽땅 건네 보냈다. 야곱은 얍복 나루 이편에서 홀로 남아 있었다(창 32:21-24). 얍복강 저편으로 건너간 가족들과 이편에 남아 있는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판국이었다. 야곱은 완전히 혼자였다. 이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야곱은 이 사람을 붙들고 날이 새도록 씨름하였다. 야곱은 천 길 낭떠러지를 한 치 앞에 두고 실 한 오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이 사람을 붙들고 늘어졌다. 이에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야곱의 골반뼈를 세게 치니 야곱의 골반뼈가 탈골되었다(창 32:25). 밤이 지나고 날이 새려 하는 시간인데도 그 사람과 야곱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이 대화는 일종의 몸을 던지는 기도였다.

그 사람 : “나로 가게 하라”(창 32:26).
야곱 :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이는 야곱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뒤를 이어야 할 인물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상징적 인물)로서 야곱은 목숨을 건 기도를 통해 당신께 가까이 나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사람 :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2:27). 이것은 네 자신의 실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이다. 이름은 인간의 실체를 가리키는 상징적 명칭으로 그의 존재 자체를 대변하는 칭호라고 할 수 있다.
야곱 : “야곱이니이다”(창 32:27). “야곱”이란 이름은 “발꿈치를 잡다, 경쟁하다, 속이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가 출생할 때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데서 연유한다.

그 사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다”라는 뜻의 새 이름 “이스라엘”은 에서와의 경쟁이 아닌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이긴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려 그분의 축복을 받아내고야 만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종교적 기질이 강한 사람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낼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야곱 :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창 32:29). 이 요구는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존재의 실체를 밝혀 달라는 청원이었다. 훗날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이 그를 애굽으로 갈 것을 명령하실 때 “당신이 누구십니까?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셨다(출 3:13-15).

그 사람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창 32:29). 이것은 야곱이 당돌하게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묻는 데 대한 반응으로 “내가 네 이름을 개명해 준 것으로 족하다. 네가 내 이름을 물을 필요는 없다. 너는 이미 무수히 내가 누구인지 경험하였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이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반문이다. 이것은 “지금 내 이름을 알아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나를 계속 만남으로 알게 될 나다”라는 대답 같은 것이다.

여기까지 대화가 진행된 후에 “그 사람”은 야곱에게 축복하였다(창 32:29). 목숨을 건 기도의 사람 야곱에게 그 사람은 응답해 주었던 것이다. 이 사건 후에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 32:30)고 고백하는 의미로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그 사람”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하나님은 야곱이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나타나시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다.
 

4) 기도의 응답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에서의 마음을 눈 녹듯이 녹여주셨다. 에서는 야곱을 만나자 그를 와락 끌어안아 목을 어긋맞추고 그와 입맞추었다. 이것은 깊은 사랑의 상징적 행위였다. 쌍둥이 형제는 20년 묵은 분노를 눈물로 씻어 버렸다(창 33:4). 야곱은 벧엘에서 서원 기도를 하며 간구했던 하나님의 보호와 동행, 귀환, 임재를 단 한 가지도 빠짐없이 다 응답받았다. 그는 먹을 떡과 입을 옷으로 상징되는 물질의 축복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받았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땅의 티끌같이 수많은 후손을 주고 모든 족속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셨을 때 그 순간에는 너무도 엄청난 약속이어서 그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간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두 아내와 두 후첩을 통해 밧단아람에서 열 한 아들과 한 외동딸을 낳았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한 아들을 더 낳아 12명의 아들들과 손자들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큰 민족으로 발전할 자손들이었다.

또한 야곱은 벧엘에서 사닥다리 환상 가운데 하나님께 서원했던 대로 벧엘로 다시 돌아가 디나 사건으로 인해 상한 마음을 추스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사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후 잠시 곁길로 새어 세겜 땅으로 가서 거주하였다. 그러던 중 레아가 낳은 외동딸 디나가 세겜 시내에 나갔다가 그 땅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황당한 일을 겪어야 했다. 이 일 후에 야곱은 하나님의 질책을 받고 회개하고 벧엘로 올라가 지난날을 기억하며 영적으로 재무장하였다. 하나님은 밧단아람에서 돌아와 벧엘을 찾은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복을 주시며 이르기를 “10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창 35:10-12)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첫째로, 전에 얍복강가에 나타났던 그 사람이 하나님 자신인 것에 대한 확인이며, 둘째로, 그때 야곱이 당신의 이름이 누구냐고 물었던 것에 대한 대답(“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며, 셋째로, 하나님이 아담 언약을 근거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언약 곧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실 것과 축복의 땅(가나안 땅)'C6÷{주실 것에 대한 약속을 성취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다. 이 약속을 받고 야곱은 감격하여 20년 전 에서를 피해 도주할 때 벧엘에서 자기가 베고 잤던 돌로 기둥을 세우고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창 28:21)라고 맹세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그때의 일을 재연하였다: “14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창 35:14-15). 이는 야곱이 과거의 맹세를 회상하면서 제사장적 역할을 수행한 것을 의미한다. 이 날 그가 세운 돌은 미래 먼 훗날에 메시야의 오심과 함께 참 성전(신약시대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교회)으로 변화될 것이었지만, 야곱은 과거의 맹세를 재연하는 예견적 행위(prospective action)로써 기도 응답의 확신을 표명했던 것이다. 또한 야곱은 벧엘의 서원 기도에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창 28:21)이라고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야곱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창 30:25; 31:30)을 찾아 헤브론 마므레로 가서 157세가 된 아버지 이삭과 재회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응답하셨다(창 35:27). 이후에도 이삭은 43년을 더 살다가 180세에 자기의 열조에게로 돌아갔다(창 35:28-29)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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