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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수 씨의 풍유적 설교, ‘이삭=하나님, 리브가=예수’?

기사승인 2020.11.24  14:3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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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석 3/ 박옥수 신간 <나는 이렇게 죄에서 벗어났다>

<교회와신앙> 장운철 기자】   구원파 박옥수 씨(기쁜소식강남교회)의 설교는 어떨까? 그의 설교는 성경적일까? 박 씨는 최근 <나는 이렇게 죄에서 벗어났다>(기쁜소식사, 초판2017, 이하 <개정판)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박옥수 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3>(이하 <죄사함>)의 개정판이다. 이 책에 박 씨의 설교 다수가 실려있다.

   
박옥수 씨의 책들

박 씨는 자신이 책에서 “성경의 해석은 성경에 맡겨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박 씨의 주장을 들어보자.

여러분, 성경을 우리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해석은 누구에게 맡깁니까? 박옥수 목사에게 맡깁니까? 아닙니다. 성경의 해석은 성경에 맡겨야 합니다.”(박옥수, <개정판>, p. 320).

정통 개혁주의 신학적인 발언이다. 박 씨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뜻밖이다. 그렇다. 우리는 성경해석을 자의적으로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영적 비밀’, ‘영해’라는 말을 운운하며 성경을 마치 수수께끼를 풀 듯해서도 안 된다. 철저히 성경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이제 박옥수 씨의 설교를 살펴보자. 그는 설교를 위해 자신이 말한 대로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을 취했을까? 또한 그는 그 개혁주의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한 설교를 했을까? 그의 <개정판>을 살펴보니 이내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코 성경적인 설교라 할 수 없다. 그의 설교는 한 마디로 ‘풍유적 성경 해석’이 골격을 이룬다. 이는 오래 전부터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지적된 방식이다. 이 성경해석 방식을 바탕으로 한 박옥수 씨의 설교 역시 비성경적인 ‘풍유적 설교’에 불과하다.

풍유적(allegory) 해석이란 성경 본문에 나타나는 수많은 세부사항을 마치 ‘암호’ 풀듯이 접근하여 해석하는 방식을 말한다(크레그 블롬버그, <비유해석학>, 생명의말씀사, 1996, p.38). 다시 말해 주연이나 조연도 아닌 일개 소품들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함으로 본문의 뜻을 왜곡시키는 방식을 말한다. 그것을 오늘날 소위 ‘영적해석’, ‘영해’ 등의 이름으로 홍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본문의 의미는 절대적으로 문맥을 따라가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하는 ‘기본해석’ 방법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특정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두려는 방식은 버려야 한다. 
 

‘야곱과 에서’ 본문에서... 

박옥수 씨의 책 <개정판>에서 ‘야곱과 에서’라는 제목의 설교가 들어있다(박옥수, pp 64~95, 박옥수 <죄사함 1> pp.57-87). 구약성경 창세기 27장을 본문으로 한 내용이다. 그의 풍유적 성경 해석이 아주 잘 드러난다. 직접 살펴보자.

   
박옥수 씨는 수시로 성경세미나라는 이름의 집회를 개최한다

여러분, 이 성경 말씀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그림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어머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형 에서는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축복받으려고 하는 사람의 그림자입니다. 동생 야곱은 아무 일한 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도움으로 축복 받는 자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쉽지요. 이것이 성경의 알맹이입니다. 밤을 껍질만 씹으면 입만 다 찔리지요? 그렇듯이 성경의 알맹이를 모르고 성경을 껍질만 맛보면 맛이 있습니까?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알맹이를 영적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박옥수, pp.76-77)

창 27장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동생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가로챈 장면이 나타나는 본문이다. 이 본문을 박 씨는 풍유적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의 성경 본문 이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아버지 이삭=하나님
* 어머니 리브가=예수 그리스도
* 형 에서=자기 열심으로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
* 동생 야곱=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 

이러한 해석 방식을 박옥수 씨는 ‘성경의 알맹이’라고 말했다. ‘영적 비밀’이라고도 설명했다. 자신의 풍유적 해석 방식이 성경을 이해하는 ‘핵심’인 것처럼 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그 비밀을 풀어주는 특별한 존재인 듯 언급하고 있다.

위 본문에 대한 박 씨의 성경해석이 옳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정말 우스꽝스러운 결과가 만들어지고 만다. 아버지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에게 속임을 당한다. 이삭이 큰 아들 에서에게 축복을 해주려고 하자, 그 의도를 간파한 아내 리브가가 둘째 아들 야곱에게 그 축복을 가로채도록 독려하는 장면이다. 한 마디로 아내가 남편을 속이는 장면이다. 여기에 ‘이삭=하나님’, ‘리브가=예수 그리스도’라는 박 씨의 영적 비밀의 의미(?)를 적용해 보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속임을 당하게 된다는 넨센스가 발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하나님을 속인다는 내용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성경의 알맹이가 이런 것인가? 박옥수 씨의 영적 비밀이 이런 내용인가? 그의 성경해석은 결국 하나님을 ‘사기꾼’ 등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또한 박옥수 씨는 야곱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어머니 리브가를 의지한 것을 두고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인 사람이다. 에서에 대한 설명은 어떠한가.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충실히 사냥을 해 온 에서를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 앞으로 가려는 사람’으로 그렸다. 어떻게 그렇게 성경 본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박 씨의 성경 이해를 ‘풍유적’이라고 했는데, 어찌보면 그러한 표현조차도 사치인 듯하다.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난다. 박 씨 스스로 성경 이해에 모순을 드러낸 대목이다. 박 씨는 형 에서가 ‘저주를 받았다’고 했다(박옥수, p.81). 그런데 동생 야곱이 형 에서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축복을 받으러 나아갔다고 했다. 이게 무슨 엉뚱한 말인가? 그의 설교를 직접 살펴보자.

오늘 아침 여러분의 생각을 버리고 이 말씀을 자세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에서는 왜 저주를 받았습니까? 그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려고 애쓰고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저주입니다.”(박옥수, pp.81-82)

야곱이 아버지 앞에 나갈 때 만족시켜야 할 두 번째 조건은, 자기 이름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형의 이름을 의지해서 나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누구의 이름을 의지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맏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박옥수, p.90)

박옥수 씨는 형 에서를 ‘자기 열심으로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 그리고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해석을 했다. 그러면서 동생 야곱이 축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에게 나아갈 때, 형 에서의 이름을 의지했다고 했다. 이것을 연결하면 저주 받은 사람을 의지해서 축복을 받고자 나아갔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면서 박 씨는 ‘예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 한다’고 설교의 결론을 내렸다. 이는 저주 받은 사람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게,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나아갔다는 말이 된다. 정말 황당한 주장이다. 비성경적인 주장이라는 말조차도 의미가 없을 정도다. 박 씨는 자신이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모순’의 극치다.

아버지 이삭의 반응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위와 같은 풍유적 설교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걸었을 것이다. 창 27:33의 말씀은 야곱에게 속은 것을 안 아버지 이삭의 반응을 보여준다. 아버지 이삭이 “심히 크게 떨(었다)”는 장면이다(Issac trembled exceedingly-KJV, Issac trembled violently-NIV, NASB). 히브리어 원문에는 ‘매우, 크게, 심히 떨었다’며 아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아버지 이삭은 자신이 야곱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아주 아주’ 강하게 떨며 분개했다는 말이다. 야곱에게 속은 자신의 실수가 하나님의 뜻을 어길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박옥수 씨의 눈에 들어왔다면 창 27장의 본문을 해석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강도 만난 자’ 본문에서...

‘강도 만난 자’라는 제목의 설교도 살펴보자(박옥수, pp 234~267). 신약 성경 누가복음 10장을 본문으로 한 내용이다. 박 씨는 이 본문의 설교를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은 물론 개정판인 <나는 이렇게 죄에서 벗어났다>에도 동일하게 실었다. 또한 최근에 발행한 그의 설교집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박옥수, 2020)이라는 책에도 실었다. 이 설교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모양이다. 문제는 풍유적 성경해석에 있다. 책이 3번째 바뀌었음에도 눅10장에 대한 박 씨의 설교는 큰 변함이 없다. 풍유적이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장면이 성경본문이다(눅 10: 25~37). 박 씨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조금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 속에 숨어 있는 영적인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며 ‘강도 만난 자’ 본문인 눅10장에서 ‘영적 비밀’(?)을 발견해야 한다는 식으로 언급했다(박옥수, p. 245). 그의 본문 해석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영적 비밀(?)이 발견되는지도 들여다보자.

   
박옥수 씨는 '강도 만난 자'의 본문을 풍유적 해석을 통해 '구원'과 연결시켰다

여기에서 이 강도 만난 자는 바로 율법사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강도 만난 자는 강도를 만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옷을 벗기우고 맞아 거반 죽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그 사람이 뭘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는 그냥 누워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사마리아인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때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박옥수, p.255)

성경에 기름은 성령을 가리키며, 포도주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기름과 포도주를 우리에게 붓는다는 것은 먼저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고 그 뒤에 기쁨이 옵니다.”(박옥수, p.260)

사마리아인이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었는데 ... 두 개는 이틀을 말합니다. 주님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2천년 후에 주님이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박옥수, p.266)

박 씨는 본문을 해석한다며 다수의 풍유적 접근을 했다. 가히 ‘풍유적 잔치’(?)를 연 셈이다. 박 씨의 해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강도 만난 자= 율법사
* 사마리아인=예수님
* 기름=성령
* 포도주=기쁨
* 데나리온 둘 = 2천년 후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 

앞서 ‘풍유적 해석’이란 뜻을 한 마디로 소품에 지나친 의미를 두는 것으로 설명을 한 바 있다. 위 본문 눅10장은 초대 교부시대 때부터 풍유적으로 사용되어온 대표적인 것이다. 중세시대와 종교개혁 이후, 현대에까지도 종종 오용되고 있는 본문이다. 박옥수 씨보다 고수(?)인 위 본문의 풍유적 해석의 예를 살펴보자. 아래와 같다(로버트 H. 스타인,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여수룬, 1992, p.131).

* 여리고로 내려가는 = 인간의 성품 혹은 아담 사람
* 그가 떠나 내려온 = 천상의 도시 예루살렘
* 여리고 = 타락한 도시, 저주 하에 있는 도시
* 강도들 = 마귀와 그의 천사들
* 옷을 벗김 = 인간이 원래 입었던 의의 옷을 벗김
* 제사장과 레위인 = 구원하기에 무능한 율법
* 선한 사마리아인 = 그리스도
* 기름 = 성령
* 포도주 =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흘리신 피 

박옥수 씨보다 훨씬 더 풍부한 양으로 풍유적으로 접근한 내용임을 볼 수 있다. 
박옥수 씨의 스스로 모순인 해석이 또 발견된다. 박 씨는 눅10장에서 ‘포도주’에 대한 해석을 ‘기쁨’이라고 말했는데, 창40장을 해설한다는 설교에서는 ‘포도즙=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라고 했다(박옥수, p.183). 포도가 ‘주’가 되면 기쁨이고, ‘즙’이 되면 예수님의 피가 된다는 말인가?

박옥수 씨는 ‘강도 만난 자’ 본문을 풍유적으로 이해하면서 ‘구원 받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즉, ‘강도 만난 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내용으로 성경 본문을 이해한 것이다. 아래와 같다.

여기에서 이 강도 만난 자는 바로 율법사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강도 만난 자는 강도를 만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옷을 벗기우고 맞아 거반 죽게 되지 않앗습니까? 그렇지요? 그 사람이 뭘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는 그냥 누워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사마리아인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주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때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박옥수, <개정판> p. 255)

다 같이 고개를 숙여 주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눈을 감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강도 만나 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무엇을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무엇을 하여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박옥수, <개정판>, p.267)

위 ‘강도 만난 자’의 본문의 의미가 과연 ‘구원 받음’일까?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려진 위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은 그리 어렵지 않다. 위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눅 10:29)라는 질문을 받고 직접 답으로 설명해 주신 비유 이야기다. 바로 ‘이웃’이 핵심 주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비유의 결론까지 내려주셨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에 답을 하면 된다. 문맥에서 볼 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을 해 준다(로버트 스타인, p.126). 그리고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박옥수 씨는 스스로 언급한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좀 더 많이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을 문맥을 따라 천천히 잘 읽는 게 기본이다. 자신의 무지나 인위적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한다고 덤벼들어서는 안 된다. ‘영적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소품에 도에 넘치는 의미를 두는 순간 성경의 본 의미와는 멀어지게 된다. 올바르지 않은 성경해석에서 그릇된 사상이 나오기 마련이다.

장운철 기자 kofking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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