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미국 남장로교 파송 최초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에 관한 연구(2)

기사승인 2020.12.28  14:17:34

공유
default_news_ad1

- 최은수 교수의 교회사 논단

미국 남장로교회 파송 최초의 내한 선교사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Selina ‘Linnie’ Fulkerson Davis)의 가정 배경에 관한 연구(2)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최은수 교수

 3.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회, 경제적 배경

앞에서 언급한 대로, 데이비스 선교사의 친가와 외가는 지역의 명문가였다. 이들의 삶의 환경이 곧 19세기 미국 남부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직계 가족들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진행된 1812년 전쟁, 멕시칸-아메리칸 전쟁 (1846-1848), 남북전쟁, 재건 운동, 재조정 파티 운동 등 격동의 한 세기를 풍미하였다. 아울러 사회적 관심이 높았던 노예제 폐지 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 절제 운동, 그리고 공립학교 운동 등의 흐름 속에 있었다. 특히 19세기 어간에 전개된 전쟁들은 사회, 경제, 정치적 융합체라고 할 정도로 개인과 가족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쟁을 통하여 개인과 가족이 받았던 영향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1812년 전쟁과 멕시칸-아메리칸 전쟁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의 외가 쪽 식구들 가운데 군인들이 많았다. 외할아버지인 아브람풀커슨(Abram Fulkerson Sr.)1812년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피터 포터 장군이 지휘하는 노폭 사단에 배속되어 데이빗 샌더스 대령이 이끄는 제 4여단의 버지니아 민병대 소속으로 한 중대를 지휘하는 대위 계급의 장교였다. 그는 후에 버지니아 민병대를 이끄는 대령으로 진급했다.1

   
▲ 데이비스 선교사의 이름이 셀리나로 표기된 1870년 미국 연방 센서스 기록

그녀의 외삼촌 중 세 명이 멕시칸-아메리칸 전쟁(1846-1848)에 나가 미국을 위해 싸웠다. 둘째 외삼촌인 새뮤얼 반스 풀커슨(Samuel Vance Fulkerson)은 초급 장교로 임관하여 테네시 연대에 배속되어 전투를 벌였다. 넷째 외삼촌인 아이작 풀커슨(Isaac Fulkerson)도 조지 맥클랜드 대령이 지휘하는 제5 테네시연대에 소속되어 초급장교답게 용맹하게 싸웠다. 다른 두 명의 외삼촌들과는 다르게, 셋째 외삼촌인 프랜시스 마리온 풀커슨(Francis Marion Fulkerson)은 멕시칸-아메리칸 전쟁이 치열하던 1847년에 일반 병사로 입대하여 제 4테네시 보병연대 제 1중대 소속으로 멕시코의 베라 크루즈, 잘라파, 푸에블라, 그리고 멕시코 시티에 이르기까지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2

   
▲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아버지인 아르키메데스 데이비스 장로가 미국 17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으로부터 받은 사면증(북부군의 미국 연방 정부 입장에서 남부연합에 속한 사람들은 반역자들이었기 때문에 사면증이 있어야 시민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

아무래도 셀리나 리니데이비스와 그 직계 가족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은 역시 미국 남북전쟁이었다. 그녀가 남북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무렵인 1862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의미가 남다르다. 노예제 폐지 문제로 촉발된 전쟁은 연방을 지지하는 북부와 연방 탈퇴를 감행한 남부 사이에서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5월 9일까지 장장 4년 27일에 걸친 내전이었다. 이 전쟁은 데이비스 가문과 풀커슨 가문 모두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과 재산상의 손실을 안겨주었다. 먼저, 남북전쟁의 후유증으로 그녀는 3살 나이에 아버지 아르키메데스 데이비스를 18651022일에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3

부친은 남북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혼란기에 워싱턴 카운티와 그 수도인 아빙돈 지역의 법률적인 사안들을 책임졌었다.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전했던 남부군 소속의 첫째 오빠 제임스와 둘째 오빠 아브람은 가족들의 염원대로 부상 없이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4

   
▲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이 된 사무엘 반스 풀커슨 대령. 데이비스 선교사의 둘째 외삼촌이다

하지만, 군인 가족이 많은 외가 쪽은 희비가 엇갈렸다. 1849년에 일찍 세상과 하직한 첫째 외삼촌 제임스 라이온스 풀커슨(James Lyons Fulkerson)의 유일한 아들인 아서 암스트롱 풀커슨(ArthurA. Fulkerson)이 남부군 제 19테네시 연대에 배속되어 전투경험이 풍부한 주임원사로서 맹활약하였다. 그는 테네시주의 프랭클린 전투가 격화되는 와중에 최전방에서 공격을 주도하다가 16발의 총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5 남북전쟁의 전설이 된 둘째 외삼촌 새뮤얼 반스풀커슨(Samuel Vance Fulkerson)은 전쟁이 발발하자 1861년 5월 28일자로 제37 버지니아 보병연대 대령으로 임명되었다.6 그는 1862년에 벌어진 제1차 컨스타운 전투, 맥도웰 전투, 윈체스터전투, 포트 리퍼블릭 전투, 그리고 게인스 밀 등의 전투에 참가했다. 1862년 6월 27일에 있었던 게인스 밀 전투는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Robert Lee) 장군이 거둔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다. 이날 새뮤얼 풀커슨 대령이 이끄는 제 3여단에서 15명의 부상자, 1명의 실종자, 그리고 두 명의 전사자가 나왔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새무얼 풀커슨 대령이었다.7 첫째 외삼촌네 가족과 둘째 외삼촌 가족들이 받은 전사의 비보와는 다르게, 넷째 외삼촌인 아이작 풀커슨(Isaac Fulkerson)대위와 막내 외삼촌 아브람 풀커슨(Abram Fulkerson Junior) 대령은 부상을 당하고 포로가 되었어도 전쟁 후에 석방되어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8 그러나 막내 외삼촌 아브람 대령이 전쟁 중 당한 부상의 후유증 때문인지 주요 전투 직전에 결혼하여 가진 허니문 베이비인 새무얼 한 명만 얻었고, 전쟁이 끝나고 포로에서 석방된 이후에는 자식을 갖지 못했다.

   
▲ 아브람 풀커슨 대령. 데이비스 선교사의 막내 외삼촌이자 미국 연방 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생사가 오가는 치열한 남북전쟁의 와중에,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의 외가 쪽에서는 역사에 남을만한 극적인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녀가 출생한 지 2년이 조금 지난 18641214일에 막내 이모인 캐더린 엘리자벳 풀커슨(Catherine Elizabeth Fulkerson, Kate라고 불림)이 부인을 잃고 재혼하는 플로이드 허트(Floyd Hurt)와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플로이드 허트는 탈장이 있어서 병역이 면제된 상태였고 남부군의 자금을 조달하는 대체 복무를 하고 있었다. 장소는 그녀에게 셀리나라는 이름을 준 막내 외숙모 셀리나 존슨 폴커슨의 집이었다. 당시 막내 외삼촌인 아브람은 북부군에 포로가 되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새신랑인 플로이드 허트가 급하게 말을 몰고 달려와서 북부군군대가 아빙돈으로 진군하고 있기 때문에 결혼식을 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당시 북부군은 버지니아주 요충지에 산재한 전략물자 조달을 차단하기 위해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아빙돈에 진입한 북부군은 결혼식 장소인 막내 외삼촌의 집에 지휘부 숙소를 마련했는데 이미 잘 차려진 고급진 음식들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때 북부군 중 한 명이 결혼식 반지가 들어있는 케익을 가져갔다. 북부군이 물러간 후 1864년 12월 29일에 미뤄졌던 캐서린 이모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9 전쟁 후에 막내 외삼촌 아브람이 재조정당(Readjuster Party) 소속으로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는데 북부 지역 한 연방의원이 캐서린 이모의 결혼식 케익에 들어있던 결혼반지를 전해주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10 아마도 당시 케익을 들고 나가 다른 북부군 전우들과 나눠 먹던 한 병사가 결혼반지를 발견하고 보관하였던 것 같다. 그 반지를 전해준 연방 의원이 당시 아빙돈에 왔던 군인이었는지, 아니면 아브람 연방 의원이 캐서린과 남매지간임을 알고 단순히 전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여튼 분실된 줄로만 알았던 결혼반지를 되찾은 캐서린 이모는 벅차오르는 감격을 만끽하였다.

   
▲ 남북전쟁의 영웅이자 데이비스 선교사의 둘째 외삼촌인 사무엘 반스 풀커슨 대령을 기념하는 행사

전후 화해와 협력을 위해 남북전쟁이 끝나기 전인 1863년 12월 8일에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남부에 대한 사면과 재건에 대한 계획을 발표했었다. 불행하게도, 링컨 대통령이 1865년 4월에 암살되면서 전후 사면 과정은 보다 복잡하고 혼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링컨의 뒤를 이어 미국의 17대 대통령이 된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은 링컨의 계획안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험로를 자초하였다. 셀리나 리니의 아버지 아르키메데스 데이비스는 아슬아슬하게 1차 사면의 조건을 충족시켜서 1865529일 자 사면문서에 서명하고 사면신청을 하였고, 1865721일자로 대통령 명의의 사면장을 받았다.11 남부군 소속 고위 장교들이 많아서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외가 쪽 친척들도 1868년 12월 25일 자로 단행된 존슨 대통령의 무조건적인 사면으로 시민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주(註)
1 Fulkerson Papers, Abram Fulkerson Sr.
2 Fulkerson Papers, Samuel, Francis, Isaac Fulkersons; United States Compiled Military Service Recordsfor American Volunteer Soldiers, Mexican War, 1845-1848, National Archives.
3 Virgil Lewis, ‘Residents of Washington County’, Virginia and Virginians, p. 716.
4 Ibid.
5 Fulkerson Papers, Arthur A. Fulkerson.
6 U.S., Civil War Soldier Records and Profiles, 1861-1865.
7 Fulkerson Papers, Samuel V. Fulkerson.
8 Fulkerson Papers, Isaac Fulkerson and Abram Fulkerson.
9 Virginia, Select Marriages, 1785-1940.
10 Bristol Herald Courier, January 10, 1965.
11 U.S., Pardons Under Amnesty Proclamations, 1865-1869.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