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선교적 교회론’이란 무엇인가?(14)

기사승인 2020.12.29  14:28:54

공유
default_news_ad1

-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제6장 포스트모던 시대와 선교적 교회

포스트모더니즘과 선교 신학적 접근

어울릴 수 없을 것이라고 보였던 모더니즘과 기독교는 서로 충돌과 대립을 경험하면서, 때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수 백 년 동안 발전하며 공존해왔다. 이제 모더니즘이 수명을 다해 가는 이때 기독교 공동체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게 될 것인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마음속에 더 이상 영향을 줄 수 없는 홈리스(homeless)가 될 것인가, 아니면 영적 기갈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현대인에게 계속적으로 선교적 에너지를 분출해내며 그들에게 영적인 안식처를 제공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a. 종교다원주의 패러다임
프로테스탄트 교회 일각에서는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선교의 길을 모색하는 종교다원주의적 패러다임을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과연 이러한 패러다임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선교 신학적 접근방법이 될 수 있는가?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가 뉴 에이지 무브먼트와 공존하면서도 주변의 현대인을 인도해내는 선교의 문을 열어줄 수 있겠는가?

모더니즘 세계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세계 질서로 (New World Order)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떠한 배타적인 종교에 대해서도 인내심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뉴에이지 무브먼트의 추종자들은 유일성을 주장하는 배타적 신앙체계는 세계 평화를 구하며 다양성 속에 통일성 (the unity in diversity)을 구하는 오늘날의 요구에 대해 극심한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에서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신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의 우월성이나 특수한 교리체계를 포기하고 다른 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나갈 때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향한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구원의 메시지도 전통적 기독론에 입각한 예수 유일성의 교리를 변형시켜 구원의 다양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종교에 대한 관대한 태도와 동일시의 자세가 현대인의 마음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기도 한다.

   
 

<선교를 다시 생각하며>(Re-thinking Missions)의 저자, 미국의 철학자 윌리암 호킹(William Hocking)은 이같은 다원주의적 선교방법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한 우월성(superiority)의 주장으로부터 후퇴하여 모든 다른 종교도 똑같이 구원에 이르는 가능한 길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라”고 요청하였다. 죤 히크(John Hick)는 종교 다원주의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안에 보편화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는 <신과 신앙의 세계>(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라는 책에서 기독교가 신앙의 천계(the constellation of faiths)에 절대적 중심이 된다는 전통적 도그마를 파기시키고, 신(神) 자신이 천계에 중심이 되며 기독교를 포함한 그 밖의 모든 종교는 그 신(神) 주위를 공전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죤 히크(John Hick)가 강조하려는 바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신학은 이 시대에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 없는 낡은 시대의 유물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는 더 이상 하나님께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기독교 신학도 종교적 진리를 보여주는 단 하나의 재료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다 궁극적 진리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죤 히크(John Hick)는 기독교의 배타적 성격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생각하고 <성육신의 신화>(The Myth of God Incarnate)라는 책을 편집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교리를 여지없이 융단 폭격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종교와의 대화의 걸림돌인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제거해버리고 다른 종교와의 생산적 대화가 가능하도록 문을 열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혼란스러운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해방시켜 보다 성실하게 기독교 신앙의 길목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였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특정 종교가 하나님의 무한성과 신비를 다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한성은 종교의 다원주의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떤 종교든지 “유일성” 이라든지 “궁극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스미스(W. C. Smith)는 주장하기를 기독교는 우상적인 종교로 변해버렸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그들의 종교를 하나님과 동일시했으며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종교로 변질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나 회개하는 길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을 버리고 다른 종교와 동일시에로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종교의 참 모습은 신비한 것이어서 그 자체가 절대로 하나의 종교적 관점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종교 관용주의적 다원주의가 지금까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공격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피하면서 현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독교 선교방법의 모델이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평가가 필요하다. 우선 성경으로 돌아가 초대교회가 시작되었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기독교는 여러 종교가 다원적으로 얽혀진 시대적 배경 속에 탄생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다원적 종교 배경 속에서 초대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견지하였는가? 이것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를 평가함에 있어 하나의 통찰력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후 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종교 다원적 환경 속에서도 그들이 다른 종교에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다원적 성향의 메시지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달했음을 성경의 기록은 증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당시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면서 구원의 여러 가지 가능성보다는 유일한 한 길을 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 구성원들은 이 같은 메시지를 증거 하므로 주변의 정치권이나 사회 구성원, 종교 지도자로부터 냉소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처절한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초대교회 구성원들이 이 같은 배타적 메시지 때문에 당하게 될 결과를 미리 알았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다원주의자들이 시도하는 것처럼 종교적 관용을 가지고 주변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다니엘 클렌데닌(Daniel B. Clendenin)에 의하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적 매장과 지적인 냉소 등, 어려움을 예상하면서도 그렇게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종교적 관용주의 혹은 종교 다원주의적 선교 모델은 일반인의 환영을 받고, 그 반대로 예수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선교 모델은 사회적인 매도와 지적인 냉소, 또는 계획된 천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대의 복음 전도자들은 만일 그들이 기독교의 유일성을 증거 하려고 할 때 공정성의 문제(the question of fairness)에 직면할 수도 있고, 다른 종교인에게 종교적인 상처를 주는 죄를 범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복음 전도자가 구원의 여러 길을 제시하거나 복음의 메시지의 내용 자체를 바꾸는 일은 성경의 정신이 동의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전통적 기독교 신앙이 구성하고 있는 신학적 요소의 명백한 유기는 적절하지 않고 또한 위험스럽다. 종교 다원주의 선교 모델은 일시적으로는 다양한 종교 세력의 지지나 일반인의 지적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나, 궁극적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다.

b. 상황화의 패러다임
그렇다면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는 어떠한 방법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인에게 다가서서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선교적 사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선교 역사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근본적인 자기 정체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또한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않았을 때 선교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적 기독교가 조심해야 할 것은 단지 우리의 입장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처해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컨텍스트를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적 컨텍스트는 오늘날 우리가 선교해야 될 바로 그 현장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을 잘 파악하여 그들에게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야 할 사명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시대의 선교적 대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무조건적으로 복음을 외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바탕으로 주도면밀한 선교적 과제를 개발해 내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만일 종교다원주의적 패러다임이 문제가 있다면, 그 대안으로 복음주의적 기독교 공동체는 현대인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선교신학적 대안 제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대안은 아마도 복음의 핵심 내용은 유지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인들이 수납할 수 있는 적절한(plausible) 복음 제시를 시도해보는 일이 될 것이다. 즉 복음의 본질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복음제시의 방법이나 접근 방식을 수정하여 교회가 처해있는 문화나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참된 것이라는 확신과, 현대인이 이러한 복음 제시를 심각하게 들을 수만 있다면 그들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우리는 상관성(relevant)의 패러다임혹은 소위 상황화의 방법’(Contextualization)이라는 표현으로 호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텍스트를 가지고 특수한 인간의 상황으로 들어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세상을 향한 선교의 사역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모더니즘이라는 한 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포스트모더니즘의 공동체를 빠르게 형성해 가는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어떤 선교 방식으로 접근해 가야 되며, 어떠한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