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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을 가르는 기도의 서막

기사승인 2021.01.26  11: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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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14)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 김정훈 교수

여호수아의 기도(수 10:1-15): 태양아! 달아!

1) 기도의 정황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너 그들에게 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발바닥으로 밟는 곳마다 모두 그들에게 주었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신다(수 1:1-3).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 모두 미래 사건이 너무도 자명할 때는 이미 성취된 일인 것처럼 묘사할 때가 많다. 가나안 땅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몫으로 지정해 놓으신 땅이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강하고 담대하라고 여러 차례 당부하셨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면 그의 길이 평탄하고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수 1:8-9).

여호수아는 과거에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싯딤에서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냈다. 싯딤은 제2세대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산당 여인들에게 현혹되어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절을 하였다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감염병에 걸려 24,000명이 사망했던 곳이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느보산 북쪽으로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며 요단강에서 동쪽으로 12km 쯤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그리고 강 건너 서쪽으로는 여리고와 길갈이 있다. 여호수아는 백성 모두가 전에 싯딤에서 벌어졌던 부끄러운 사건을 상기하게 하고 또한 두 정탐꾼이 올바른 정신으로 임무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뜻에서 그곳을 파견 지점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리고 정탐꾼을 두 사람만 차출한 것은 주변 기류를 살필 때 기민성과 은닉성에서 다수보다 소수가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의 결과로 보인다. 이뿐 아니라 여호수아는 한 지파에 한 명이라는 관습을 깨고 현실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앞으로의 정복전쟁을 위해 더 지혜로운 판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두 정탐꾼은 여리고로 들어가 기생(매춘부) 라합의 집에 유숙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익명인에 의해 발각되어 자칫 여리고 왕에게 체포될 뻔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기생 라합의 보호와 기지로 살아날 수 있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수 2:9)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처단하신 일을 듣고 마음이 녹아 정신을 잃었었다고 하였다. 이뿐 아니라 라합은 하나님 여호와야말로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다. 라합은 기생 신분이었지만 영적인 눈이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1)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을 이해하였고, (2)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믿었고, (3) 요단 동편에서 일어난 아모리 왕들과의 전쟁이 하나님의 전투였다는 것을 믿음으로 감지하고 있었다(수 2:9-11). 라합이 가졌던 이 믿음의 요소들을 갖추지 못하면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없다(참조. 히 11:31; 약 2:25).

여리고를 정찰하고 기지(基地)로 돌아온 두 정탐꾼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수 2:24)라고 보고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여호수아는 요단강 도하를 시작하였다. 여호수아는 요단강 도하 행렬 구도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최전방에 서고 그 뒤를 이어 백성이 따르는 것으로 잡았다.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수 3:5)고 명령하였다. 성결이 없이는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 나아가라고 명령하였다(수 3:6). 최전방에 진군하는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상징하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제사장들이 백성의 선두에서 행진한 것은 실천력 있는 믿음의 본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요단강 도하 계획을 재가(裁可)해 주셨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수 3:7)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에게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수 3:8)라고 명령할 것을 지시하셨다.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주신 명령은 그들에게 큰 시험(test)이며 위기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실행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담대한 믿음으로 요단강 물에 발을 내디딤으로 당신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실 때에,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를 번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여호와 이레의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가로 가서 발을 담그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때는 물이 가장 많은 곡식 수확기였는데 상류에서 흘러 내려오던 물이 멈춰섰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강 깊숙한 중간 지점까지 들어가 마른 땅 위에 굳게 섰고, 그 사이에 백성들은 요단강 서편 여리고 쪽을 바라보며 부지런히 건너갔다. 이는 제2세대 역시 부모세대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던 것처럼 하나님의 권능으로 요단강을 건넌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제1세대 때와 동일한 권능으로 제2세대와 함께하셨다. 제2세대의 요단강 도하(渡河)는 그들에게 제1세대의 출애굽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싯딤에서 잠시 음란행위와 이방신 숭배에 빠졌던 것은 선조대가 애굽에서 겪었던 경험들과 유사한 것들이다. 그들이 싯딤을 떠나 요단을 건넌다는 것은 제1세대가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것과 유사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던 날 여호수아에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서 있던 요단강 한가운데서 12 돌을 택하여 어깨에 메고 강 건너 진(陣) 칠 곳으로 나가 표징석으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즉, 훗날 자손들이 저 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묻거든, 그들에게 조상들이 범람하는 요단강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마른 땅 같이 건넌 징표로 삼으라는 것이었다(수 4:5-6).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호수아는 요단강 한가운데서 운반해 온 12 돌을 여리고 가까운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수 4:21-22)라고 대답하라고 당부하였다. 또한 여호수아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3-24)라고 첨언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출애굽 제1세대의 홍해 도하 사건에서와 제2세대의 요단 도하 사건에서 보여주신 동일한 권능으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항상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알고, 그분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리고 그분을 경외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직접 명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추가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여호수아는 요단강 밖으로 가지고 나온 12 돌 외에 또 다른 세트의 12 돌을 취하여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섰던 바로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수 4:9). 여호수아는 바로 그 기적의 현장에도 기념비를 세워 건기에 물이 말라 그것이 드러날 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와 함께하심의 은총을 기억할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그 기념비를 보며 하나님의 명령과 전달과 이행, 그리고 명령에 따른 제사장들의 목숨을 건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

요단강 도하 이후의 사건들과 가나안 정복전쟁은 우리에게 깊은 영적 교훈들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에게 길갈에서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전쟁을 앞둔 군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광야 40년 여로 중에 태어난 신세대가 할례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온 것처럼 훗날로 연기할 수도 있을 것인데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신속히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정복전쟁에 임하고, 또한 장래에 그들과 후손들도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나타내며 사는 것이었다. 그들은 할례를 통해 다시 한번 “애굽의 수치”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이 의식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 징집된 하나님의 군사라는 분명한 인식이 없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제사장 나라의 꿈을 실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할례를 단순히 선민 의식의 근거로 인식했을지 몰라도, 할례는 세속을 상징하는 애굽과의 단절 의식(儀式)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전쟁에 나서는 참전 의식이었다.

한편,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 진을 친 것이 첫째 달 즉 니산월 또는 아빕월(태양력으로, 3월 중순~4월 중순) 10일(수 4:19)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연중 이 날 유월절 어린 양을 취하였고(출 12:3), 4일 후(14일)에는 이 양을 잡아 유월절을 지켰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14일 저녁에 길갈 가까운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다(수 5:10). 이 사실은 출애굽 제1세대가 애굽 탈출 직전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첫 유월절을 지키고 “구원”을 체험했던 사건(출 12:21-28, 30)과 평행을 이룬다. 따라서 제2세대가 여리고 평지에서의 유월절을 행한 것은 제1세대의 출애굽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유사한 장면 속에서 제2세대가 제1세대의 출애굽 유월절을 기억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무장할 것을 주문하셨던 것이다. 유월절 어린 양은 장차 오셔서 대속(代贖)의 죽음(참조. 13:15)을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군사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대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악한 영들과 싸우며, 또한 세속주의와 그릇된 전통, 음란, 부도덕, 진리를 대적하는 모든 제도들과도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거국적 할례 의식(儀式) 이후 여호수아는 여리고에서 백성의 지도자로서 특별한 체험을 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자기 앞에 칼을 빼 들고 마주 서 있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수 5:14-15)을 만났다.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할 때, 그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 5:15)라고 하였다. 이 장면 역시 모세가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부름받던 장면과 유사하다(출 3:5). 여호수아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세움을 받았을지라도, 지금 정복전쟁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총사령관으로 모신 최고 지휘관으로 부르심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은 전쟁에서 지휘관이 잘못되면 수많은 군사들이 오합지졸이 되거나 몰살당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그 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작전 매뉴얼을 따라 기적적 방식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 나팔을 든 제사장 7인, 언약궤, 무장한 백성의 순으로 행렬을 이루어 하루에 한 번씩 나팔을 불면서 성 주위를 엿새 동안 돌고, 일곱째 날에는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면서 7번을 돌라는 하나님의 작전명령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었고, 그렇게 하면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그의 말씀은 허무맹랑하기 이를 데 없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을 체험하였다. 하나님의 지시에서 나팔 소리는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전포고였고, 언약궤는 권능의 하나님의 임재를, 그리고 무장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군대를 의미하였다. 7일째 되는 날 길게 울려 퍼진 나팔 소리는, 하나님은 제아무리 강고한 성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신 분이심을 증언하는 소리였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가나안 정복전쟁은 인간의 전쟁이 아니라는 것과 승리는 인간의 힘에 있지 않고 당신의 권능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여리고 성을 기적적으로 무너뜨린 후에 다음 전투 대상은 아이 성이었다. 여호수아는 이 성의 인구 수가 많지 않으니 이삼천 명만 전투에 내보내자는 정탐꾼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3,000명쯤 되는 군인들을 전투에 내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 성으로 올라갔다가 도리어 도망치다가 적군에게 36명이 쳐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 내렸다. 이 패전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신음을 하다가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수 7:6-9). 여호수아의 이 간절한 기도는 자기 군대가 여기서 허무하게 패전하고 말면 요단강을 건넌 것이 무의미하게 되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의 맥이 끊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위대하신 이름이 모욕을 당하지 않겠느냐는 격한 탄원이었다. 그의 호소의 핵심은 도대체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여호수아의 기도을 들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의 패배 원인이 아간의 범죄 때문이라고 알려 주셨다. 아간은 앞선 여리고 전투에서 시날산 명품 외투 한 벌, 은 20세겔(228g 정도), 50세겔(570g 정도) 되는 금덩이 하나를 도둑질하여 그것들을 자기 장막에 감춰 두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칠 때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온전히 바치되 그 바친 물건에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하셨었다(수 6:17-19). 하지만 아간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물건(수 7:12, 13, 15)을 자기 장막에 감추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수 7:11, 15)을 어기고 이스라엘을 배반한 사건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에 연대책임을 물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휘하시는 정복전쟁에서 아간이 취한 행동을 한 개인의 범죄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가 당신의 언약을 어긴 일로 판단하셨다.

여호수아는 아간과 함께 그의 모든 자녀들과 모든 짐승들을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하였고, 압수한 모든 물품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게 하였다(수 7:24-25). 하나님은 정복전쟁 초기의 언약 위반 사건을 이토록 엄중하게 처벌하셨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행동을 보시고 맹렬한 진노를 멈추셨다. 이후에 여호수아는 군사 30,000명을 선발하여 치밀한 작전 하에 아이 성 공략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내용 중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수 8:18-19)라는 기사(記事)가 있다. 여호수아가 손에 든 단창은 모세의 지팡이와 평행을 이룬다. 하나님은 홍해 앞에 선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 홍해 쪽을 가리키라고 하신 것처럼, 전투 중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단창을 들어 아이 성을 가리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종들에게 복음의 지팡이, 말씀의 단창을 들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을 초토화시키고 대승을 거둔 후에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렸다. 그는 “모세가 기록한 율법”(수 8:32)을 제단 돌에 새겨 넣었다. 또 그는 제사장들이 메고 서 있는 언약궤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수 8:33) 모든 사람들을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서게 한 후에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였다(수 8:34).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의 핵심은 물리적 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그 땅에 뿌리 내리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여호수아서 기록자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수 8:35)라고 보도해 준다. 이 광경 속에서 우리는 가나안 정복 시대에 이미 장차 출현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보편성을 띠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우리는 이날의 장면을 통해 장차 하나님의 교회가 남녀간의 차별 극복과 어린아이 존중, 이방 민족의 구원 등에 의해 특징지어질 것임을 예고 받는다. 그날의 모임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때부터 장차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도래할 복음의 개방성과 그의 대속적 희생을 통한 구원의 보편성에 대해 계시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그리심 산이나 에발 산은 아이 성으로부터 북쪽 방향으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이 지역 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 당도하기도 전에 이미 항복선언을 하고 그들을 환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2) 기도의 계기

여호수아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서 모세의 율법 낭독 의식을 가진 후에 기브온 성과 화친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여호수아가 기브온 성(예루살렘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 주민들에게 속아서 맺게 된 조약이었다. 기브온 성 주민들은 이스라엘 군대가 파죽지세로 자기들이 거주하는 땅으로 밀고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목숨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꾀를 내어 사람들을 분장시켜 미리 여호수아에게 보내어,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아주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 것처럼 속여(수 9:9), 여호수아에게서 화친 조약을 끌어냈다. 이렇게 된 사실이 밝혀진 후에 여호수아는 어찌 되었건 이 조약을 근거로 기브온 성 주민들을 진멸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그들을 “하나님의 집”(수 9:23) 곧 “여호와의 제단”(수 9:27)을 위해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 그는 자기가 속아서 조약을 맺었을지라도 이 일에도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 운영에는 예외적 상황도 포함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변장하고 찾아온 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출애굽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요단 동편에서 시혼과 옥에게 행하신 일까지 모든 소식을 들었다고 하며 항복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에 대해 그들과 화친을 맺어도 되겠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수 10:9-10).

좀 빗나간 얘기가 되겠지만, “거짓말”은 무조건 나쁜 것, 금해야 할 것, 비난받아야 할 것, 징벌을 당해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거짓말이란 사실과 다른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그치지 말고 그것이 어떤 성격의(혹은 어떤 종류의) 거짓말이냐라고 질문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히브리 여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히브리 여인들의 남자 아기들을 살려 준 후에 이 일이 발각되어 추궁을 당했을 때,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출 1:19)라고 대답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과 다르므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출 1:17) 그렇게 행한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그녀들에게 은혜를 배푸심으로 히브리 민족이 더욱 번성하고 강하게 되었고, 그녀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다고 보도한다(출 1:20-21).

기생 라합은 자기 집에 여호수아가 파견한 정탐꾼들을 숨겨 준 일이 있다. 이때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수색대를 보내 정탐꾼들을 끌어내라고 명령하였다. 수색대가 자기 집에 들이닥쳤을 때 라합은 시치미를 떼고 그들이 이미 성을 빠져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정탐꾼들은 아직까지 그녀의 다락에 숨어 있었다. 라합의 말은 사실과 다르므로 이 역시 어떤 의미에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합은 그들을 보호해 준 일로 인해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칠 때 온 가족과 함께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이스라엘 중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받을 수 있었다(수 6:23-25).

사사시대에 헤벨의 아내 야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드보라의 부하 바락의 군대와 이에 맞선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의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목숨이 위급한 상황 중에 자기 집에 찾아 온 시스라에게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라고 하며 그를 이불로 덮어 주었다(삿 4:18). 야엘은 시스라가 잠든 사이 말뚝을 그의 관자돌이에 박아 기절시켜 죽였고, 잠시 후 뒤쫓아 온 바락에게 죽은 시스라를 보여주었다(삿 4:21-22). 야엘이 자기에게 피신해 온 시스라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말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과 다른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행위는 전혀 비난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전쟁에 협조한 일로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사실과 다른 인간의 말을 무조건 징치해야 할 죄악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그분의 뜻을 좇는 행위일 때, 오히려 축복하고, 독려하고, 인정해 준다. 하지만 거짓을 일삼고 가짜 뉴스를 퍼뜨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히브리 산파들이나 라합, 야엘의 행동과 동일시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바로를 심판하시듯이, 여리고 왕을 진멸하시듯이, 시스라를 처단하시듯이 징치하실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크고 강성한 기브온 성이 이스라엘 백성과 화친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발끈한 5 왕국의 왕들이 있었다. 이들은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과 헤브론 왕 호함, 야르뭇 왕 비람, 라기스 왕 야비아, 에글론 왕 드빌이었다. 이들은 모두 아모리 족속의 왕들로서(수 10:5) 가나안 땅의 맹주들이었다.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다른 네 지역의 왕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화친한 기브온을 공략하자고 선동하였다(수 10:3-4). 그들은 기브온 성이 이스라엘 군대의 식민지가 되면 가나안 남쪽 지역은 물론 멀리 애굽과의 교역도 끊어지게 되어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5 왕국의 연합군은 기브온으로 올라와 전쟁을 걸어왔다. 기브온 사람들은 5 왕국 연합군을 대적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길갈에 진(陣)을 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전령을 보내 속히 와서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기브온 사람들의 긴박한 요청에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길갈에서 기브온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지략을 써서 야간행군으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여호수아는 과거에 아말렉과 치열한 육탄전(출 17:8-13)을 벌이고 승리했던 경험과 요단 동편에서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의 전쟁, 최근 아이 성 사람들과의 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승리의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었지만, 전쟁은 그에게도 항상 목숨을 담보로 싸워야 하는 공포였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5 왕국 연합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결정적 순간에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 지금까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군사들을 이끌고 기브온 성을 향해 떠나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수 10:8).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싸워시겠다는 약속이었다. 하나님은 5 왕국 연합군이 기브온을 무너뜨리고 여세를 몰아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면, 이스라엘 군대가 얼마나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인지 통찰하고 계셨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개입은 이스라엘 백성이 손을 거두고 구경만 하고 있으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실제로 부대 이동을 시켜야 했고, 전장(戰場)에 나가 적들과 직접 교전해야 했다.

여호수아 군대가 기브온에 도착했을 때는 동이 트는 시간이었다. 여호수아는 이때로부터 시작하여 5 왕국의 연합군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웠다. 5 왕국 연합군들은 이스라엘 군대의 기습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5 왕국 연합군들을 기브온에서 대패시키고 그들을 크게 살육하였다(수 10:10). 이뿐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는 벧호론 비탈길로 도망치는 살아남은 적군들을 맹추격하였고, 이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들을 쏟아 그들을 죽게 하셨다(수 10:11상). 이에 대해 여호수아서 저자는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수 10:11하)라고 보도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 사건들을 신화나 허구로 치부한다. 그들은 영(靈)이신 하나님의 물리적 간섭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기적들을 실제 사건으로 믿지 않는다면 그들의 믿음의 실체(實體)는 무엇이며 믿음의 소재(所在)는 어디인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인간 이성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믿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믿음의 진위(眞僞)이성의 잣대로 판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오만이며 믿음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믿음이란 적어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과 현장개입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적들로 전의(戰意)를 상실하게도 하시고, 마음이 녹아내리게도 하시고, 두려움에 떨게도 하시고,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도 하시고, 자기들끼리 싸워 서로 죽이게도 하시고, 전차 바퀴가 빠져 달아나게도 하시고, 바다 한가운데로 달려들어 수장(水葬)되게도 하시고, 우박에 맞아 죽게도 하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전장(戰場)에서 전투 지휘를 하고 있는 여호수아로서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적들과 전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모자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길갈을 떠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이 전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전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전쟁이 결코 적당히 끝나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 성공 여부가 이 전쟁의 승패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는 이 전쟁이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참조. 수 10:14, 19, 42). 그는 이 기회에 5 왕 연합군을 단호히 진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참조. 수 10:16-42). 하지만 그의 판단에 그날 예상되는 전투량을 생각할 때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저히 전투를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긴박한 상황에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대담한 기도를 올렸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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