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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은 무엇인가?

기사승인 2021.01.28  13: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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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서론

21세기는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이다. 과학과 문명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그 반대로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위기감에 사로잡힌 현대인을 주변에서 수없이 만나고 있다. 그들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에 대해 복잡하게 설명해도 사실은 영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들은 과학의 발전이 인간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가 저물어 가면서 유토피아를 꿈꾸던 현대인의 이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과학 기술의 횡포는 무서운 파괴력으로 환경의 심각한 오염을 야기하면서 현대인을 황량한 벌판에 내몰고 있다. 오만한 인간들의 단 한 번의 실수라도 지구촌에는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위기적 상황이 도처에 널려있다.

그런가 하면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구촌 곳곳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공해로 인한 기후의 이상 변화와 재난,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예기치 않은 코로나 19 사태, 세계 정치의 불안정한 상황은 현대인들에게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들의 목을 죄어 질식하게 하는 후기 산업 사회의 거친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과학 기술 문명의 찌꺼기를 제거하면서 자신의 삶에 신선한 활력을 제공받기 위해 그 탈출구로 그동안 외면했던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위기를 만난 지구촌의 현대인들은 그 해결책을 과학 기술의 힘보다는 영적인 세계에서 그 치유책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일반 사회에서도 “영성”이라는 단어가 중요하게 떠오르며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영성이 없는 종교는 없다. 특히 최근 서구의 많은 지성인들이 현대인의 고독과 절망을 해결하는 길이 종교에 있다고 보고 불교나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의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탐구하고 있다. 21세기는 현대인의 구미에 맞게 새롭게 각색된 고대 종교의 리바이벌 시대가 될 것이다.

특히 뉴에이지 무브먼트가 새로운 종교 사상으로 이 시대의 현대인의 삶에 찾아오면서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 종교적이지 않으면 현대인들의 눈길을 끌 수 없을 정도로 종교는 현대인의 예술, 문화 심지어 과학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문화 코드가 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영성을 구현하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과학과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인 세계를 등한히 여기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 지구촌의 현대인들이 유행병처럼 급속하게 종교적인 영역에 빠져들 자 기독교인들도 영적인 세계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문제는 최근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충실한 영성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나름대로 영성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불교적 영성, 혹은 힌두교적 영성, 심지어 뉴에이지 영성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고 기독교 안으로 침투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점을 매우 염려하면서 기독교 영성 운동의 미래를 주시하고 있다. 영적인 세계는 신비스럽다. 그러나 신비적인 현상이 일어난다고 모두 기독교적인 영성은 아니다. 때로 종교적 신비주의와 기독교적 영성이 만나 매우 위험한 영성으로 변조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 보고 있다.

그러기에 일부에서는 기독교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주장도 있다. 그 이유를 정리해 본다면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성경에 ‘영성’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영성’이라는 단어가 타종교에 서도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용어 사용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영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너무 모호하기 때문에 ‘영성에 대한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사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영성’에 대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울 서신에는 빈번하게 “영적으로”(프뉴마티코스)라는 부사 형태가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2:14에 보면 바울은 “영적으로 분별하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영성’ 대한 중요한 개념을 보여준다. 즉 ‘영성’은 성령의 일을 받으며,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살고, 성령이 하시는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떤 영적인 능력 혹은 영적인 삶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영성’이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고 기독교에서 사용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미 기독교에서 넓게 사용되고 있는 ‘영성’이라는 개념을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잘 규명하여 오히려 적용할 할 필요가 있다. ‘영성’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삶과 관련된 영적인 자세 혹은 경건의 능력과 관계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우리 속에서 깊이 잠자고 있는 이러한 ‘영성’을 깨우는 운동이 필요하다. 우리의 잠자는 ‘영성’이 일어나야 한국교회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우리의 ‘영성’이 바로 깨어나지 않는 한 한국교회 안에는 ‘영성’의 대 혼란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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