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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남장로교 파송 '매티 새뮤얼 테이트' 선교사의 배경 연구(1)

기사승인 2021.02.09  13: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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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수 교수의 교회사 논단

미 남장로교 파송 매티 새뮤얼 테이트(Mattie Samuel Tate) 선교사의 배경 연구(1)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매티 새뮤얼 테이트(한국명 최마태) 선교사의 개인 사진

들어가는 글

미 남장로교회가 파송한 7인의 선발대 가운데 여성이 절반을 넘는 4명이었는데, 앞선 글들에서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선교사와 전위렴 선교사의 부인인 메리 몬태규 레이번 선교사를 다루었다. 이제 남은 여성 선교사들은 이눌서 선교사, 즉 레이놀즈 선교사의 부인인 팻시 볼링 선교사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선교 사역에 헌신했던 매티 새뮤얼 테이트 선교사이다. 이들도 7인의 선발대라는 상징적인 가치와 의의에 비해서는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한국 사역에 대한 서술 정도로 그치고 있는 경향이다. 더군다나 이들의 성장 배경과 신앙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티 테이트 선교사의 모친인 메리 제인 테이트 여사

즉, 이름은 있는데 내용이 없어서 제대로 빛이 나지 않는 무명의 용사와 같다고 하겠다. 감춰진 역사를 들추어서 이들을 빛나게 하는 것은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숨겨지고 가려지고 무시되고 간과된 역사를 드러내어 정식 무대로 등단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매티 테이트(한국명: 최마태) 선교사의 배경을 살펴보려고 한다.
 

매티 새뮤얼 테이트 선교사의 가정 배경

매티 새뮤얼 테이트 선교사는 미주리(Missouri) 주 칼라웨이(Callaway) 카운티에 속한 풀턴(Fulton)에서 1864년 11월 24일에 부친인 캘빈 호웨 테이트(Calvin Howe Tate)와 모친인 메리 제인 페이튼 테이트(Mary Jane Payton Tate)의 둘째로 태어났다.1 매티 테이트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하여 신청한 공식 문서를 통하여 그녀의 생년월일이 비로소 정확하게 알려지게 되었다.2 이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출생년도는 미 연방 센서스 문서에서 1865년 경(about 1865)으로만 명시되어 있었다.3 그녀의 이름도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마르다’(Martha)로 사용하다가 그 후에는 마르다의 닉네임인 매티가 공식 이름으로 등재되었다.

   
▲ 매티 테이트 선교사의 어린적 추억이 담긴 미주리 주 칼라웨이 카운티의 옥스바스

그녀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은 오빠인 루이스 보이드 테이트(Lewis Boyd Tate, 최의덕) 선교사와 둘 뿐이지만, 부친과 모친 모두 상처한 후 재혼이었기 때문에 각자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었던 자녀들을 포함하면 모두 13명이나 된다. 부친이 첫 번째 결혼에서 33녀를 두었고, 모친이 32녀를 양육하였다. 부친의 첫 부인이었던 엘리자벳이 1852년 8월 2일에 세상과 작별하였다. 모친의 첫 남편이었던 로버트 밀러가 골드러시(Gold Rush)가 한창일 무렵 캘리포니아로 금을 찾아갔다가 1853년 2월 5일에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고, 가족들이 있는 고향에 묻히지도 못하고 캘리포니아의 엘도라도(El Dorado)와 뉴타운(Newtown) 사이의 어느 곳에 매장되었을 것이라고만 추정될 뿐인데, 한마디로 객사를 하고 말았다. 이런 개인적인 사별의 아픔을 경험했던 두 사람이 재혼하였던 것이다.4

   
1880년 미국 연방 센서스

1860년에 실시된 연방 센서스에서 볼 것 같으면, 모친 메리는 재혼한 남편과 그의 자녀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5 재혼한 남편의 자녀들 가운데 4명이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돌봄이 필요하였지만, 돌아가신 생모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던 자녀들 입장에서는 새어머니인 메리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연방 센서스와 다르게, 미주리주의 자체 센서스를 볼 것 같으면, 1876년에 부친 쪽 자녀들과 모친 쪽 자녀들이 모두 함께 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6 이런 자료들을 종합해서 보자면, 재혼의 초기에는 부친 쪽 자녀들과 살다가 점차적으로 모친 쪽 자녀들까지 함께 모여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 1911년 1월 11일자 미 시민권자 거주 등록증

이런 어색한 관계 속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1862928일에 태어난 루이스 보이드 테이트(훗날의 최의덕 선교사)1864년에 세상에 나온 마르다, 즉 매티 새뮤얼 테이트 남매였다.7 재혼 가정에서 태어난 루이스와 매티 남매는 성경에 등장하는 야곱의 막내 아들들인 요셉과 베냐민 같았다.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부친과 모친 쪽 자녀들을 통틀어 루이스는 12번째로 막내 아들이었고, 매티는 13번째로 막내 딸이었다. 이 남매의 등장으로 재혼한 가정의 분위기가 훨씬 좋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1879년 7월 14일에 부친인 캘빈 테이트가 하늘의 부름을 받고 난 후에는 모친 메리와 두 남매만 남게 되었다.8 물론 이복 형제들이 장성하여 독립을 한 이유도 있었다.

   
1935년에 43년 여의 한국사역을 마치고 미국 시애틀 항에 7월 9일에 입항했다는 기록

매티가 1892년부터 1935년까지 43년여에 걸친 한국 사역을 마치고 고향인 미주리 주 칼라웨이 카운티 바로 옆에 위치한 어드레인 카운티의 멕시코로 은퇴한 후 조카인 에그버트 밀러(Egbert Miller)가 고모인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것을 볼 때, 루이스와 매티 모두 지속적으로 이복 형제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9
 

매티 새뮤얼 테이트 선교사의 소명과 헌신의 요인들

그렇다면, 이런 가정 배경 속에서 루이스와 함께 매티 새뮤얼 테이트가 소명을 받고, 은자의 나라였던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헌신하게 된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 매티 테이트 선교사도 한 시대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군분투하면서 다양한 영향들을 받으면서 깍기고 다듬어져서 열정을 불태우는 사역자로 부르심에 응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일곱 가지 요인들을 주제별로 나누어 서술하면서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들에 대한 사실들도 더불어 언급코자 한다.

 

   
▲ 1940년 미 연방 센서스. 매티 테이트 선교사가 은퇴후 소천할 때까지 조카인 에그버트 밀러 가족과 살았다는 기록

주(註)
1. U.S., Passport Applications, 1795-1925 for Mattie Tate, November 25, 1892; U.S., Consular Registration Certificates, 1907-1928 for Mattie Tate, January 11, 1911.
2. U.S., Consular Registration Certificates, 1907-1918 for Mattie Samuel Tate, January 11, 1911.
3. 187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Matti Tate; 188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Matti Tate.
4. US., Find A Grave Index, 1600s-Current for Robert Miller, Elizabeth Tate, Mary Jane Tate, Calvin Howe Tate.
5. 186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Calvin Howe Tate.
6. Missouri, U.S., State Census Collection, 1844-1881 for Calvin Tate and Mary Tate.
7. 187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Lewis Boyd Tate and Martha (Matti) Samuel Tate.
8. US., Find A Grave Index, 1600s-Current for Calvin Howe Tate; 188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Mary Jane Tate, Lewis and Martha Tate.
9. 194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for Egbert Miller and Matti Samuel Tate.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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