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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와 나쁜 설교(4)

기사승인 2021.02.15  1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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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진 교수의 성경적 설교 논단

김경진 교수/ Ph.D, 호주 알파크루시스 대학교 박사원장
 

   
▲ 김경진 교수

4. 한 단원인 본문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裁斷)해서는 안 된다.

4.1. 눅 5.1-11, 어부 제자들의 부르심

누가복음 5.1-11은 확실히 한 사고의 단위(a thought unit)를 구성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이 이야기 전체를 통하여 본래 저자 누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본문은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가장 잘못 설교되어지는 대표적 본문 중 하나처럼 보인다. 다수의 설교자들은 이 본문이 전체로서 전달하고자 하는 본래의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여 본문 전체를 다 읽고도 실제로는 7절까지만 설교한다. 그리고 설교의 초점은 5절에 맞춘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이렇게 설교할 때 설교의 요점은, 전문가 어부가 밤이 맟도록 애를 썼어도 허탕을 쳤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니 기대 밖의 엄청난 어획을 얻음으로써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적 노력으로는 안 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하면 불가능한 기적도 경험할 수 있다는 취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할 경우, 7절의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가 8절에서 갑자기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며 주님께 자신을 떠나가도록 요청한 사실을 설명할 길이 없다. 뜻밖의 기적을 체험했으니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사해야 할 베드로가 왜 갑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논리적 답변은 그가 이전에 죄를 지은 사실이 있음을 전제로 해야 할 터인데, 본문에서 그에 대한 근거는 결국 5절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5절의 한글 번역은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지 않다. ‘말씀에 의지하여’ (evpi. tw|/ r`h,mati, sou)라고 번역된 원문의 바른 의미는 ‘말씀대로’ at your word, 그래서 NIV는 이를 because you say so 라고 번역하였다. 우리말 번역처럼 결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글 번역에서는 이를 ‘말씀에 의지’한다는 의미로 긍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말았다. 따라서 본래의 취지대로 5절을 번역한다면,

전문가인 우리 어부가 밤이 맟도록 애를 썼어도 아무 것도 잡지 못했으나, 당신이 말하는 대로 한번 해 보겠소, 어디 한번 두고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누가복음에서 전문가 어부들이 사역 초기에 목수(木手)로 알려진 예수님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이 기사 앞에 기록된(눅 4.38-39) 시몬의 장모 치유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중한 열병으로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단번에 치유한 사건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고, 따라서 목수인 예수님이 전문가 어부인 자기들이 보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을 때, 마지못해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점을 고려할 때, 5절은 긍정적으로만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은 5절이 ‘베드로의 의심’(Peter’s doubt)을 드러낸다고 지적하고 있다.1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우리는 주님에 대한 호칭이 5절과 8절에서 달라진 것을 제시할 수 있겠다. 즉 처음에 베드로는 ‘선생님’(evpistata,thj)이라고 불렀으나, 나중에는 ‘주여’ (ku,rioj)라고 부른 것이다. 처음에는 보통 사람들보다는 뛰어난 선생님으로 알았으나, 그분의 말씀대로 행한 후 기적을 체험하고는 예수님이 주(主), 곧 하나님임을 깨달은 것이다.2

위의 사실을 본문 해석에 반영할 때, 누가가 애당초 이 본문을 통하여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단순히 주의 말씀에 의지하라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르려하는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 및 절차로서 ‘회심(回心)’을 강조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3 이러한 누가복음의 특징은 마태, 마가복음의 병행 기사와 비교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마태, 마가복음에는 베드로의 회심에 관한 부분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본문인 5.1-11 전체를 함께 고려할 때, 우리는 저자 누가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진정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는데, 설교자들이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중간에서 본문을 잘라버리면서 5절에 초점을 두고서 7절까지만 설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고 마는 것이다.
 

4.2. 고전 11.17-34, 성만찬에 대한 오해

오늘날 교회에서 성찬예식을 거행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본문은 아마도 고린도전서 11.17-34일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17-34절까지가 한 단락이고 한 단원인데,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구절은 23절에서부터 시작한 후 마지막까지 읽지 않고 32절에서 멈춘다. 이렇게 본문을 설교자 마음대로 재단해 버리게 되면4, 자연히 본문에서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죄는 하나님과 성도 개인 사이의 도덕적 죄가 되고 만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의 문제만일까?

본문은 분명히 17절부터 시작하는데, 바울이 성만찬에 대하여 언급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 준다. 고린도 교회 내의 일부 부자 교인들이 예배 시간 이전에 일찍 교회에 와서, 자기들이 가져온 음식과 포도주를 먼저 먹고 마셔버린 나머지 술에 취해버린 것이다. 당시 교회 모임의 일반적 관습은 부자 교인들이 음식과 포도주를 넉넉히 가져와서, 그것을 막노동자나 노예들과 같이 가난한 교인들과 함께 나눠먹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고린도교회에서는 이러한 관습이 무너진 까닭에 부자교인이 방자하게 처신했던 것으로 보인다.5

아울러 당시에는 공동식사인 애찬과 성찬이 아직 철저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까닭에 애찬 전, 혹은 애찬 중, 아니면 애찬 후 성찬을 나누었는데, 이렇듯 일부 부자 교인들은 먹고 취한 상태에 있고, 뒤늦게 도착한 가난한 교인들은 굶주린 상태에 있다면, 결국 성찬이 의미하는 바 공동체성은 깨어져 버린 꼴이 되는 것이다. 무릇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찬이란 한 떡과 한 잔에 참여함으로써 하나 됨에 의미가 있는 것인데, 부자 교인들과 가난한 교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극명한 차별은 결국 성찬의 본질적 의미를 훼손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부자 교인들에게 본문의 결론 부분에서(33-34절), 시장하면 집에서 먹고 오면 될 것을 구태여 공동체 모임인 교회에 와서 방자하게 먹고 취함으로써 가난한 교인들을 멸시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본문의 서론과 결론이 한결같이 공동식사로 인해 야기된 교회 공동체 내부의 빈부 갈등을 말하고 있는데, 중간에서(23절) 이를 뚝 잘라버린 후 설교하게 되면, 이것은 본문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들의 횡포(?)로 말미암아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고린도 교회 내에 존재했던 빈부 간의 경제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요 메시지인데, 만일 설교자들이 이를 중간에 마구 잘라버린 채 설교하게 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교훈을 듣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 하고 싶은 개인의 견해를 성경을 핑계 삼아 전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무릇 설교자는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전하는 도구(tool)가 되어야 하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외면한 채,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성경 본문(text) 을 핑계(pretext) 삼아서 설교해서는 결코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성경 말씀 아래 앉아서(sit below the Bible)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귀담아 들어야 하지, 성경 말씀 위에 서서(stand above the Bible)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성경을 구실로 삼아 설교하는 교만함을 가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강단에 만연되어 있는 공공연한 행태를 보면, 하나님 말씀이 설교자의 목표가 아니라 설교자 개인의 철학이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설교자의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 현상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설교의 목표가 아니라 설교자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릴 때, 강단의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교자는 자기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성경 본문을 빙자하여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찾아내어 그것을 전달하는 도구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의 강단에서는 이러한 불경스런 행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성경 말씀이 설교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내용의 수단이 되어버릴 때, 그것은 더 이상 설교가 아니라 공허한 궤변이 되고 말 것임을 우리 모두는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주(註)

1. E. E. Ellis, The Gospel of Luke (The CenturyBible; London: Nelson, 1966), 103; Schweizer, The Good News according to Luke, 104. 또한 레온 모리스는 베드로의 이러한 불만을 ‘함축된 책망“ (an implied rebuke)이라고 불렀다(Leon Morris, Luke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IVP, 1986], 112).

2. 8절의 기적은, 결국 주님이 베드로의 항변을 기적으로 응답하신 것이라고 엘리스는 설명하고 있다(Ellis, The Gospel of Luke, 103).

3. 김경진, 『누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80-82. 참고, R. E. O. 화이트, 『누가신학 연구』 (김경진 역; 서울: 그리심, 2003), 22-24.

4. 김경진, 『역사와 해석』, “고린도 교회의 경제적 갈등과 처방” (서울: 대서, 2015), 307-308.

5. Wayne Meeks, The First Urban Christians: The Social World of the Apostle Paul (New Haven: Yale University, 1983), 159; John K. Chow, Patronage and Power: A Study of Social Networks in Corinth (JSNTSS 75; Sheffield: JSOT, 1992), 183; David Horrell, “The Lord’s Supper at Corinth and in the Church Today,” Theology 98(1995), 198; D. C. Passakos, “Eucharist in the First Corinthians: A Sociological Study,” RB 104(1997), 195-198.

 

 

김경진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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