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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위한 간절한 기도의 피날레

기사승인 2021.02.17  14: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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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17)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김정훈 교수

한나의 기도(1): 아들을 주소서(삼상 1:9-18)

2) 기도의 계기

사사시대 말기에 엘가나라고 하는 한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에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엘리 제사장이었다. 엘가나는 레위 지파 후손 중의 한 사람이었다(대상 6:34-38).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였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아마도 본처인 한나에게 자식이 없으니 한 여인을 더 맞아들였던 것 같다. 한 사람이 두 아내를 둔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와 배치된다.

하나님이 창세 때 세우신 부부제도는 일부일처제다. 하지만 히브리 사람들은 아브라함 시대 이후 자식이 없으면 일부다처제를 허용, 묵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세속주의적 혼인제도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혼인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원칙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다. 이 원칙을 어길 때는 상상을 초월한 폐단과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비근한 예로, 기드온은 사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내를 두었다. 그는 아내들을 통해 70명이나 되는 아들을 낳았다(삿 8:30). 이뿐 아니라 기드온은 세겜 성에도 첩을 두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은 아비멜렉이었다(삿 8:31). 기드온이 죽은 후에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자기의 이복형제 70명을 한 바위 위에서 살해하였다(삿 9:5). 하지만 아비멜렉 역시 적진(敵陣)의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 두개골이 골절되었고, 이로 인해 죽어가면서도 여자의 손에 죽었다는 불명예가 싫다며 자기편 청년에게 칼을 빼어 죽여달라고 간청하여 그의 칼에 찔려 사망하였다(삿 9:53-54).

아무튼 엘가나에게도 일부이처는 가정불화의 요인이 되었다. 엘가나는 해마다 매년제를 드리기 위해(삼상 1:3, 21) 가족들을 데리고 자기가 거주하는 성읍 라마(삼상 1:19)에서 나와서 실로로 올라갔다. 라마에서 실로까지는 약 22km 거리였다. 신약시대에는 이곳이 “아리마대”로 불린다(참조. 마 27:57). 실로에는 여호수아 때부터 사무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성막이 있었으며, 따라서 이곳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예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호수아가 처음에는 길갈에 진을 치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실로로 옮겼다(수 14:6; 18:1). 이곳에서는 매년 여호와의 절기를 지켰고 그때마다 수많은 실로의 여인들이 나와 춤을 추며 축제를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삿 21:21, 23).

   
 

“매년제 이스라엘 남자들이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에 매년 3회 하나님께 나아가 드리는 제사를 가리킨다(34:23; 16:16). 엘가나 가족은 매년 한 차례 실로에 있는 성전으로 올라가고 매년제를 드리고 나머지 두 번은 자기가 거주하는 라마에서 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매년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감사제로 제물의 기름진 부분은 불에 태웠고, 나머지 부분은 제사장과 경배자가 함께 나누어 먹었다(참조. 출 29:27-28; 레 3:1-5; 7:31-36). 당시에 실로에는 엘리의 두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있었다. 엘가나가 가족과 함께 실로로 올라가 제사를 드릴 때면 엘가나는 제물의 몫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나누어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다. 이는 그가 한나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한나로서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니 흐뭇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엘가나의 행동에 브닌나는 기분이 몹시 상하였다. 브닌나의 눈에 남편의 행동이 무척 거슬렸고, 한나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브닌나에게는 한나가 도저히 자기를 따라잡기 힘든 절대 격차 요인이 있었다. 당시, 한나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자기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사무엘상의 저자는 한나의 불임 이유를 꼭꼭 누르듯이 두 번이나 진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나가 임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녀의 태를 닫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삼상 1:5-6. 히브리어 원문 또는 영역[英譯]을 볼 것).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한 주권 하에 한나로 하여금 특별한 아이를 낳게 하고, 그 아이로 특별한 방식으로 성장하게 하여 후일에 백성의 존경받는 인물로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세우는 역할을 하게 하고자 계획하셨던 것이다. 한나가 불임으로 인해 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을지라도, 그녀의 고통은 위대한 일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안에서 발생된 일이었다. 나의 고통의 원인이 내 속에 있는 죄에 있다면 신속히 회개해야 할 따름이고, 나 밖의 다른 무엇에 있다면 극복과 회복을 위해 호소해야 하겠고, 그것이 하나님께 있다면 특별한 은혜와 반전을 기대하며 찬양해야 할 것이다.

브닌나는 브닌나대로 한나가 못마땅하여 화가 날 때마다 한나를 자극하여 격분시켰다(삼상 1:6). 브닌나는 은연중 자기에게 자식이 있는 것을 내세워 한나의 속을 긁어 놓았다. 자식이 없는 한나로서는 마음이 심히 괴로웠다. 본문은 브닌나를 적수”(짜라)라고 묘사하는데(삼상 1:6 ) 이는 한나와 브닌나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반영한다. “괴롭게 하더라”(삼상 1:6)라는 말의 원어 라암벼락 치듯 치다라는 뜻으로 한나가 브닌나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두 여인 간의 충돌은 매년 실로의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반복되었다. 예배하러 올라가서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있으니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엘가나는 아주 점잖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엘가나는 제물의 몫을 나눌 때마다 사랑하는 한나에게는 2를 브닌나에게는 1을 주었고, 이에 브닌나가 감정이 틀어지면 한나를 격분시켰다. 그럴 때면 한나는 속이 상하여 울고 먹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 대해 엘가나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하에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엘가나도 이제는 더 이상 한나의 마음을 상한 상태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나에게 물었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 이것이 위로의 말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나로서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앞에, 그리고 매년 반복되는 현실적 상황 앞에, 자신도 내면에 자리 잡은 인간적 비애를 가눌 수가 없었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라는 남편의 애교스러운 말이 그나마 약간의 위로가 되기는 하였지만 문제의 근본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한나는 매년 벌어지는 불화와 고통을 더 이상 방치해 두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격정(激情)과 슬픔은 도리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한편, 하나님은 엘가나 가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이 택하실 이스라엘의 왕에게 기름 부을 성별된 인물을 준비하고 계셨다.

 

3) 기도의 내용

한나는 실로에서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신 후에 일어나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 그 때에 제사장 엘리 는 여호와의 전 문기둥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나에게는 영혼의 아픔이 있었다. 그녀는 괴로운 마음으로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원문을 보면, “혼의 쓰라림이 있어 심하게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혼”을 가리키는 네페쉬는 본래 “마음, 생명”을 뜻한다. 한나는 자신의 마음과 생명이 할퀴어진 것처럼 영혼에 큰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이렇게 쓰디쓴 아픔 가운데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했던 것이다.

그녀의 하나님께 서원하였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1). 이것은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서원 기도였다. 나실인(Nazirite. 나지르[성별된, 봉헌된], 나자르[성별하다, 봉헌하다]에서 유래된 단어)은 나이나 남녀 구별없이 자발적으로 일정 기간 또는 일평생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로 서원한 사람을 가리킨다(참조. 민 6:1-12).

나실인에게는 몇 가지 금기 사항이 있는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고(몸과 마음의 헌신), 서원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하며(헌신과 성별의 표식),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죽음은 죄의 결과이므로 죄를 멀리한다는 의미).

하나님은 한나가 서원 기도를 할 때까지 그의 태를 닫은 채 기다리셔야 했다. 하나님은 한나의 태를 닫으심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한나가 불임 상태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시면서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누셔야 했다. 한나가 보란 듯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되면 얼마나 기뻐서 애지중지하며 그 아이에게 집착할 것이겠는가? 그리고 브닌나에게 유세를 부린다면 얼마가 가정불화가 가중될 것이겠는가? 더구나 그렇게 자란 아이가 민족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녀는 얼마나 어깨가 으쓱해질 것이겠는가? 한나가 불임의 수모와 고통을 이겨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아이의 나실인 서원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기다리심의 결과였다.

제사장 엘리는 엘가나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한나의 기도는 장시간 계속되었다. 엘리는 한나의 입술을 주목해 보았는데, 뭔가 이상한 점이 보였다. 한나가 기도를 하는데 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한나는 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리는 한나를 오해하였다. 한나가 술에 취한 줄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한나에게 말하였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삼상 1:14). 이에 한나가 대답하였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삼상 1:16).

한나의 대답은 세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그녀는 제삼자가 보기에 포도주나 독주에 취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영에 깊이 취하여 자신의 소원을 주제로 그분과 소통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둘째, 그녀는 자신이 결코 악한 여자 곧 무익한 여자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여기서 악한 여자는 문자적으로 벨리알의 딸이란 말인데, 벨리알무익한, 무가치한, 쓸모없는이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도 이 용어가 나오는데 바울은 이 용어를 “사탄”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고후 6:15). 한나의 뜻은 자기가 그렇게 악한 여자로 치부되어도 좋은 하찮은 여자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그녀는 자기가 지금껏 얼마나 억울한 마음과 격한 감정을 품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그녀는 브닌나와의 불편한 감정 때문에 자신이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었다.

한나의 답변에 엘리가 응답하였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17). 엘리의 말을 듣고 한나는 기뻐서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삼상 1:18)라고 하였다. 이 말을 원문으로부터 의역하자면 “당신의 여종이 하나님께 은혜 받는 것을 당신의 눈으로 보게 되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할 수 있다. 한나는 여호와의 전에서 나가 다시 가족들에게로 가서 음식을 더 먹었다. 이날 이후로 한나의 얼굴에서 다시는 슬픈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4) 기도의 응답

엘가나 가족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경배하고 실로에서 다시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엘가나는 한나와 동침하였고 하나님은 한나를 “생각하[셨다]”(삼상 1:19). “동침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야다인데 이 말은 “알다”라는 뜻이다. 이는 육체적, 정신적 사랑의 절정에 도달함으로써 서로를 깊이 아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한나를 생각하셨다는 것은 그녀의 서원 기도를 기억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응답의 결과 한나는 임신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닫혀있던 한나의 태를 열어주신 것이다. 때가 이르러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셈”(이름)과 “엘”(하나님)의 합성어로 그 뜻은 “하나님의 이름” 또는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다. 그런데 한나는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에 대해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삼상 1:20)라고 설명한다. 한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알”(구하다)과 “메엘”(하나님께)을 결합시킨 “사알 +메엘”을 한 단어인 것처럼 빨리 읽으면 “사무엘”처럼 들리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나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은 것이 너무도 기뻐서 언어유희적 설명을 곁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서원 기도 후에 얻은 아들이니 하나님 앞에서 그 서원을 지키는 일이다. 다음 해 엘가나와 그의 온 집이 하나님께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실로로 올라갈 때에 한나는 올라가지 않고 아이와 함께 집에 남아 있었다(삼상 1:21-22). 그 이유는 아이를 나실인으로 바쳤으니 젖을 뗀 후에 아이를 데리고 함께 올라가서 하나님께 드려 일생 동안 그곳에서 살게 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다(삼상 1:22). 엘가나는 한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였다. 엘가나가 한나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23 상).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양육하며 그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약 3세 무렵까지 젖을 먹였을 것이다. 어쩌면 엘가나와 한나는 젖을 뗄 때 잔치를 베풀었을 것이다(참조. 21:8)

한나가 사무엘의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실로로 올라갔다. 그녀는 이때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으로 찾아갔다. 서원제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서원제”란 하나님이 서원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것에 감사하여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를 가리킨다(참조. 민 30:2). 엘가나 가족은 실로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다. 물론 사무엘은 아직 어린아이였다(삼상 1:24). 사무엘의 부모는 어린 사무엘의 손을 붙잡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갔다.

한나가 그에게 말하였다: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삼상 1:26-28). 하나님께서 전에 술에 취한 듯이 기도했던 자신을 돌아보시고 응답해 주신 것에 대한 기쁨의 고백이다. “맹세하나이다”는 “진실로 사실을 말합니다”라는 뜻이다. 자신의 말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한 화법이다. 한나로서는 자신의 서원 기도의 응답인 어린 사무엘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는가? 하지만 갓 젖을 뗀 어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곳에 떼놓고 돌아서야 한다는 것은 엄마로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나는 자기의 서원을 실행하는 일에 단호하였다. 인간적 섭섭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지라도 그녀는 아들을 나실인으로 바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한나는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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