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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영성(2)

기사승인 2021.02.25  15: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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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가. 좁은 문

현대인은 대안 없이 문제만 지적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학교교육이 문제가 있다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와 국가 경제에 문제가 있다면 그 대안이 있어야 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크고 넓은 길이 보이는 것하고 달리 실제로는 망하는 길이라면 그 대안으로 다른 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대안으로 좁은 제시한다. 그러나 이 길은 외관상 “좁고 협착하다.” 따라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이는 것 하고는 달리 이 길은 사는 길이다.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 그렇지 들어가기만 하면 그는 반드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 이 길은 죽는 길처럼 보인다. 이 길로 가다가 내 인생 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마침내 산다. 살아도 제대로 살게 된다.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인생은 무엇을 말하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은 넓게 보면 예수님이 주신 모든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앞뒤 문맥을 연결시켜 좁게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산상 수훈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셨을 때 그들이 듣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 교회의 크리스천들은 말씀을 듣고 즐기는 사람들로 변해버렸다. 어느 특정한 목사님이나 강사를 졸졸 따라다니고, 어느 특정한 목사가 설교하는 곳으로 교회를 옮겨 등록하기 시작했다. 또한 특정한 설교자의 설교가 방송이나 ‘유튜브’를 통해 유포되면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의 설교가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는 그저 참석하여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뿐 소위 은혜받는 것은 그 유명한 강사들의 설교를 듣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들었다고 그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순종한 말씀만 내 것이 된다는 것이다. 단지 말씀을 듣고 “기가 막힌 말씀이다. 너무 좋다” 하면서 말씀을 즐기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를 무섭게 책망하신다. 말씀을 듣고 그저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매우 위험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님이 주신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오른뺨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원하면 겉옷까지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십리까지 가는 것이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정말 기도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살아야 민족으로부터 배반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매우 이기적이고 그 이미지 밑바닥이다.

말씀대로 사는 길은 길이 좁아서 좁은 길이 아니고 사실은 찾기 힘들어서 좁은 길이다. 마태복음 7:14에 “이 길은 찾는 이가 적다”고 하였는데 “찾는 이가 적다”는 말은 “그 길이 인기가 없어 찾고 싶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실 그 본 뜻은 좁은 길의 참 가치를 발견하고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때 인기 개그맨이었던 심형래가 <용가리>라는 영화를 만들고 웃기는 말을 한마디 했다. “못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안 해서 못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하면 다 된다”는 말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좁은 길은 그런 길이 아니다. 아무나 다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 ‘좁은 길’은 사실 세상 사람들의 육적인 눈으로는 전혀 볼 수 없는 길이다. 자신의 이익 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현대인에게는 그 길이 결코 안 보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람들이 시도를 안 해서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안 보여서 못 찾는 것이다. 그래서 좁은 길이 무엇인지 누구에게든지 보이기만 해도 그는 이미 충분히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오른뺨 때릴 때 왼뺨 돌려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는 이미 축복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인 것이다.
 

나. 보이는 것과 실체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왜 기록되었는가? 어떤 사람은 이 책이 매우 두렵다고 말한다. 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을 깊이 묵상하면 매우 큰 교훈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우리는 “보이는 현상과 실체는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을 얼른 보면, 사탄이 온 세상을 장악하고, 사탄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보인다. 사탄을 숭배하지 않으면, 모든 불이익을 받게 되며 사탄의 세력에 의해 짓밟혀, 피를 토하고, 고통 받고, 세상에서 버림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사탄의 세력을 추종하면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은 크게 이익을 보고 화려하게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 사탄의 길, 우상의 길로 들어가고, 그 길만이 사는 길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체가 아니다. 현상일 뿐이다. 실체는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20:4에 보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수 때문에 목 베임을 받은 자가 사실은 저주받거나 멸망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는 자이며,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순간 승리에 도취되어 서 있던 마귀는 불과 유황 못에 던져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함께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계20:10).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핵심이다. 말씀을 지키고, 주님을 따르면서, 좁은 길로 가는 것이 망하거나 손해 보는 길이 아니라 복된 길이며 진정으로 사는 길이라는 것이 계시록의 가르침이다.
 

다. 성공 증후군의 깊은 늪

마태복음 7:13에 나타난 ‘좁은 길’은 나타난 현상으로 보면 죽는 길이다. 오히려 ‘넓은 길’이 사는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체는 어떤가? ‘좁은 길’이 사는 길이고 ‘넓은 길’은 죽는 길이다. 요즈음 현대인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성공’이라는 단어이다. 그래서 ‘성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은 잘 팔린다. 현대인은 성공증후군’(success syndrome)의 늪에 깊이 빠져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현상과 실체를 구분 못하고, 거품과 실체를 혼동한 채 일시적이고 현실적인 성공을 위해 넓고, 화려하고, 쉬운 길로 가려고 하고 있다, 최근 교회 안에서도 ‘성공’의 상징처럼 보였던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비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성공증후군’에 빠져 성공이라는 가시적 현상을 추구하다가 무너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태복음 7:26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어리석은 사람과 주님이 보시는 어리석은 사람의 기준이 너무 다르다.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어리석다고 보시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사람’도 외관상으로 볼 때 말씀에 대해 관심도 많고 또 말씀을 들을 때 잘 듣는다는 것이다. 때로 성경 공부도 열심히 참석하고, 심지어 말씀의 의미도 잘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문제는 말씀을 그렇게 듣고도 실제로는 도무지 행치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시는 어리석은 사람의 기준은 말씀을 듣는 것은 잘 하는 데 문제는 그 말씀대로 전혀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의 기준에 속해 있다.

21세기는 어떤 사람이 성공할 것인가? 한 마디로 ‘좁은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성공할 것이다. 지나간 20세기를 회고해 본다면 인류가 ‘넓은 길’로 오다가 위기를 맞이한 죽음의 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1차, 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 월남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이 20세기 한복판에서 일어났으며,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위시하여 수많은 환경과 공해 문제로 인한 생태의 교란, 자연 기후의 급격한 변화, 유전자 조작 식품으로 인한 인간 존재의 위협, 생명 복제의 시도로 인한 미래의 두려움 등 지나간 20세기는 깊은 생각 없이 개발된 과학 기술로 인해 죽음의 공포가 깊게 드리워진 세기였다.

21세기는 달라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영성이 필요한 시대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영원히 사는 길로 가게 된다. 필자는 이것이 교회가 가야 하는 시대의 정신이 되어야 하며, 우리 모두를 향해 주시는 거룩한 주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이 시대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로 간다면 수많은 위험이 출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지구촌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미래 대를 바른 길로 이끌 있다고 믿는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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