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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에 나타난 축복(2)

기사승인 2021.03.10  16:5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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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 6:20-26을 중심으로

김경진 교수/ Ph.D, 호주 알파크루시스 대학교 박사원장
 

   
▲ 김경진 교수

2. 본문 연구

오늘 주제 본문은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주지하는 대로, 누가복음의 평지설교(눅 6:20-49)는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마 5:1-7:27)의 병행기사이고, 각 설교의 서론은 각기 누가복음의 사복(四福) 사화(四禍) 설교와 마태복음의 팔복(八福) 설교로 구분된다. 이처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복의 개수가 다른 까닭에 학자들은 이를 지복 설교(至福, Beatitude Sermon)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의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이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지복설교를 서로 비교함으로써 각 복음서에서 말하는 복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드러나는 특징을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해석에 반영하고자 한다.

2.1. 지복설교의 비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지복 설교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하여 학자들은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나, 일반적으로 합의 된 결론은 마태와 누가가 두 복음서의 공동 자료가 되는 주님 말씀 모음집1에서 이 설교를 참고한 후, 나름대로 자신들의 대상과 목적에 따라 달리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눈앞에 놓인 두 복음서의 지복설교가 서로 다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누가복음은 네 개의 복과 네 개의 화를 나란히 병행하여 기록하였다(눅 6:20-26).

가난한 자(20절) ↔ 부요한 자(24절)
주린 자(21절a) ↔ 배부른 자(25절a)
우는 자(21절b) ↔ 웃는 자(25절b)
박해를 받는 자(22절) ↔ 칭찬 받는 자(26절)

누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 개의 화, 즉 저주는 모두 생략하고, 오히려 네 개의 복을 더 추가하여 모두 여덟 개의 복을 소개한다(마 5:3-10)

심령이 가난한 자(3절) / 애통하는 자(4절)
온유한 자(5절)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6절)
긍휼히 여기는 자(7절) / 마음이 청결한 자(8절)
화평하게 하는 자(9절)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10절)

   
 

위의 두 설교를 비교할 때,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 개의 복(福)은 가난한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당하는 자에 대한 복이고(눅 6:20-22), 그에 상응하는 네 개의 화(禍)는 부요한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 받는 자에 대한 저주이다(눅 6:24-26). 마치 네 개의 복과 화가 일대일 대칭을 이루듯이 나란히 소개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마태복음은 화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마태복음은 누가복음의 네 개의 화를 네 개의 또 다른 복으로 대체하여 팔복으로 만들고 있다. 이렇게 해서 추가된 복은, 온유한자(5절), 긍휼히 여기는 자(7절), 마음이 청결한 자(8절), 화평케 하는 자(9절)에 대한 복이다. 그런데 이 추가된 네 개의 복의 목록이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관찰이다:

온유한자 = 시 37: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긍휼히 여기는 자 =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마음이 청결한 자 = 시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화평케 하는 자 = 시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마태가 복음서 저술에 있어 그 주 대상이 되는 유대인 청중을 염두에 둔 까닭에, 새로운 도덕적 품성의 근거를 유대인들의 삶과 행위의 기준이 되는 (구약)성경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의 지복(至福) 설교가 누가복음의 지복 설교와 다른 것은 누가복음의 네 개의 화(禍)를 네 개의 또 다른 복(福)으로 바꾼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유심히 그 네 개의 복을 관찰해 보면, 마태복음에서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 개의 복의 내용도 다르게 바꾸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가난한 자를 심령이 가난한 자로(마 5:3), 주린 자를 () 주리고 목마른 자로 변화를 준 것이다(마 5:6). 그리고 핍박을 받는 것의 이유도 ()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마 5:10). 이런 변화는 누가복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다. 마태복음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변화는 이제 가난과 주림 및 목마름의 의미를 재 정의하도록 유도한다. 즉 마태복음에서 가난, 주림 및 목마름은 더 이상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로 바꾸어진 것이다.2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실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요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역(逆)으로 누가복음에서의 가난의 의미가 문자적이고 실제적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동시에 누가복음이 부요한 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여 기록된 복음서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누가는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되 부유한 자들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난을 퍼붓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하여 누가복음의 신학적 특징 중 하나는 부(富) 혹은 부자들에 대한 비판이 된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이미 마리아의 찬가에서 예시적으로 살펴본 바 있지만(눅 1:51-53), 보다 확실한 내용은 누가복음 전체 기사 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부자들에 대한 비판은 그들에게 맡겨진 재물에 대한 남용(濫用) 혹은 오용(誤用) 의 견지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크게 세 범주로 나누어 설명된다; 재물의 낭비, 재물의 축적, 그리고 재물에 대한 집착. 재물의 낭비와 관련된 기사는 ‘탕자의 비유’(눅 15:11-32),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 등이며, 재물의 축적과 관련된 기사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3-21)이고, 재물에 대한 집착과 관련된 기사는 ‘만찬의 비유’(눅 14:16-24), ‘부자 관원 이야기’(눅 18-27) 등이다. 이들 기사 가운데 탕자의 비유, 불의한 청지기 비유, 부자와 나사로 비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등 네 개의 비유가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기사들이란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만찬의 비유와 부자 관원 이야기 역시 부자들에 대한 비판의 견지에서, 마태복음과 비교할 때 상당히 다른 부분이 포함되어 있음도 함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새로운 자료들을 많이 추가하여 특히 부자들에 대한 비판의 주제를 강조하고자 한 의도를 포착하게 된다. 이는 아마도 우선적으로(primarily) 그 복음서의 대상이 되는 교회공동체 내의 부자들을 향한 경고를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누가는 맡겨진 재물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부자들을 목자의 심정으로 경고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바른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견지에서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들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동시에 부자들을 위한 복음의 특징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여 쓰인 복음서이기는 하지만, 그 주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부요한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열거한 부자들의 그릇된 재물 사용에 대한 비판은 문자 그대로 부자들에 대한 저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회적 차원의 경고성 권면으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그 이유는, 부자들에 대한 비판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신랄하게 표현되어 있는 누가복음에서 부유한 신자들은 복음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가장 확실한 이야기가 바로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삭개오 사건>(눅 19:1-10)이다. 삭개오는 여리고 성의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였고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위 ‘왕따’를 당하는 인물이었지만(눅 19:2), 자신의 부정한 과거를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며 토색한 것을 네 배로 갚겠다는 서원을 통하여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에 의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으며, 구원을 얻게 되었다(눅 19:9). 그 외에도 그 재물로 주님 일행을 손 대접하여 섬긴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다른 여자들(눅 8:1-3), 주님과 사도단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섬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눅 10:38-42; 이상 누가만의 특별 자료)와, 자신의 무덤을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린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눅 23:50-56; 마 27:57-61) 등의 또 다른 부자들을 고려할 때, 비록 누가복음에서 부자들은 신랄하게 비판 받고 있으나, 그것은 지옥에 이르게 하는 저주가 아니라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경고로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만이 아니라 부자들 역시 주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대상에 포함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인을 위한 보편적 복음임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런 까닭에, 흔히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누가복음을 가난한 자들만의 전유물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왜곡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서두에서 가난과 주림에 대한 바른 해석은 그것이 복음서의 고유한 특징과 연결되면서 장차 전개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신학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상의 내용은 지복설교와 관련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를 설명함으로써, 성경 저자의 의도를 파악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살펴본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발견을 근거로 하여, 누가복음 본문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박해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주님은 선언하신 것일까? 어떻게 가난과 굶주림, 슬픔과 박해가 복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저주가 아닐까? 반대로 주님은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 듣는 자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인간적으로 볼 때 이들이야말로 복 받은 자들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의 인간적 가치관에 역행(逆行)하는 천상적이고 영적인 복의 의미를 다시금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영적 가치관의 근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 즉 신앙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르는 자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신앙으로 인해 가난하게 되고, 굶주리게 되며, 울게 되고, 박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나,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슬픔과 가난과 배고픔을 위로하시고, 영원한 복락의 세계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에서 받아 누릴 그 복이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설령 이 땅에서 우리가 부귀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길어봐야 백년을 넘기지 못할 한시적인 것들을 진정한 복으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복이 곧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세속적 가치관에 휘둘려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골 3:2).
 

설교문

1.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사복음서에 나타난 복은 곧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인 것이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대표적인 설교가 바로 지복설교이다. 이 설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모두에 포함되어 있지만, 각 저자는 자신의 상황과 대상에 따라 변화를 주었다. 마태는 부요한 자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부요한 자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부자들에 대한 경고는 저주가 아니라, 그들을 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한 목회적 차원의 권면인 것이다.

지복설교의 첫 번째 메시지는 주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을 선언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그들에게 복이란 뜻이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받아 누릴 복은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구원론적으로 해석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에만 소개되고 있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영원한 고통의 지옥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의 세계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성도는 장차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저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 것이란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날마다 더 가까이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도들에게 약속하시는 바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이기 때문이다.

2.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천상적이요 영적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복이라고 한다면, 그 복은 당연히 지상적이거나 세속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가난하고 굶주려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의 개념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복음서에 나타난 성경적 복의 개념은 그와 반대되는 천상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이 말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취해야 할 정신 및 태도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나그네와 행인처럼 잠시 이 땅에 머물러 살고 있는 우리들이 그리스도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돈과 권력과 향락을 추구하며, 마치 그것을 누리는 것이 복으로 착각하는 것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눅 12:20),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 12:15)

 

주(註)

1. 학자들은 주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참고하였을 공동자료를 Q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고, Robert H. Stein, The Synoptic Problem (Leicester: IVP, 1988), 89-112; Graham Stanton, Gospel Truth (Valley Forge: Trinity, 1995), 63-76.

2. Allen Verhey, The Great Reversal; Ethics and the New Testament , 『신약성경 윤리』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3), 186-187.

김경진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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