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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영성(2)

기사승인 2021.03.12  14: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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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하나님의 거룩함을 능가할 수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정확하게 만나면 자신의 죄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 드러나지 않을 죄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심지어 자신의 의로운 모습까지도 불의로 드러나게 된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환상을 통해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사 6:2에 보면 “불태운다”는 뜻을 가진 ‘스랍’(seraph)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성경에서 이사야 6장에서만 두 번 나오는 흔치 않은 단어이다(2절, 6절). 이 ‘스랍’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스랍’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데서 섬기며 정결케 하는 사역을 담당하는 천사이다. 이사야의 증언을 따르면 그 천사들에게는 날개가 모두 6개가 있었는데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또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무리 거룩한 천사들이라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되 그 천사들은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자기 발을 가린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능가할 피조물은 없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을 직면하게 되면 그 죄가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두 가지 면에서 죄악 된 모습을 발견했다. 우선 그는 망하게 된 자신을 본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이 망하게 될 것도 모르고 망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가 망하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면 그곳을 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것만 알아도 그 사람은 복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났을 때 그는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그 같은 사실을 정확하게 보게 된다.

   
 

또한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이 얼마나 부정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불행은 입술의 더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그 입으로 천박한 언어를 마구 사용하는 데 있다. 특히 정치인들이나 일반 사회에서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고는 대화를 이끌어가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안타깝다. 언젠가 아이들이 쉬지 않고 욕을 하면서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다. 그때 그들이 뱉은 언어는 사실 그들의 언어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부모의 언어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 어린아이들 사회에까지 깊게 파고든 언어의 폭력성을 볼 수 있었다.

심각한 것은 이사야의 고백처럼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전하는 소위 종교 지도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입술이 얼마나 더러운지도 모르고, 그 입으로 찬양을 드리고,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야고보의 지적처럼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함께 내는 것과 같다(약 3:10). 그러기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만나게 되었을 때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라고 하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것도 모르고 남을 가르치려 했던 죄악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였던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사람이다. 남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보고, 지금까지 거짓을 말하고, 원망과 불평을 쉬지 않으며, 남을 해하고 공격하면서 끊임없이 입술로 범죄 했던 자기의 추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인의 비극

아무리 주님을 위해 산다고 종교적으로 노력하지만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여전히 남의 죄만 본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지도자는 자기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를 정확하게 볼 수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나라는 불행하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잘 드렸는지 잘못 드렸는지 알기 원한다면 예배 후에 자신에 대한 영적인 발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물어보면 된다. 예배를 드린 후에도 다른 사람들의 죄만 보이고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면 그 사람은 예배에 실패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 영적으로 침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가 수없이 많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끔 예배를 통해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려는 사람을 본다. 예배를 자기 목적의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기독교인의 예배의 전부라면 타종교의 예배와 차이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영성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앞에서 자신을 정확하게 발견하는 것을 통해 형성이 된다.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부정한 모습을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득 넘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귀하게 보신다. 회개의 눈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넘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형수가 사면되어 형 집행 정지로 풀려 나왔다면 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이 세상 나라의 백성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두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언제나 세 가지 면에서 은혜를 체험한다. 첫째는 악하고 모순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적 시야가 열려지는 은혜이고, 둘째는 그 죄를 뉘우치고 아파하고 회개하는 의지를 갖는 은혜이고, 셋째는 그 모든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소망으로 사는 은혜이다. 영적인 사람은 언제나 삶의 한복판에서 용서를 체험한다. 그는 하나님께 죄로 인한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기도하고 그 결과 참된 화해, 영적인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 이사야의 삶의 현장에서도 이 같은 회복이 이루어졌다.

이사야는 그의 영적인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6-7)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단지 수동적으로 죄를 떠나 거룩함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니라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죄를 도말하시고 거룩함을 창조하시는 분이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있을 때 그는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가지고 그에게로 날아와 입에 대는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정결케 하신 것이다. 정결케 하는 사역의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다. 인간은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이사야의 깊은 곳에 숨어있는 악을 제거하시고 그를 회복시키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인간을 포기하시거나 무관심으로 그를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은 죄를 피하는 소극적인 성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죄를 해결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찾아가서 그들을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가장 놀라운 은혜는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산다

기독교인의 영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듬어지고 말씀을 통해 성숙을 향해 나가게 된다. 영적인 시각이 완전히 회복된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청각도 열리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사야의 과거의 문제를 다루셨다. 죄로 얼룩지고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사야의 저주받은 과거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회복시키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의 미래를 다루신다. 영적으로 회복된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그의 미래를 밝히 보여주는 말씀으로 만나주셨다. 이사야의 미래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이다. 여기서 우리가 매우 주의 깊게 봐야하는 것은 선교는 개인의 열정이나 경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교 대회나 선교 이벤트가 선교 마인드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오직 하나님을 대면할 때 그가 주신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은 선교에 헌신하지 않을 수 없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서 개인의 영적인 즐거움을 얻게 된 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이웃과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나가야 한다. 그는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폐쇄된 영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세상과 이웃을 향한 열린 영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세상을 향한 사명의 부르심으로 진동하고 그가 가는 곳에는 선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린다. 선교는 열린 영성의 소유자가 실천하는 삶의 방식이다. 폐쇄된 공동체나 자기중심적 삶의 소유자는 선교를 전혀 모른다. 선교에 헌신하는 만큼 온 세계는 그를 향해 열려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 자신이 충돌하는 시간에 나의 영성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와서 나의 마음을 때릴 때 우리는 정신을 차린다. 말씀이 처음 내게 찾아와 충돌할 때의 감격을 기억하는가? 이 세상에서 제일 비극적인 사람이 누구인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사 6:9). 청각장애자, 시각장애자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못하고 볼 수 없는 영적인 장애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주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주의 말씀이 내게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기도해야 한다.
 

말씀이 내게 오면 언제나 새 시대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영적인 부흥의 물결이 시대를 이끌었다. 새 시대는 언제나 말씀으로 시작된다. 말씀이 내게 오면 우리는 언제나 새 시대를 경험하게 된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가 중심이 되었던 새 시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너는 이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 여호수아가 새 시대를 시작하면서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이었다(수1:1). 느혜미야 8:8에 보면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할 때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고 하였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도 짓고, 성전도 재건하고, 살집도 지어야 했지만 에스라는 그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말씀의 부흥인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읽고 그의 백성들에게 들려주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머무는 공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현장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향해 새롭게 일어나는 유일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사야가 보여준 삶은 기독교인의 영성의 세 가지 핵심 컨텐츠를 보여준다. 기독교인은 어떤 영성으로 살아야 하는가? 첫째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영성이다. 하나님과 만남이 없이는 기독교인들의 영성은 존재할 수 없다. 매일같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평생 소원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회개의 골짜기를 눈물로 걸어가는 회개의 영성이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의 충돌을 통해 새 시대를 경험하게 된 우리들이 이웃과 세계를 향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힘차게 나가는 선교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저작권자 © 교회와신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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