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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불신법정 소송의 역사(1)

기사승인 2021.03.15  13: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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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철 교수의 한국교회사 논단

신재철 교수/ 인천초원교회 담임, 철학박사, 부산외대 교수
 

   
▲ 신재철 교수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불신법정 송사의 역사를 다루기 전에 성경적 고찰을 먼저 하는 것이 한국교회 소송사를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될 것이다.

1) 구약에서 본 소송문제

구약에서는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 사자들을 세워 자신의 율법을 중심으로 하여 사법과 행정의 일체를 주관하여 통치하셨다. 따라서 불신법정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정 법정뿐이었다. 그러므로 재판의 주도권자는 하나님이셨다.1 이는 모세오경에서 강하게 나타났고 이후 역사서와 시편 그리고 선지서에도 반영되고 있다.

모세오경에서 소송문제에 대한 신학적 사상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재판은 하나님의 것’ 이란 사상은 세상 법정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재판이 인간적인 영역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법정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재판을 받을 수 없다.
 

2) 신약에서 본 소송문제

신약에서의 소송문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바울의 권면에서 그 답을 구할 수가 있다.

(1)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본 소송문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5절에서 소송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여기서 사용하신 ‘사화하다’(εὐνοέω, 유노에오)는 신약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사용된 단어이다.2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12장 58절에서는 ‘화해하다’(ἀπαλλάσσω, 아팔랏소)를 사용하고 있다. 누가복음 12장 59절로 판단해보면, 여기에서 소송문제가 되는 것은 채무문제로 이해된다.3 그러므로 아팔랏소(ἀπαλλάσσω)는 법률적으로 소송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소송을 포기하므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소송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더 낫다(고전 6:7)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팔랏소(ἀπαλλάσσω)는 ‘화해하다’를 의미한다.4 예수님은 소송에 관한 신학적 사상이 기본적으로 ‘화해’(εὐνοέω)임을 교훈하시면서 하나의 표상을 제시해 주고 계신다(마18:15-18). 곧 교회 안에서 믿는 자가 다른 믿는 자에 대해서 실체법상의 과실을 저질렀을 경우, 믿는 자가 따라야 할 4단계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문제 곧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믿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믿는 자는 먼저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마 18:15) 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케”한다(마 18:16).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한다(마 18:17a). 교회가 권면을 했는데도 화해가 성립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사람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라는 것이다.5 곧 실체법상 소송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소송이라는 방법을 취하지 말고 끝까지 권고하고 책선(責善)해서 공동체 안에서 화해가 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이 모든 방법으로 공동체 내에서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세리와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송이라는 방법은 교회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소송에 관해서 기본적으로 유노에오(εὐνοέω) 곧 화해의 입장을 취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용서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납지 않으면 너희 천부께서도 용서치 않으시리라”(마6:15)고 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용서’(ἀφίημι, 아피에미)는 ‘떠나다’(let go), ‘지우다’, ‘삭제하다’(cancel)6 등의 뜻이다. 칠십인역에서 아피에미(ἀφίημι)는 ‘풀어놓다’, ‘면제하다’(releases), ‘포기하다’(surrender)를 나타낸다.7 신약에서는 마가복음 2장 5절에서 아피에미(ἀφίημι)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Τέκνον, ἀφίενταί σου αἱ ἁμαρτίαι)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사함’은 아피엔타이(ἀφίενταί)로 아피에미(ἀφίημι)의 직설법 현재 수동태 3인칭 복수형이다. 여기에서 중풍병자의 ‘죄 사함’은 죄로부터 떠남 혹은 죄의 면제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 사함’ 혹은 ‘용서’라고 해석한다. 결국 마태복음 6장 15절은 형제의 과실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곧 형제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형제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칼빈은 “진실로 우리가 무쇠보다 더 굳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 권고는 우리를 부드럽게 만들고 또한 우리를 형제들의 죄를 용서함에 호응하게 만든 것이다”8라고 하였다. 곧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 그 심령이 무쇠같이 굳어진 심령이라고 한 뜻이다. 그리고 계속 해석하여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무수한 죄악들을 매일 용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죽었어야 할 것을 안다”9고 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죄를 승인받는 유일한 길은 우리들의 형제들이 우리를 거스르고 반대하는 그 어떠한 죄일지라도 우리는 그 형제들은 용서하는 것뿐이다”10라고 하였다.

결국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소송에 대한 신학은 화해와 용서의 문제다. 그리고 이것은 소송이 있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형제들 간의 소송을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2) 사도바울의 권면에서 본 소송문제(고전 6:1-11)
성도 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에 대한 중요한 본문은 고린도전서 6장 1절로 11절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5장과 6장은 연속성을 띠고 있다. 고린도전서 5장 12절에서 ‘판단’ 문제를 거론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성적인 문제를 다루다가 고린도전서 6장 1-11절에서 ‘판단’과 관계된 법정제소 문제를 다룬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권징으로 음행한 자를 공동체에서 내쫓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고전 5:13). 곧 교회의 순전함과 진실함(고전 5:8)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이들은 판단할 수 있다(고전 5:12). 바울은 ‘너희 안에 있는 나누어진 자’에 대하여 판단함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크리노(κρίνω)는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어떤 문제로 인해 소송이 제기되었을 때 판결내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바울은 세상 소송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므로 자신이나 성도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소송은 성도들이 충분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을 근거로 하여 음행하는 자들을 공동체 안에서 제거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판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그 순전함과 진실함(εἰλικρινείας καὶ ἀληθείας)을 유지할 수 있다.

이제 고린도전서 5장의 판단문제는 6장 1-11절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성도 간의 불신법정의 소송문제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5장과 6장은 ‘판단’(5:12, 13)이란 주제 면에서 연결되어 있다.11 바울은 5장과 6장 사이에 그 어떤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5장에서 언급된 크리노(κρίνω)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신학을 6장1-11절에서 제공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법정소송 자체를 언급하고 (1절), 이어서 성도의 판단권의 근거를 밝힌다(2-3절). 그리고 바울은 성도 사이의 분쟁에 대한 소송방법을 제시한다(4-5절). 이어서 공동체의 형제간 소송의 불의성(6-8절)을 지적하고,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했다(9-11절). 바울은 성도들 간의 문제를 일반법정에 제소한 해당 성도들의 문제점과 그것을 방임한 교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기 위해서 수사의문문을 연속적으로 제기했다. 1절, 3절, 4절, 5절, 6절, 9절에 각 1회씩, 2절과 7절에 각 2회씩 총 10회의 수사의문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이 수사의문문에서 바울은 당연히 긍정적인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 1절에서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라는 의문문에서 고린도 교회는 당연히 성도 앞에서 소송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할 것을 전제한 의문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것을 재차 확인하므로 고린도 교회를 권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소송문제가 이미 고린도 교인들도 알고 있는 바이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고, 바울의 권징은 이러한 면에서 타당성을 부각하는 수사의문문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 사이의 분쟁을 불신법정에 소송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비록 바울이 세상법정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사실이 성도들 사이의 분쟁을 불신법정에 소송할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분명하게 바울은 다음의 두 가지 신학적인 근거에 의해서 성도들 사이의 일상적인 일 곧 재산상의 문제로 인한 불신법정소송를 금지하고 있다. 하나는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과 천사를 심판할 고귀한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판단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판단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불신법정에 소송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다른 하나의 신학적 근거는 바로 성도들 사이의 분쟁을 불신법정에 소송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해 짐과 칭의가 주어진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고 완악하게 고집스레 소송을 끝까지 한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랑의 원리를 저버리고 세상의 법정을 선택함으로써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영적 패배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불신법정에 소송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일상적인 일 곧 재산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여 재산적인 피해를 받는 것이 소송을 통하여 재산적인 이득을 보는 것보다 올바른 길임을 권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불신법정에 소송하여 이득을 보는 것이 바로 불의하고 속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순전함과 진실함을 금전적인 이득보다 더 중요시해야 하며, 그 한 가지 예가 바로 성도들의 사이의 문제를 불신법정에 소송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불공정한 일들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선택해야 할 바른길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불신 법정의 판단을 통하여 이득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이득을 버리고 순전함을 선택해야 한다. 곧 불신법정에 소송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성경 교훈이다.
 

주(註)

1. 송상석,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마산:경남법통노회, 1976), 23.
2. Donald A. Hagner, Matthew 1-13, Word Biblical Commentary (WBC; Waco, Texas: Word Books, 1993), 117.
3. John Nolland, Luke 9:21-18:34, Word Biblical Commentary (WBC; Waco, Texas: Word Books, 1993), 714.
4. John Nolland, Luke 9:21-18:34, 714.
5. 송상석,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31.
6. William F. Arndt and F. Wilbur Gingrich,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The Univ. of Chicago Press, 1979), 125-26.
7. Gerhard Kittel, ed.,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Michigan: Wm. B. Eerdmans Pub. Co., 1967), 510.
8. Calvin's Commentaries Matthew, translated by A.W. Morrison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Pub. Co., 1965.), 214.
9. Calvin's Commentaries Matthew, 214.
10. Calvin's Commentaries Matthew, 214.
11. Archibald Robertson and Alfred Plumm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of St. Paul to the Corinthians (Edinburgh: T.&T.Clark, 1975), 109.


 

신재철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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