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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영성(1)

기사승인 2021.03.19  1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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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역사적인 사실 위에 있는 신앙

기독교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가끔 기독교가 반드시 역사적인 종교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거나 역사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문제가 안 된다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실제로 역사의 한복판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나지 않았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으면 다 되는 것이지 무슨 문제가 있는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순수한 신앙인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역사성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인하는 위험성에 노출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역사적인 종교라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인들은 있지도 않는 사건을 있다고 추측하거나 가정하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실제로 있었고 일어났기에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추측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신앙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의 부활을 믿는 것이지 “아마 부활하셨을 거야” 추측하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에 끌려가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그 당시 바울이 끌려가던 상황에 대해 매우 세부적인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을 인솔했던 책임자가 로마 군대 아구스도대(Augustus' basnd)에 속해있는 백부장 율리오(Julius)라는 사람이라는 것과 바울이 혼자가 아니라 다른 죄수 몇 사람과 함께 후송되고 있었다는 것이다(1절). 또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기 위해 처음 타게 되었던 배는 <아드라뭇데노>(Adramyttium)라는 지역에 속한 배였고, 가는 도중 데살로니가 출신 아리스다고(Aristarchus)라는 사람을 태우게 된 것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2절). 그 후 바울의 일행은 로마로 직행한 것이 아니라 시돈(Sidon)항에 들렀다가(3절), 구브로(Cyprus) 해안을 끼고 항해를 계속하였으며, 길리기아(Cilicia)와 밤빌리아(Pamphylia) 바다를 건너 루기아(Lycia)의 무라(Myra)에 도착했다고 하였다고 기록한다(4절, 5절).

   
 

바울의 일행은 무라(Myra)에서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타고 왔던 배가 로마로 가는 배가 아니었기에 수행 책임자인 백부장의 지시로 알렉산드리아라(Alexandria)는 배를 바꾸어 타게 되었다(6절). 지금까지 항해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배를 갈아 탄 이후 항해 조건이 급격히 나빠지게 되면서 배는 잘 나가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항해를 계속하여 살모네(Salmone)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끼고 마침내 미항(Safe Harbor)에 도착했다는 것이다(7, 8절). 심지어 사도행전을 기록했던 누가는 그 배를 탔던 사람이 모두 276명이었다는 숫자까지 정확하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37절).
 

성경은 기록자의 상상이 아니다

사도행전 27장을 읽으며 필자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도대체 항해 일지처럼 보이는 이러한 상세한 내용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과 신앙이 성장하는데 무슨 도움이 된다고 이렇게 자세히 기록되었는가?” “이렇게 복잡하고 헷갈리는 내용이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데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성경의 지면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이런 내용은 생략하고 보다 더 중요한 것만 기록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깊이 묵상을 해보니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성경의 모든 기록들이 사람의 상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 정확성을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간 것도, 그가 탔던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어려움을 당한 것도, 모두 기록자의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며, 기독교인의 신앙은 그 역사적 사실 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일행이 루기아(Lycia)의 무라성(Myra)에서 로마로 가는 배를 바꾸어 탄 이후 항해가 매우 어려워졌음을 이미 지적했다. 그 배에 승선했던 바울은 아무리 죄수로 끌려가는 사람이라도 항해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을 보면서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바울은 승선했던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행 27:10). 즉 이번 항해는 중단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는 뜻을 제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무슨 근거로 그런 제안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 항해 도중에 일어날 일을 직접 보여주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이 일에 대해 특별한 음성을 들었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바울이 이런 제안을 할 때에는 “그가 뭔가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이나 특별한 음성을 들었을 것이라”고 쉽게 단정을 내릴 수 있다.
 

상식에 근거한 영성

그러너 사도 바울이 그들의 항해가 위험할 것이라 말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무슨 특별한 환상이나 계시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사도행전 27:9에 보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거기 보면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금식하는 절기가 선박의 항해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묻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이러한 언급을 하게 된 것은 ‘혹시 배에 탄 사람 중에 금식하는 절기에 금식하지 않고 배를 항해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닌지’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식하는 것’과 ‘선박을 항해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런 언급은 무슨 뜻인가? ‘금식’ 그 자체는 항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금식하는 절기’와 ‘항해’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 ‘금식하는 절기’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의 ‘속죄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10월 초순에 해당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조심성 있는 로마인들은 이 절기가 지나면 일반적으로 지중해 항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0월에서 그 다음 해 3월까지는 항해하기에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뱃사람의 상식이었다. 결국 바울의 주장은 어떤 특별한 계시라기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일반 상식에 기초하여 제안한 것이었다. 우리가 기독교 ‘영성’을 말할 때 종종 어떤 신비로운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사건을 언급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상식적인 판단에 근거한 제안에 대해 그 배의 인솔자였던 백부장은 어떻게 했는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고 하였다(행 27:11). 선장과 선주의 주장은 무엇이었는가? “미항이라는 곳은 겨울을 나기에 어려우니 뵈닉스(Phoenix)로 가서 겨울을 나자는 것이다”(행27:12). 즉 조금 더 항해하면 겨울을 나기가 유리한 곳이 있으니 항해를 계속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앞으로 겨울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가 아니라, 현재 이 배가 항해를 안전하게 계속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여기서 ‘상식적인 판단’이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하는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자신의 어떤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일반적인 상식에 근거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항해의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상식적인 판단을 버리고 항해를 계속할 것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전문가의 비상적인 판단 때문에 사회적인 위기나 대형사고를 만나게 될 때가 많음을 본다. 전문가의 전문성이 때로는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상식이 제공하는 일반성을 지켜주지 못할 때가 많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의 붕괴, 지하철 공사장 붕괴, 고속 전철 부실공사, 세월호 사건 등. 이 모든 대형사고의 특징이 무엇인가? 이러한 대형사고 뒤에는 전문가의 전문성을 내세운 비상식적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때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믿는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상식적인 판단을 무시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긴급히 수혈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하지만 그가 수혈을 받을 수 있도록 헌혈도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독교인의 영성이다. 또한 그가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할 때는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아야 한다. 교회를 건축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무리하게 공사 기간을 단축해서는 안 된다. 사업을 하는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위해 쓰겠다는 명목으로 무리한 방식으로 혹은 편법으로 사업을 확장시키면 안 된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신앙이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때로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판단이 필요한 곳에 상식을 무시하고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큰 위기를 만나는 것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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