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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영성(2)

기사승인 2021.03.25  14: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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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인생은 그렇게 모순일 때가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기 위해 호송되었던 배에도 가장 큰 문제는 선장과 선주가 자신들의 전문성을 내세우며 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상식을 무시해 버리는 데 있었다. 처음에는 선장과 선주가 제안했던 비상식적 결정이 효과를 보았다. 바울의 일행이 승선했던 배는 남풍이 순하게 불어 어려움 없이 잘 가고 “우리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하면서 모두가 기뻐하였다. 바울의 제안은 휴지통에 넣어버리고 그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역시 항해는 항해 전문가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거야” 하면서 상식을 무시한 채 항해를 강행하는 그들을 칭찬했을지도 모른다. 성경은 그 때의 상황을 기록하면서 “저희가 득의한 줄 알았다”(행 27:13)고 표현한다. “득의했다”는 말은 “뜻하고 바라는 대로 문제없이 잘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이처럼 상식을 무시하고도 잘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잘되는 것도 잠시뿐, 얼마 못되어 그 배가 그레데 해변을 근접하여 항해할 때 갑자기 섬에서 ‘유라굴로’(Εὐροκλύδων) 광풍이 불어 배가 밀리고 풍랑으로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행 27:14). ‘유라굴로’는 ‘동풍’을 뜻하는 ‘유로스’(εὖρος)라는 헬라어와 '폭풍'을 뜻하는 ‘클루돈’(κλύδων)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동쪽에서 부는 폭풍’이라는 뜻으로 그 바람이 휩쓸고 간 지역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만큼 사납고 강한 태풍이다. 당시 이 태풍을 만나서 살아남은 배는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교훈을 준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에도 문제가 터질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잠시 순풍이 분다고 그 위험한 방식의 삶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몇 사람의 상식을 무시한 결정으로 자신들만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무수한 사람에게 아픔과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직하게 상식대로 사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짓밟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잘 되는 것은 절대 축복이 아니다. 단지 재앙일 뿐이다. 한국의 10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하여 통계를 내보니 “80%가 정직하게 살면 성공할 수 없다”고 적어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반칙하는 사람이 앞서가고 또 성공하게 된다고 믿게 되었다. 어린 학생들도 그렇게 믿고 인생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 금융사기에 연루된 벤쳐 기업가인 정현준, 진승현이 다 그렇게 믿던 사람들이었다. 아직 20대, 30대에 불과한 젊은이들의 머리에서 어떻게 그런 사기적인 발상이 나왔을까 욕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나도 한번 그렇게 해봤으면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옵티머스 투자사기 사건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들 때문에 시장에서 어렵게 모아 저축했던 돈, 거리에서 풀빵 팔며 모은 돈, 날품을 팔아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며 저축한 돈이 단지 몇 사람의 호주머니로, 정치인들의 자금으로, 호화판 술집이나 유흥업소로, 호화판 호텔 투숙비로 날라가고, 피해를 본 서민들은 땅을 치고 울부짖고 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의 아픔은 그 배가 분명히 광풍을 만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죄수의 몸으로 묶여있는 그에게 다른 권한이나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강제로 배에 실렸고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곧 예상되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인생이 그렇게 모순일 때가 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을 뻔히 알지만 힘이 없고 결정권이 없기 때문에 갈 때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이윽고 바울이 탔던 배는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되었고 선상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살아보겠다고 사공들이 배의 모든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심지어 항해에 필요한 장비인 배의 기구까지 던져야 했다(행27:18, 19).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상황은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고 할 정도였다. 이제 배에 탄 276명의 모든 생명이 죽음을 직면하게 된 것이다.

어떤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그러나 바울이 여기 바다 한복판에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전에 바울에게 주신 약속은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기 전 주님께서는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23:11)고 약속을 주신 적이 있다. 이 약속은 결국 부도 수표로 끝나고, 바울은 로마에 가 보지도 못한 채 망망한 바다에서 물거품으로 사라져야 하는가? 지금 뱃전을 때리는 광풍 속에서, 그 칠흙 같은 어두운 밤에 바울은 얼마나 고민했겠는가? 지금 이 상황은 어떤 면에서 바울이 죽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바울에게 약속하셨던 주님의 신실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즉, 주님은 약속만 하시고 결국 지키지 않는 분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민수기 23장에 보면 발람의 노래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여기 말씀 그대로 바울이 광풍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그 날 밤, 약속의 하나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셨다. 그리하여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그 밤, 구원의 여망이 다 사라진 그 밤에 홀로 일하기 시작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고 위대한 분이지만 그와 했던 약속을 정확하게 기억하시고 지구 한 모퉁이 구석 언저리 망망한 바다에서 고통을 당하는 바울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세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상식이 무너지고 인간의 힘으로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곳에 찾아오셔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행동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로 주셨다.”(행 27:24) 이 말씀의 내용은 이중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첫째는 이미 바울에게 주셨던 약속을 재확인시켜 바울의 미래의 사역을 보여주시고 바울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것과 둘째는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 그와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로마가 아니더라도 현재 배 위에서도 먼저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그들 모두와 함께 같이 살아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처럼 위기의 정점에서 오히려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여전히 광풍이 쉬지 않고 불어 닥치고, 해와 달은 계속 보이지 않고, 모두가 죽음을 예상하는 순간에 주신 말씀이다. 즉 아무도 상태가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절망을 뚫고 주신 말씀이다. 그런 상황에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은 거기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 말씀을 맡은 자의 현재적 사명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섬긴다. 그 깊은 절망 속에서 그가 들었던 소망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한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신앙이 무엇인가? 무엇을 믿는 것인가? 한 마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은 결코 보이는 상황에 의존하는 신앙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무슨 나아지는 징조가 보이기 때문에, 상황이 서서히 달라지는 것이 감지되기에 때문에 “아, 이제는 믿어도 되겠구나”하면서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기에는 너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심지어 현재 아무런 변화의 조짐이 없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고,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약속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이 신앙이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나는 지금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습니다” 하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다. 신앙인은 아직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이미 태양을 보는 사람이며,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어도,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 한 가지 때문에, 그 말씀의 권위를 받아드리고 하나님이 끝내 이루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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