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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극복하기 “상처받지 않겠습니다”

기사승인 2021.03.29  15:5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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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자 세상읽기 26/ 김찬호 <모멸감>

<교회와신앙> 장운철 기자】   부끄러움, 수치, 모욕 그리고 모멸 등 어두운 모습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요즘 언론 등을 통해 드러난 우리네 사회의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았다.
 

모멸감 세상

어린이집 폭행 사건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인천의 한 어린이집에서 교사가 어린이 따귀를 때려 그가 뒤로 내동댕이쳐지는 장면이 CCTV에 그대로 남겨졌고, 한 뉴스를 통해 폭로되었다. 마치 영화의 폭력 장면과도 같아 보였다. 이후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어린이집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쌓여왔던 일이다. 어려서 받은 상처는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두려움, 눈치, 우울증 등을 일으키기 쉽다.

폭행은 성장해서도 마찬가지다. 필자의 기억 파일에 한 사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초등학교 4-5학년 때 일이다. 담임 선생님이 육성회비(수업료 일종)를 내지 않은 학생 나오라고 했다. 필자를 비롯해 3-4명이 앞으로 나갔다. 두려운 순간이다. 같은 반 70여명의 친구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는 자리다. 이를 굳게 다문 선생님이 짧게 말했다.

‘안경 벗어’
‘입 물어’

‘퍽’, ‘퍽’, ‘퍽’...

하나, 둘... 너나 할 것 없이 맞은 아이들은 뒤로 나가 떨어졌다. 폭행, 구타로 내동댕이 처진 일이다. 교실 안은 적막이 흘렀다.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핑~’ 돌았다. 슬픈 것도 아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창피, 부끄러움, 화남, 억울함... 여러 감정이 내면에서 회오리쳤다. 그 선생님 이름이 지금도 또렷하다. 잊을 수가 없다. 성은 ‘윤’씨다. 그날 이후 그 성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 김찬호 <모멸감>

소위 ‘땅콩 회항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대한항공 부사장(회장의 딸)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기내에서 직원을 향해 ‘무릎 꿇어~’라고 호통을 치며 출발하던 비행기를 다시 돌아가게 한 일이 발생했다. 그 직원은 부사장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 당시 온 국민이 분노했다. 마치 자신이, 또는 자신의 자녀가 그렇게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화가 났다.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기에, 아니 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무릎을 꿇도록 한 일이 가당한 일일까. 당시 무릎 꿇은 그 직원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수치, 모욕, 모멸...

모 정신병원에서 한 환자가 17시간 동안 침대에 손발이 묶인 채 감금 사망한 사건도 발생했다. 그러자 정신병원에서의 비인격적 실태를 고발하는 CCTV 화면이 연달아 공개됐다. 손으로, 발로 환자를 때리는 등의 장면들이다. 비록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그 병원에 입원했지만, 그들도 인격체가 아닌가. 그 화면을 본 가족들은 얼마나 속상해할까.

여군을 향한 언어 폭력 사건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여군의 수는 1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다. 상당 수는 기혼자다. 휴가를 갔다 온 이에게 상관은 “어젯 밤에 신랑이랑 뭐했어”, 등의 언어 폭력이 수위를 넘었다는 보도다. ‘이대위’라고 부를 것을 ‘미쓰리’라고 부르는 등은 애교에 불과할 정도다. 지위를 이용한 부적절한 언어와 행동들로 인해 여군들이 분을 삼키고 있다. 자신의 아내, 여동생이 그런 취급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들은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모욕, 모멸감을 일으키는 말들 몇 가지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너만 없으면, 우리 단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아”
“그것도 못해, 너 대학이나 나왔어!”
“애들아 너희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 사람처럼 되는 거야, 알았지”

한 시작장애인 여인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옆에 있던 한 할머니가 안쓰럽다고 여긴다며 한 마디를 내 뱉었다.

“아이고, 지두 여자라고 화장을 했네... 참 안 되었군.”

코피노 문제를 취재중인 한 신문기자가 필리핀 현지에서 아이의 엄마를 만났다. 코피노는 필리핀으로 유학, 사업 차 간 한국사람과 필리핀 여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 남자는 대체로 도망가 듯 한국으로 귀국해 버렸다. 이후 코피노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한 코피노 엄마는 한국 남자가 주소를 적어주고 갔다며 그 쪽지를 보여 신문기자에게 보여주었다. 그 기자는 그 종이를 본 후 얼굴이 붉어지고 손이 떨렸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주소가 적혀있다는 그 종이에는 각종 육두문자들이 가득 적혀있던 것이다. 그 내용을 알게되면 그 엄마는 얼마나 치욕스러울까.

조금 전 여군의 예를 하난 든 바 있다. ‘군’이라는 사회에서 겪은 모욕, 모멸감 사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물론 예전엔 말이다. 하급자를 실컷 폭행하던 상급자가 이런 말을 내뱉는다.

“아! 힘들어. 야! 너 김 이병 일어나. 노래 하나 해 봐. 나 좀 쉬어야겠다”

그러면 폭행당했던 김 이병은 일어나 노래를 해야 했다. 그것도 흥겨운 노래로 말이다. 덩실덩실 춤까지 추며 노래하는 김 이병의 모습은 즐거워 보이는데 그의 마음 속에서는 눈물이 난다.

가장 모욕, 모멸스러운 일은 아마도 ‘변 가리기’일 듯싶다. 원치 않는 사고로 나의 대소변을 누군가가 받아주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을 것 같다. 어려서 이불에 지도를 그리면 어머니는 키를 아이 머리에 씌우고 이웃집에서 소금을 받아오라고 했다. 필자도 해보았다. 정말 창피했다. 심지어 어떤 집은 아이 옷을 벗긴 채 소금 받아오라고도 했다. 보기도 민망한 일이다. 필자도 그 일까지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정말 꿈에서도 다시 당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다.

‘모욕’과 ‘모멸’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형 언행을 뜻한다. 그래서 모욕감이 들면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모멸은 은근히 당하는 모욕이다. 들춰내고 싶지 않다. 복수, 아니 그 일 자체를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은 굴욕감이다. 그런 점에서 더 심각한 감정이다.

‘모욕 스터디’라는 게 있다. 모욕을 공부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 취업 준비생들이 모여 회사 면접 때 들을 수 있는 모욕적인 질문에 감정 흔들림 없이 잘 대처하기 위한 준비 모임이라고 한다. “그렇게 살 쪄서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공부 엄청 못 했나봐요”, “이 나이 되도록 뭐했어요”, “외모 때문에 고생 좀 하겠어요” 모욕 스터디를 해야한다는 현실이 정말 모욕적이다.
 

원인과 대처

어찌하여 우리네 세상이 모욕, 모멸감이 넘치게 되었는가. 여러 이유 중 ‘자본주의’가 크게 자리 잡는다. 자본주의란 돈이 돈을 버는 사회다. 돈이면 최고가 되는 현실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돈만 벌면, 성공한 것이 된다.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 인격도 덩달아 높아진다. 돈이 ‘신’처럼 군림하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다. 우리는 그 한복판에 살고 있다. 재산의 정도 차이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다 보니 모욕, 모멸 등의 어두운 감정이 점점 커진다.

이런 모멸감이 가득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그 대처 방법을 무엇일까?
<모멸감>(김찬호, 문학과지성사, 2014)이라는 책이 있다. ‘모멸’의 여러 사회 현상에 대해서 잘 분석, 비평해 놓았다. 그러나 이런 사회과학 책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약하다. 너무도 빈약하다.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 ‘행복감을 높여야 한다’, ‘비교의식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는 등이 전부다. 그 분량도 많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자존감을 높이라는 말인가? 돈을 많이 벌라는 말인가? 물론 재산이 어느 정도 있으면 자존감도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두려움이 적어진다. 사회를 향해 당당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돈도 어느 정도 있고, 자존감도 세울 수 있는 ‘정도’ 말이다. 그런데 ‘돈’이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돈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든다. 이제 나보다 없는 이들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도록 나를 끌고 다닌다. 동시에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이로부터 다시 모욕, 모멸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게 바로 ‘돈’의 속살이지 않은가.
 

모멸감 세상,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 답을 성경에서 찾아보자. 모욕, 모멸이 가득한 사회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 말이다. 빌립보서 2:1-4까지 읽어보자. 전체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조금은 긴 본문이다. 이중 핵심 단어는 무엇일까?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4절)가 전체 문장의 본동사이자 중심 용어라 할 수 있다. 무엇으로 기쁨을 충만하게 할 수 있을까? 바로 ‘겸손으로 화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빌2:1-4절의 긴 문장을 짧게 축약시키면 ‘겸손으로 화합하여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로 요약할 수 있다. ‘겸손’과 ‘화합’을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먼저 화합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3절)라는 구절이 바로 화합에 가장 큰 걸림돌일 것이다. ‘내가 최고’, ‘내가 먼저’라는 이기적인 생각과 헛된 욕망의 마음이다. 필자는 교회에서 작은 실험(?)을 해 보았다. 점심 식사 때 맛있는 반찬에 손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마지막 사람에게 그 맛있는 반찬이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 다음 주, ‘마지막 사람이 식사가 행복해지도록 하자’는 광고를 했다. 교인들의 행동은 달라졌다. 이후 마지막 성도 역시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이미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든지 화합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화합을 방해한다.

‘겸손’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것 말고, 빌립보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의미를 찾아보자. 바로 겸손 다음에 나오는 문장,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3절)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정말 어려운 내용이다. 그나마 겸손의 대상인 ‘남’이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그 ‘남’은 그들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일반적인 ‘남’이다. 바로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까지도 우리의 겸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모욕, 모멸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자세를 빌립보서 2장은 ‘겸손함으로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휴~’ 마음이 무거워진다.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행동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다.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님이다. 오늘의 본문 다음 구절(빌2:5-11)에서 예수님의 겸손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한 번 천천히 읽어보자. 예수님의 겸손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8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늘의 보좌를 버려두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님이 오셨다. 그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성육신을 오늘 주제어인 모멸과 연관시켜 본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육신은 가장 굴욕이며, 가장 모욕이며, 가장 모멸적인 사건인 셈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직전 당한 사건 하나를 언급해 보자.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행한 짓이다. 갈대 몇 가지를 뽑은 군병들이 그것으로 예수님의 머리를 ‘툭~ 툭~’ 친다. 그러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며’, ‘왕 노릇해봐’, ‘어서 왕 노릇해봐’라는 말을 내뱉는다. 침을 뱉고 옷도 벗긴다. ‘껄껄’거리며 웃는다. 십자가 형을 위해 예수님을 끌고간다(마27:27-31).

예수님은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군병들을 심판할 수 있다. 그만한 힘과 지혜가 있는 분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소명,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대신 받아야 할 가장 수치스러운 모욕, 모멸 등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당하신 모욕, 모멸은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또는 당할 수 있는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모욕과 모멸은 믿음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다.
 

 “회개합니다”

이제 두 가지를 적용해 보자. 모욕, 모멸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접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장 큰 모욕, 모멸을 대신 감당해 주셨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적용을 해 볼 수 있다.

먼저, ‘회개’다. 그동안 알게모르게 내가 상처 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을 향해 “상처를 주어서 죄송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멀리 헤어진 이들에게까지 말이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 감정 다스리지 못함, 욕심의 버릇과 습관 더욱이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많은 상처들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

현행법에 ‘모욕죄’라는 게 있다. 사람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말, 표현을 공연히 표출했을 경우 적용되는 죄목이다. 상대에게 모욕, 모멸감을 준 말을 했다면 현행법에도 걸린다는 말이다. 성경에도 ‘모욕죄’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마태복음 5:22절을 보면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란 말이 나온다. 형제를 향해 화를 내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고,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된다고 한다. ‘라가’는 ‘나쁜 놈’, ‘멍청이’ 등에 해당되는 거친 말에 해당된다. 더욱이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공격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고까지 경고한다. 모욕죄에 해당하는 성경의 심판은 정말 놀랍도록 구체적이며 엄격하다.

좀더 깊숙하게 언급하는 구절도 있다. 이웃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배 드리기 전에 먼저 가서 화해하고 오라고 권면하기도 한다(마5:23-24). 화해하지 않은 마음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겠는가 하는 지적이다. 더욱 뜨끔한 말씀도 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 마음으로, 생각으로라도 죄를 짓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얼마 전, 군 입대한 조카 논산훈련소 퇴소식에 그 가족들이 면회 차 다녀왔다. 필자는 참석 못했다. 면회 관련 대화 중, 조카가 지급된 군용 장갑을 잃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필자가 ‘영창 갈 뻔 했구먼’이라고 훈수를 두었다. 이 말에 그 여동생 조카가 ‘이모부 너무 심한 말씀 아니예요’라며 불편해 했다. 순간 필자도 당황스러웠다. 우리에게는 친숙한 용어인 ‘영창’이 지금의 청년에게는 좀더 ‘두려움’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알게모르게 우리는 이웃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회개를 쉴 수 없다.
 

“상처받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적용해야 할 내용은 ‘담대함’이다. “상처받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렇게 선언할 수 있다.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신 모욕, 모멸 그리고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의 신분이 ‘하늘의 시민권자’, ‘부활에 참여하는 자’로 바뀌었다(빌3:20-21). 우리의 호적등본이 영원한 하늘나라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 ‘영원’이라는 시간 중에 이 세상에 아주 잠시 동안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영원’을 생각할 줄 알면, 이 땅에서 받는 잠시 동안의 이런저런 일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영원’뿐만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자’, ‘부활’ 등도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준다. ‘그렇게 생각하자’는 심리학의 결론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가 진정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비록 모욕, 모멸 세상 한 복판에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은 이 땅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 있다.

“나는 창주조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욕, 모멸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어야 할 일이 발생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상처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다. 담대하게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도 이 기회에 ‘모욕스터디’라는 것 한 번 해보자. 모욕, 모멸 사회 속에서 담대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연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삶의 약점이 있다. 학력, 가난, 부모, 신체, 결혼, 자녀 등의 문제에서 우리의 약점을 찌르는 말이 들려온다고 생각해보자. 그러한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쳐보자. 큰 소리도 말이다. 자 시작해 본다.

“야! 너 못생긴 너 말야, 이리 와 봐”
“너, 내가 누군지 알어, 무릎 꿇어”
“아직도 결혼을 못 했니..”
“너 같은 사람이 어떻게 직장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니..”
“일을 그렇게 못해, 대학이나 나왔니..”

장운철 기자 kofking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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