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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손 대대로 복을 받는 기도(4)

기사승인 2021.03.30  1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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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훈 교수의 기도 본문 해설(23)

김정훈 교수 / 영국 글라스고(Glasgow) 대학교 신약학 박사, 백석대학교 신약학 은퇴 교수, B and C Mission Center 현대표
 

   
김정훈 교수

다윗의 기도

이후에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다가 미치광이 연기를 하며 그곳을 겨우 빠져나왔고, 그 후에 아둘람 굴로 피신하였다. 이때 자기 형제들과 부모와 온 가족들이 그곳으로 찾아 왔고, 모든 환난 당한 자와 모든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여들었는데 그들의 수가 400명쯤 되었다. 다윗은 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삼상 21:12-22:2). 다윗은 모압 미스베로 모압 왕에게 가서 부모를 부탁하고, 자신과 자신의 동행자들은 유다 땅 헤렛 수풀로 들어갔다. 사울은 다윗이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유다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신하들과 함께 서 있었다(삼상 22:6).

이때 신하들 중에 도엑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도엑은 사울에게 다윗이 놉 땅에서 아히멜렉을 만난 일과 아히멜렉이 그와 그의 부하들에게 음식을 준 일과 심지어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을 준 일까지 낱낱이 보고하였다. 사울이 도엑의 말을 듣고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소환하였다(삼상 22:11). 사울은 아히멜렉에게 다윗과 공모하여 자기를 치게 하려 한 것이었느냐고 심문하며 책임추궁하였다. 이에 아히멜렉은 담대하게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삼상 22:14)라고 호소하면서 자기가 다윗을 위해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것이 결단코 처음이 아니니 자기와 자기 집안 모든 사람들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좌우의 호위병에게 다윗과 합세하고 자기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아히멜렉과 놉의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사울의 서슬푸른 명령을 듣고 있던 신하들은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사울은 에돔 사람 도엑에게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고, 도엑은 “세마포 에봇” 입은 제사장들 85명을 몰살시켰다(삼상 22:18). 사무엘상 기록자가 새삼스럽게 제사장의 복장 주요 품목 중 하나인 “에봇”을 언급하는 것은 사울 왕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무시하는 자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에봇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판정해 주는 우림과 둠밈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장 나라의 구현을 위해 수립된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의 초대 왕의 영예를 안은 최고 통치자 사울은 초심을 잃고 기고만장하여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사악한 행위를 일삼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의 모든 범법행위는 “하나님의 뜻 거역” 또는 “하나님의 말씀 무시”로 요약될 수 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하는 동안 그를 가장 괴롭힌 외부 세력은 블레셋이다. 그가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생존하는 동안 마지막 전투를 벌인 대상도 블레셋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침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의 목전에서 도망하다가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었다(삼상 31:1).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맹추격하여 이들을 다 죽였다.

사울이 블레셋 군사들과 접전하다가 활 쏘는 적병의 화살에 맞고 중상을 입었다. 사울이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곁에 있는 우군 병사에게 칼을 빼어 자기를 찔러 달라고 하였다. 사울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자기에게 달려들어 자기를 찌르고 모욕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우군 병사는 심히 두려워서 사울의 말을 차마 결행할 수가 없었다. 이에 사울은 자기의 칼을 뽑아 수직으로 세우고 그 위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삼상 31:4).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우군 병사는 자신의 몸을 날려 사울과 함께 죽었다. 그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우군 병사와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죽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랐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영원한 왕국의 초석을 놓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영원히 빛날 것이었다(참조. 삼상 13:13).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참조. 삼상 12:15). 이것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그의 실패였다. 이는 제사장 나라 설립의 실패가 아니라 더 견고한 기초를 놓기 위한 역설적 과정이었다.

사울의 실패는 제사장 나라 건설의 중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울이 등극한 후에 일찍부터 당신을 거역하는 모습을 보며 사무엘을 통해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세울 계획을 갖고 계셨다(삼상 13:13-14; 16:12-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기 위해 당신의 계획을 입체적으로 추진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어떤 과정을 거쳐 통일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그리고 장차 도래할 영원한 메시야 왕국을 표상하는 신정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지 그의 삶의 노정을 살필 필요가 있다. 다윗에게는 주목할 만한 중요한 특징들이 보인다.
 

(1) 다윗은 어린 나이에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고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내정되었고, 그 이후에 “여호와의 영”으로 크게 감동된 된 자가 되어(삼상 13:12-13) 평생토록 그 영성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으름장에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여호와의 이름 곧...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맹스럽게 나아가 물매 돌을 날려 보기 좋게 쓰러뜨렸다. 우리는 소년 다윗에게서 놀라운 영성을 본다. 또 다윗은 사울의 통치 말기에 사울의 추격을 피해 블레셋 땅 가드로 망명한 일이 있다(삼상 27:1-2; 29:3). 당시 가드 왕은 아기스였다. 아기스는 다윗을 유심히 관찰하였는데, 아기스가 블레셋 방백들에게 다윗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삼상 29:3)라고 하였다. 아기스는 또 다윗을 불러 대면하여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삼상 29:6)라고 하였으며,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안다]”(삼상 29:9)고도 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의 오랜 숙적 블레셋 왕이 보기에도 다윗은 허물이 없고, 정직하고, 선량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무장한 전사 같은 인물이었다는 증거다.
 

(2) 다윗은 골리앗과 대적하여 승리한 후에 급상승한 인기에 편승하여 부화뇌동하거나 교만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다윗은 신체도 다 자라지 않은 소년으로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공로로 “군대의 장”으로 임명받고(삼상 18:5), 왕과 백성들에 의해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 때, 그는 내심 우쭐했을 것이다. 더구나 여인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북 치고, 꽹과리 치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환호성을 지르며 자기를 칭송할 때(삼상 18:6-7), 자기가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 된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윗에게서 흥분한 모습이나 오만한 태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매우 냉철하고 침착하고 자기통제력을 잘 갖춘 청년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미 기름 부음을 받고 차기 왕으로 내정된 자로서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3) 다윗은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을 보며 악령이 얼마나 인간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하고, 얼마나 인간을 철저히 파멸로 이끄는지를 목도하였다. 악령은 사울의 마음에 일고 있는 질투심을 이용하여 세상 권력과 권세에 집착하게 하였고, 살인 의지를 유발시켜 사악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사울은, 다윗은 만만 사울은 천천이라는 노래 소리에 화가 치밀어 다윗이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고 자문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는 것만이 자기가 살 길이라고 오판하였다. 사울이 이와 같이 악독한 마음을 품게 되었을 때 그는 그를 살해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기회가 오면 행동에 옮기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사울은 악령에 의해 강하게 사로잡힌 어느 날 자기를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을 향해 손에 든 창을 던져 그를 벽에 박고자 하였다. 정상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행동이었다(삼상 18:10-11).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져 벽에 꽂아 죽이려고 시도한 일은 한 번 더 있었다(삼상 19:9-10).

이와 같이 표독한 행동이 반복되다 보니 사울은 자기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변호하며 자신을 저지하려 하자 격분하여 단창을 던져 그를 죽이려 하였다(삼상 20:33). 다윗은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울의 섬뜩한 행동을 보며 오히려 더욱 강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익혀 나갔다. 또한 사울은 일종의 정략결혼(딸을 주어 사위로 삼음)을 이용하여 다윗이 부득이 하게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도록 하는 음모를 꾸몄다(삼상 18:17-29). 다윗은 두 번이나 시도해 오는 사울의 음모를 간파하고 악령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또한 사울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기진맥진한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음식(진설병)을 주어 먹게 하고,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을 주었다는 이유로 에돔 출신 신하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그의 가문에 속한 제사장 85명을 살해하게 하였다. 다윗은 놉의 제사장들이 죽은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삼상 22:22).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서도 사울의 무자비한 행위의 근본 원인은 사울을 지배하는 악령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4) 다윗은 사울의 집요한 추적에도 그와 정면대결하여 그를 직접 처단하려 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 사울은 기회만 있으면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다. 어느 날은 전령들을 보내 다윗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죽이려 했지만 미갈의 기지로 인해 그를 찾을 수 없었다(삼상 19:11-16). 다윗은 사울의 포위망을 피해 생명 부지를 위해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했다. 그는 그일라에 있다가 사울이 추격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 그일라를 떠나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다(삼상 23:14-14). 또 그는 십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로 피신하였다가 엔게디 요새로 가서 그곳에 머물기도 하였다(삼상 23:24, 29). 사울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사울은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윗을 찾아 엔게디 광야에까지 왔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엔게디 굴 깊은 곳에 있었다. 그때 마침 사울이 대변을 보러 엔게디 굴속으로 들어갔다.

이때 다윗의 부하들이 원수를 처단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었다(삼상 24:4). 다윗은 자신이 행한 일이 무척이나 마음에 찔렸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신의 왕을 해치는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삼상 24:6). 사울이 사악한 왕이요 악한 영에 의해 거의 지배받고 있는 왕이지만 다윗이 판단할 때,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이라고 하는 사실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점적 권위와 관련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이 비록 당신의 뜻과 정반대로 가고 있을지라도 당신의 절대 주권으로 그를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이에 근거를 둔 그분의 독점적 권위를 침범하는 일은 심각한 범법행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주권에 관한 한 인간에게 한 치의 영역도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정국 모델을 확립해 가던 구약 왕정시대 초기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의 왕에게 부여되었던 특별한 권위를 오늘날 세상 권력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에게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상 권력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신정정치 제도 아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스라엘 왕에게 부여되었던 특별한 권위는 장차 오실 메시야(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될 승귀기독론적 권위를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특정 인간에게 그러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메시야 대망사상과 무관한 우상숭배적 신격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김정훈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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