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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아벨의 영성(2)

기사승인 2021.04.14  14: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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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동섭 교수의 선교 논단

방동섭 교수/ 미국 리폼드 신학대학원 선교학 박사,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역임, 글로벌 비전교회 담임
 

   
▲ 방동섭 교수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일꾼을 택할 때 그 사람의 실력이나 재능도 보지만 요즈음에는 거기에다 한 가지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자식으로서 부모와의 관계, 선배나 윗사람에 대한 태도,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살펴보면 대체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요즈음 교회가 선교사를 보낼 때도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다른 선교사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인터뷰할 때 그 점을 유심히 본다. 선교사 훈련도 잘 받고 다른 준비는 잘 되었지만 다른 선교사와 협력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선교지에서 다른 사람에게 큰 짐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관계라고 본다. 성경에서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보다는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 그 사람의 하나님과 관계성을 보면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 자기의 죄악 된 모습을 인식한 후에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께 돌아와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켜야 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회개’라는 말로 쓴다. ‘회개’는 어떤 면에서 요즈음 정치인들이나 국제 외교 무대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처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인이 하나님과 무너진 관계를 정상화하고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갔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끝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인이 선택할 수밖에 없던 길은 “여호와 앞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인의 문화도 철저하게 하나님 없이 사는 문화의 모습으로 재구성되었다. 이것이 인간 절망의 시작이었다.
 

허무와 좌절로 이어지는 자유

   
 

현대인의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20세기 후반 관념적, 합리주의적 철학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던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누구나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핵심인 절대적 자유의 개념이다. 그는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만을 제외하고 완벽하게 자유롭다. 내 인생은 내 것이며, 누구의 간섭도 필요 없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전후 시대의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르트르의 철학은 신선한 충격이 아니라 더 깊은 고뇌와 좌절을 안겨준 일순간의 바람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원형을 가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가인이 하나님을 떠난 후에 도대체 어떤 삶이 그를 기다리게 되었는가? 그에게는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완벽한 자유, 절대적인 자유가 그를 환영하고 있었는가? 성경은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처음 거주했던 곳이 에덴 동편에 있는 ‘놋’이라는 곳이었다고 알려준다(창 4:16). 이 ‘놋’(נוד)이라고 하는 말은 ‘방황하다’ 혹은 ‘요동하다”는 뜻이다.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놋‘이라는 '방황의 땅'이었다. 방황이나 요동함도 인간의 자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자유는 언제라도 허무와 좌절로 이어질 수 있는 자유였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살면 그가 살 곳은 “놋”이라는 땅 외에 다른 곳은 없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하나님 없는 문화도 지금 목적 없이 요동치며 “놋” 땅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인의 무신론적 문화가 휩쓸고 지나가는 자리에는 언제나 허기진 좌절이 숨 쉬고 있다. 1952년에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인간의 허무주의를 깊이 표현한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 영광스러운 노벨 문학상을 받고 그 후 어떻게 인생을 마치게 되었는가? 자기 인생에 환멸을 느끼고 머리에 총을 겨누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문화는 '절대 자유'가 아니라 '절대 허무'일 뿐이다. 하나님 없는 문화는 인간에게 언제나 화려한 미래를 약속하지만 그 문화는 인간을 끝내 배반하고 그를 소외시키게 될 것이다. '절대 허무'는 인간에게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허무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허무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방동섭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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