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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기사승인 2021.04.29  15: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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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진 교수의 성경 논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해: 문제와 해결 방안

눅 6:20-26을 중심으로

김경진 교수/ Ph.D, 호주 알파크루시스 대학교 박사원장

   

한국 기독교계, 그 중에서도 필자가 속한 복음주의 기독교계에서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는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복음의 영적 기능은 크게 강조되는 반면 복음의 사회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는 점이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복음주의 교회는 성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리와 드라이어는 한국 복음주의 교계의 교회론이 선교적 교회론에서 대형교회 모델로 바뀐 데에 한국 복음주의권 쇠퇴의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한국 복음주의권의 쇠퇴는 복음주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라는 복음의 역동적 측면을 강조하지 않은 데에 그 원인이 있다. 다시 말해 한국 복음주의 교회는 사회적 문제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 교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경우 점진적 성장을 이루고 있는데 이 두 진영은 사회 문제를 다루는 일에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한국 복음주의 교계는 이 부분에 약점을 갖고 있는가?” 이는 한국 복음주의 교회가 십자가 사건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전하신 주요 가르침인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복음주의의 뿌리를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 로마 천주교회는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인간의 행위와 노력을 크게 강조했고 이로 인해 은혜의 복음은 그 빛을 잃었다. 칼빈과 루터를 비롯한 대표적 종교개혁가들은 바울 신학의 핵심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라고 주장함으로써 로마 천주교회에 맞섰다. 이 전통에서 복음주의가 탄생했으며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통한 칭의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의 은혜에 강조점을 둔다.

종교개혁 신학자들이 복음의 은혜를 강조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만 믿음과 행위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여전히 교회의 숙제로 남아 있다. 바울 신학은 십자가의 구원 사역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십자가의 구원 사역만이 기독교 메시지의 유일한 주안점인가? 우리가 믿음만 강조할 경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 관계는 부각되는 반면 성경이 성도에게 명령하는 수평 관계는 소홀히 여기게 된다(시 82:3; 사 1:17; 미 6:8; 눅 11:42를 보라). 이와 같은 불균형은 한국 복음주의 교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이에 복음의 핵심 메시지에 관한 재정비된 시각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잘 알려진 다음 사항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바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사복음서는 예수께서 하신 일과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만 신약 전체를 지배하는 복음 메시지는 하나라는 것이다. 한국 복음주의 교계는 복음의 핵심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와 칭의로 보는데 이는 바울 신학이 강조하는 바를 따른 결과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3-4에서 바울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든다. 바울의 글 전체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신학, 즉 십자가를 중심으로 삼는 바울의 주장은 복음주의 구원론의 기초를 형성한다. 그러나 N.T. 라이트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이 기록된 사복음서에 나타나는 복음 메시지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이 각 복음서의 절정 부분에 해당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미리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바울 신학의 핵심이 하나님 언약의 성취이며 이신칭의 교리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만 나타날 뿐 다른 바울 서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가복음 8:27-33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믿느냐고 물으신다. 이때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고백을 한다. 정통 유대교를 열정적으로 따르던 베드로가 나사렛 출신의 젊은 선생인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로 고백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따라서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3년의 사역이 베드로로부터 이런 고백을 이끌어낼 정도로 인상 깊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베드로의 고백 이후 예수께서는 왜 자신이 죽으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이에 대해 레온 모리스는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복음서가 십자가의 그늘 아래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처럼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초대 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이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께서 죽으신 목적에 대해 제한된 정보만 제공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셨으며(마 20:28; 막 10:45) 많은 사람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고 말한다(마 26:28; 막 14:24; 눅 22:19-20). 복음서 내러티브들이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지만 복음서 저자들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추론하지는 않고 있다. 이들보다는 바울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에 있어서 가지는 의미를 서신서를 통해 소상하게 설명했다. 복음서의 경우 예수의 죽음과 부활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묘사하고 그분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따를 수 있는지 그 예를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사역이 덜 강조되는 경향은 사도신경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묘사하고 있으나 탄생과 십자가 죽음 사이의 예수의 생애는 생략하고 있다. 이는 사도신경이 당시 신학 논쟁의 중심에 있던 사안들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이와 같은 성격은 N.T. 라이트가 지적하듯이 “속이 비어 있는 것”으로 복음서 내러티브 “중간 부분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제임스 D. 타보르는 기독교가 성탄과 부활에만 초점을 맞춰왔고 이로 인해 복음의 전체 그림을 왜곡시켰다고 주장한다. 신약이 복음을 십자가 사건에만 국한시켰다면 예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신 직후 곧바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죽음의 중심성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이 내포하고 있는 전체적이고 풍성한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설교자들은 첫 설교인 취임 설교에서 일반적으로 자신의 사역 비전을 설명하는데 예수께서도 갈릴리에서 하신 첫 설교를 통해 자신의 사역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첫 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사역의 주요 동기가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말씀하신다(마 4:17; 막 1:15).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는 영토와 장소의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라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누가복음 19장 12절의 ‘받다’(데코마이)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신적 통치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사역 기간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셨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라는 용어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94번 사용된 반면 바울 서신에서는 13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보내신 40일 동안에도 예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에 그 초점이 있었다.

이를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제자들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핵심적 가르침으로 여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복음서는 예수께서 말씀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다시 말해 아픈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일을 통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셨으며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삶으로 초청하신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사명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8:12, 14:22, 19:8, 20:25, 28:23, 31). 이것은 십자가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 또한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목적이었다는 사복음서의 메시지를 더 명확히 드러내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계속해서 실현되고 있다. 이는 복음이 역동적이며 십자가의 메시지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 그 자체(아우토바실레이아)라고 말했던 오리겐을 비롯한 초대 교회 교부들의 주장은 옳다고 할 수 있다. C. H. 도드는 도착하다는 의미의 두 동사 ‘에기켄’과 ‘에프타센’을 비교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임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이루어졌으며 계속해서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점은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이끈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 6:10; 눅 11:2)라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글을 시작하며 필자는 한국 복음주의 교계가 복음을 불균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복음은 주로 십자가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며 이로 인해 복음의 구원론적 의미만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 신학에 나타난 이신칭의가 신약 시대 당시 하나님과 인류 간의 수직적이고 개별적인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한다. 복음에는 깨어진 이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기 위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라는 선교 명령이 담겨 있는 것이다.

본 글은 한국 복음주의 교계뿐만 아니라 다른 진영에 속해 있는 독자들에게도 도전을 던진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십자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도전이며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을 갖고 살라는 도전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와 공동체 내에서 역동적으로 또 세상을 돌보며 살아가라는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개혁 신학은 복음에 대한 전체적 이해를 통해 이론적 신학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을 살아내는 삶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김경진 교수 webmaster@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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